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도 않는 허세를 부린지 벌써 사흘째가 되어가고 있었다. 되도 않는, 살면서 처음으로 허세를 부려보이고 나서, 집을 나서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주저 앉아 버렸던 연우는 이틀 내내 혹시나 설영이 돌아오지 않는 것은 아닐지 전전긍긍 걱정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잠도 겨우겨우 쪽잠을 청하는 것으로 잠드는 것이 전부였고, 식사도 좀처럼 들어가지 않아 몸 건강히 기다리고 있겠다는 말도 못 지킬 것만 같았다. 그나마 이틀째가 되고 나서야 정신을 그나마 차려서 영양제를 챙겨먹고 하긴 했지만, 가뜩이나 약한 몸이 엉망이 됐는데 겨우 그정도로 멀쩡할리가 없었다.
" ... 티는 안 나겠지? "
일부러 잘 바르지 않던 비비라던가, 이것저것 준비를 해서 최대한 몸이 아파보이지 않게 준비를 마친 연우는 오늘의 마지막 손님을 배웅하고 나선 작게 중얼거린다. 그래도 약이라던가 먹어둔 덕분에 피를 빨릴 때까지는 멀쩡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죽진 않을거라 생각하면서. 그렇게 뒷정리까지 마무리 하고 카페를 닫을 준비를 하던 연우는 미리 준비해둔 자신만 마시기 위해 준비해둔 원두로 내린 따뜻한 커피를 텀블러에 담아 한손에 들고 카페를 나선다.
" ... 오셨어요? "
카페를 나서던 차에, 눈에 익숙한 후드티가 들어오자 카페 문을 잠그고 서선 차분하게 물음을 건낸다. 딱히 살가운 인사가 돌아올거란 생각은 하지 않으면서도 인사를 먼저 건내는 것은 한마디라도 더 주고 받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손에 든 텀블러를 조심스럽게 든 체 다가가선 가볍게 고갯짓으로 자신의 집을 가리킨다.
" 이런 곳에서 마시는 건 역시 곤란할테니 집으로 가죠. 아, 이건 오늘 피 마시고 돌아갈 때 챙겨가세요. 보온 잘 되는 텀블러에 커피 담아둔거니까, 머무는 곳에 돌아가시면서 마시면 나쁘진 않을거에요. "
커피 같은 것을 제시하면서 굳이 네게서 시간을 뺏지 않겠다는 의사를 행동으로 보여주려는 듯 텀블러를 건내어주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간다. 몸도 그리 좋지 않으니 길게 설영을 보는 것도 안 좋을 것이란 판단도 있긴 했지만. 여러모로 설영이 화를 내는 상황은 피하고 싶은 모양새였다. 허세를 부린 것에 대한 후회가 끼친 소소한 영향일지도 모르지만.
"... 이정도는 그냥 받아주세요. 저 마시려고 내려놓고, 한사람 분이 남아서 챙긴거니까. "
골목 어귀에 서서 기다린 지 얼마나 지났을까. 등으로 전해지는 벽의 거칠함과 한기를 느끼며 잠시 눈을 감고 있으니, 카페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뒤이어 진한 커피향이 바람을 타고 설영에게 닿았다. 그리고 들려오는 연우의 목소리. 설영은 감은 눈을 떠 살짝 시선을 들었다. 인사에 대한 답은 없었다.
후드 아래 얼굴을 감춘 채 저만 연우의 얼굴을 힐끔 보고, 연우의 손에 들린 텀블러를 보았다. 그것 때문인지 카페의 문은 닫힌지 오래였어도 은은한 커피향이 주변에 흐른다. 본인이 마시려고 가지고 나왔나 싶었지만 그걸 저에게 내밀며 가져가란다. 설영은 지그시 텀블러를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대꾸했다.
"됐어."
설영은 어디까지나 자신이 저지른 일의 사후처리를 위해 온 것 뿐이니, 설령 내리고 남은 거라 해도 받을 이유가 없다 생각했다. 좀전부터 흐르는 향 때문에 마시고 싶어지긴 했지만 커피 정도는 돌아가는 길에도 충분히 마실 수 있다. 굳이 연우가 주는 걸 마시지 않아도 되었다.
"들어가지."
커피를 거절한 뒤 그렇게 말하고 설영이 먼저 몸을 움직였다. 처음과 거의 변화 없는 검은 옷의 설영이 뚜벅뚜벅 걸어 건물 안으로 향한다.
