그리고 당신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죠 솔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에요 그리고 당신이 그렇게나 아끼던 두려움들은 돌아선 당신의 귓가에 계속해서 맴돌죠
※ 본 스레는 17금 수위를 기준으로 합니다. ※ 수위가 과하다고 생각 될 시 1회 경고 후 시트가 즉각 내려질 수 있습니다. ※ AT필드(따돌림)를 절대적으로 금합니다. ※ 어두운 세계관이지만 밝은 사람이 되도록 합시다. ※ 서로 서로 인사합시다. ※ 아리송한 부분이 생기면 캡틴에게 질문합시다. 물지 않아요!
애초에 깊이 파고들었다가는 잘릴 것 같으니까, 라는 말은 목구멍 너머로 삼켜버렸다. 이럴 땐 비전투직이라는게 그렇게 아쉬울 수가 없다. 차라리 전투직이라면 내 무력을 믿고 당당하게라도 있어볼텐데. 제롬은 자신의 사지가 수많은 나이프에 의해 잘려나가는 상상을 하며 잠시 침묵했다. 하지만 그는 알까, 이러한 상황에선 어중간한 무력을 가져서 무라사키의 신경을 건드는 것 보다는, 자신처럼 무력이고 뭐고 없어 가만히 있는게 더 나은 경우라는 것을.
"오래 걸리는 일은 아니니까. 네 모습이 너무 불안해보이기도 하고."
살짝 굳어있긴 했지만, 그래도 능숙하게 칼붙이들을 집어드는 제롬이었다. 물론 킬러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냥 넘어갔겠지만... 킬러라는 것을 알기 전엔 모습이 영 불안해서 지나칠 수가 있었어야지. 근데 그게 후회할 일이 될 줄은 몰랐다. 빌어먹을.
그래도 결국 칼붙이들을 다 줍고는 단순히 흥미를 돌리려 이야기를 꺼냈을 뿐인 찰나, 소녀가 불쑥 고개를 치켜들었다. 날 죽이려는 건가? 하고 반사적으로 주머니 속에 손이 갔지만, 알고보니 그냥 관심사가 나왔을 뿐이었을까.
눈을 빛내듯이 활발하게 이야기하다, 또 혼자서 무언가 생각했는지 어쩔 줄 몰라하는 소녀. 방금 모습이라던가, 지금 모습을 보면... 그냥 평범한 소녀처럼 보였다. 조금 소심할 뿐인 평범한 소녀. 방금 전까지만 해도 킬러라는 것을 알아채서 두려웠으나, 이렇게 어쩔 줄 모르며 손을 꼼지락거리고 있으면 작은 소동물같아 귀여워 보이는 것이었다.
아, 평범한은 다시 취소한다. 저 주머니 속에서 나는 소리는, 분명 평범한 소녀의 기준과는 멀고도 멀었다. 베르셰바의 기준에서도 가진 나이프의 갯수가 최소 두자리인 소녀는 평범함을 논할 때 논외다.
"꽤 잘 알고있네. 나이프에 관심이 많은가봐?"
하지만 이 성격은 어쩐지 이용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라는 생각이, 제롬의 머릿속을 스친다. 우연이지만 좋아하는 주제도 알아냈고, 이녀석 친분을 쌓아두면 언젠가 유용하게 쓸 수 있지 않을까. 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로 했다.
"나이프에 관심이 많은 친구, 시간만 괜찮다면 나 좀 도와줄래? 나도 나이프 하나 호신용으로 사둘까 했는데 주변에는 잘 아는 사람이 없어서."
그는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무라사키를 내려다보았다. 호신용 무기가 필요한 건 사실이다. 그게 나이프라는 점만 거짓말했을 뿐이지.
제롬이 정곡을 푹 찌르자, 소녀는 움찔하는 기색을 보이면서도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마지못해 긍정해버린다. 자신이 좋아하는 물건을, 거짓이라도 그렇게 쉽게 '아니다'라는 말로 배반할 수는 없다는 생각일터이다.
나이프. 이 보라빛의 소녀가 애착하는 물건. 아니, 그녀는 정확히는 모든 종류의 날붙이 자체에 집착을 가진다. 서슬퍼런 그것과 마주한 것 만으로도 섬짓한 소름이 돋고, 인간의 가장 깊은 내면으로부터 스산함을 불러일으키는 바로 그런 '칼날' 말이다. 그 물건에, 소녀는 어느새부터인가 마음을 완전히 빼앗겨선- 매료되어 자신의 일부처럼 지니고 다니게 된 것이었다. 그것이 자신의 손에 있는 한, 비로소 자신에게 가치라는 것이 생기는 것 같아서-
"호, 호신용...이요...?"
소녀가 눈을 깜빡거리면서 제롬의 말이 아리송하게 다가왔는지 고개를 기울였다. 갑자기 호신용이 필요하다는 남자의 말이 이 도시 사람들에겐 의심스럽게 들려올만도 했지만. 소녀가 들은 것은 그런게 아닌, '나이프에 관심이 많은 친구'와 '나 좀 도와달라'는 말이었다.
"우, 워, 원하신다면... 저, 저라도 괜찮으면 도와드릴게요..."
'이정도는 선배님들께 보고 안 해도 괜찮겠지...? 그저 호신용 나이프를 골라주는 것 뿐인걸... 그리고 그건,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거야...!' 그녀는 제롬의 의중따위는 가늠조차 하지 못하고 냉큼 수락해버린다. 게다가 이 소녀, 꽤나 비장한 눈빛을 하고있다. 무라사키. 그녀는 이미 이 도시의 일각에선 '가면살인귀'라는 흉악한 이름으로 거론되고 있는 요주의 인물이면서도, 또 한 편으론 그저 자신을 필요로 하는 자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힘 없는 소녀이기도 했다.
"어, 어떤 물건이 필요하신 건가요...!"
그리고 그녀가 가면과 연을 때지 않는 한, 그 소녀의 연은 어디까지나 이어질 것이다. 무라사키가 제 손을 꾸욱 쥐고서는 맡겨달라는 식으로 제롬에게 물어왔다. 자신을 필요로 하는 자에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