오늘의 설영은 차갑다기보다 무뚝뚝한 편이었다. 아니면 기계적이라고 할까. 계단을 오르는 동안에도 말 한마디 하지 않고 그저 다리만 움직인다. 후드로 얼굴이 내내 가려져 있었으니 표정도 낯빛도 보이지 않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보일 틈은 없었겠지. 연우와 비슷하게 혹은 조금 빠르게 계단을 올라, 연우의 집 앞에서 문을 열어주길 기다렸다가 뒤를 따라 들어갔을 것이다.
한순간 커피를 거절하는 설영을 바라보는 연우의 얼굴에 할말이 많다는 듯한 표정이 아주 잠시 스쳐지나간다. 특별한 말은 아니지만 이것저것 말이 목까지 올라온 연우였지만 깊은 한숨을 푹 내쉬며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왠지 말해봐야 입만 아프고 자신의 감정, 그리고 설영의 감정만 상할 것 같았으니까. 텀블러를 내밀었던 손을 회수하곤 먼저 돌아서선 들어가자는 설영의.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건물 안으로 향한다. 서운함의 감정을 지금의 설영에게 쏟아내고 싶지 않은 자그마한 연우의 발악이었다.
" 어디서 하실건데요. "
아주 조금은 퉁명스러워진 목소리로, 자신을 따라 집에 들어서는 설영에게 멀음을 건낸다. 연우도 사람인만큼 서운함을 아예 감출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아니! 몸상태가 그 역시 그다지 좋지 않은 것이 한몫을 했겠지만. 아무렇게나 텀블러를 거실의 테이블 위에 올려두곤 고개를 돌려 설영을 바라보며 묻는다.
" 뭐, 그래도 익숙한 장소가 편하시면 침대로 가도 좋고, 그냥 쇼파에서 하는게 편할 것 같으면 여기서 해도 될 것 같네요. "
걸치고 있던 검정색 니트를 망설임 없이 벗자 새하얀 셔츠가 드러난다. 물음을 이어가며 셔츠의 단추를 풀곤 설영이 피를 마시기 좋게 해주며 설영을 응시한다. 일단 이대로만 가면 아픈 것도 들키지 않고 오늘의 일정을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 전 준비 다 됐어요. 여기요. "
쇄골에 새겨진 문양과 그 옆에 드러난 새하얀 목덜미. 설영의 바램대로 시간을 끌 여지를 주지 않으려는 듯한 행동의 연속이었다.
연우의 집은 오늘도 커피향이 가득했을지 그건 모르지만, 설영이 거절한 텀블러에서 흐르는 향 만으로도 충분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실내로 들어온 후로 커피향에 섞여 다른 향이 흘러들어온다. 인위적인 화학품의 향. 그것이 무언가 잠시 고민하느라 멈춘 사이, 연우가 어디서 할 건지 물었다.
한박자 늦게 반응한 설영이 고개를 돌렸을 때 연우가 입고 있던 니트를 벗고 있었다. 연우가 검은색 니트를 벗자 설영을 의문케 한 그 향이 옷을 따라 훅 퍼졌다. 향수? 아니다. 설영은 어쩐지 이 향의 정체를 밝혀야만 할 것 같았다. 뭔가를 오래 생각하기는 피곤했지만, 오늘은 연우가 군말 없이 행동하고 있으니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 생각하면서.
"소파로 해."
각자 다른 생각을 품은 채, 설영은 소파에서 하자며 연우를 지나쳐 먼저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손을 들어 천천히 후드를 넘겼다. 고개를 기울이거나 하면 아무래도 걸리적 거릴 거다. 그 탓에 창백한 얼굴과 퀭한 눈가가 드러났겠지만, 그걸 보고 또 무슨 소리를 해올지도 모르지만, 아무렴 어떠냐는 마음이었다. 무시하면 그만일 거라고.
"옷은 내가 내릴 테니, 등을 내 쪽으로 하고 앉아."
설영 개인적으로는 마주보는 것보다 뒤에서 무는 쪽이 편했다. 그러는 편이 식사 후에 기절시키기도, 받아내기도 편했으니까. 무엇보다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제일 좋았다. 얼굴을 보이지 않아도 된다는 것도.
자세를 갖춘 뒤에는 설영이 조금 움직여 연우의 등 뒤로 가까이 다가갔을 것이다. 가까이 다가간 설영에게서는 처음 본 날 흐르던 향과 같은 향이 난다. 잘 말린 작약과 희미한 잉크의 향. 향과 함께 다가와 낮게 숨을 내뱉으면서, 차가운 손을 어깨 너머에서 앞으로 뻗어 손가락으로 턱을 쓸고 턱 끝에 다다랐을 때 가볍게 뒤로 젖히려 했겠지. 연우가 풀어놓은 셔츠 사이로 가는 목이 무방비하게 드러나게끔.
그렇게 준비를 마친 설영이 목덜미로 고개를 기울여 가는 숨을 흘리다가, 무언가 걸린 것처럼 행동을 멈추고 연우에게서 떨어진다. 설영은 연우의 턱을 만진 손을 보고, 연우에게 시선을 돌려 지그시 응시한다. 그리고 잠시 후에 짤막히 물었다.
얌전히 소파로 걸어온 설영이 시키는대로 등을 지고 앉는다. 일단 나름대로 서운한 부분은 있었지만, 생각해둔 부분은 순종적으로 따라주자는 것이었으니 얌전히 따라준 것이다. 뒤에서 부시럭거리며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오지만 애써 못 들은 척 하기로 한다. 그야, 그것에 신경쓰게 되면 금방 부끄러워질 것 같기 때문이었다.
" ... 네? "
한순간 들려온 말에 짧은 대답을 던진 연우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바라본나. 어딘가 좋지 않은 것인지 퀭한 설영의 눈이 들어오자, ' 오히려 당신이 무슨 일 있는거 아니에요?!' 하고 붙들고 이야기 하고 싶은 연우였지만 일단 꾹 눌러담곤 어색하게 뺨을 긁적인다.
" 인터넷에 이성의 관심을 돋구는 방법이란게 돌아다니더라구요. 저도 좀 더 나아보일까 해서 해봤는데 아무 소용 없은 것 같네요. "
평소처럼 실없는 소리를 꺼내기로 마음먹은 연우는 조금 날카로운 말을 듣더라도 그러고 넘어가잔 생각을 한다. 부끄러운 듯 고개를 다시 돌려 등을 진 연우가 괜스레 머리를 매만지는 시늉을 해보인다.
" 그냥 그런거니까, 부끄럽게 또 말하게 하지 말아주세요. 이런건 원래 마음속으로만 알아주고 말아야 하는건데... 후..부끄럽네.. "
태연한 척 화끈해진 얼굴읗 식히려는 듯 손부채질을 하며 말한 연우가 슬그머니 고개를 살짝 돌려 바라본다. 언제나처럼 지어보이는 눈웃음이 그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 오래 끄는거 안 좋아하잖아요. 얼른 해버리자구요, 우리. "
어깨를 으쓱이며 말한 연우는 설영이 마시기 좋게 해주려는 듯 다시 자세를 아까 설영이 시킨대로 잡는다.
원래 화장을 하냐고 물으니 연우가 고개를 돌려 설영을 보았다. 설영의 얼굴을 곧장 보았을테니 뭐라고 한마디쯤은 하지 않을까 싶었으나 다행히도 그러진 않았다. 눈빛은 할 말이 몹시 많아보였다만.
곧이어 연우는 화장의 이유를 인터넷에서 보았다는 등의 이유를 대며 어쩐지 두루뭉술하게 넘기려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머리를 매만지거나 손부채질 하는 걸 보면 부끄러워서 그런가 싶으면서도 어딘가 석연찮다. 설영은 자신이 무언가 놓치고 있다고 느꼈다. 그건 여자로서의 감이기도 했고, 오랜 세월의 감이기도 했다.
"오래 끄는 건 좋아하지 않지만, 지금은 별개의 문제가 있군."
재차 자세를 가다듬는 연우와 달리 설영은 다시 연우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오히려 뒤로 몸을 조금 물러 거리를 두며 옆눈으로 연우의 등을 응시했다.
고집이란 참 귀찮고 성가시다. 하나라도 성에 차지 않으면, 하고자 했던 것도 선뜻 하지 못 하게 만들어버리니. 그러나 그것이 명에 직결된 것이라면 신중해야 하는게 맞다. 설영은 무의미하게 포식을 하는 짐승이 아니니까. 그런 부류와는 다르고, 그렇게 생활하는 것만이 긍지였으니까. 이 징글맞은 삶을 겨우 이어가게 해주는.
짧은 상념을 마친 설영은 낮은 숨을 천천히 내뱉으며 얼굴을 한번 쓸어내렸다. 손을 움직이고 내린 후에야 닫았던 입을 열었다.
"화장품의 냄새 때문에 입을 댈 수가 없어. 그러니 씻어내고 와. 아님 갈 거다."
순순히 씻어내고 온다고 해도 피를 마실지 말지는 보고 정하겠지만, 일단은 씻을지 말지부터 정하게 하는게 좋을거 같았다. 그래서 안 씻을 거라면 이대로 가겠다는 엄포를 더한 후 설영은 입을 다물었다. 이 이상 말은 하지 않을 거라는 듯.
별개의 문제가 있다는 설영의 말에 자세를 가다듬던 연우가 고개를 갸웃한다. 의아함에 고개를 돌리니 자신의 등을 보고 있는 설영이 눈에 들어왔고, 역시나 퀭한 눈을 보고 있으니 무어라 말을 하고 싶은 마음이 치솟는 연우였다. 자신도 숨기는 것이 있었기에 굳이 말을 하지 않은 체 조심스럽게 설영을 살피던 연우는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 아, 알았어요. 금방 씻어내고 올게요. "
연우는 그냥 가버릴거란 엄포에 후다닥 일어나선 다급하게 화장실로 달려간다. 불안한 감이 없잖아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틀동안은 약도 먹고, 밥도 잘 챙기고 그랬으니 생각보단 별 문제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화장실에서 클렌징폼으로 화장을 씻어낸다. 화장을 씻어내고 난 얼굴은 평소보다 아주 조금, 미세하게 창백해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다행히 못 봐줄 꼴은 아니었다. 그냥 하루종일 일을 했기에 쌓였을 피로가 조금 엿보이는 듯 했다.
" ... 괜찮을텐데. "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넘긴 연우는 꼼꼼히 화장이 남지 않았는지 확인을 하며 중얼거리곤 이내 물기를 닦아내며 화장실을 나선다. 그리곤 얌전히 소파로 돌아와 아까처럼 등을 돌린 체 앉아버린다. 화장품 냄새는 날아갔을테니 더이상 설영이 거리낄 것은 없을 것이란 생각을 하면서.
" 꼼꼼히 지워서 이젠 정말 냄새 안 날거에요. 뭔가 냄새라고 하니까 기분이 이상하지만, 아무튼 개인적으론 저한테는 이상한 향이 나진 않는다고 생각하니까요..! "
슬그머니 고개만 살짝 돌려가며 평소처럼 재잘거린 연우는 이내 미소를 살짝 머금어보이며 설영을 바라보곤 다시 등을 돌려 앉는다. 정말로 자신은 준비가 되었다는 듯 바른 자세로.
엄포를 놓은게 도움이 되긴 했는지, 연우는 곧바로 일어나서 씻으러 갔다. 서둘러 가는 뒷모습을 보며 설영은 무거운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그냥 간다고 하는게 나았을까. 이대로라면 돌아갈 기운이나 있을지 모르겠다. 그냥 하루 미루는게 현명했을지도 몰라...
잠깐, 그 잠깐 사이에 졸 뻔 했지만 연우가 나와서 오는 소리에 간신히 깰 수 있었다. 하지만 정신이 몽롱해진 건 금방 사라지지 않아 연우가 뭐라고 말을 하는데도 알아듣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어찌저찌 들은 단어 몇개로 그 말을 유추하고, 다시 보이는 등을 향해 가까이 다가갔다.
"그 냄새 없으면 너 커피향 밖에 안 난다. 조용히 해."
설영은 아까처럼 등 뒤로 다가가 손을 뻗으며 중얼거렸다. 어깨에 턱이 살짝 걸쳐있었으니 아마 귓가에 속삭이는 듯이 들렸을 것이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라 더더욱.
재차 뻗은 손이 아직 물기가 느껴지는 연우의 턱에 닿는다. 아까와 비슷하지만 조금 느릿한 동작으로 연우의 턱을 젖혀놓고 설영의 남은 손이 셔츠를 당겨 문양이 있는 쪽 어깨와 목덜미를 드러낸다. 하얀 살갗에 설영의 입술이 한순간 닿았다가 떨어지는 감촉이 제법 섬찟했을지도. 금방이라도 뾰족한 이가 살갗을 뚫을까 싶었겠지만 저번과 달리 이가 먼저 닿지 않는다. 입술과 비슷하지만 조금더 미지근한 감촉, 설영의 혀가 물 곳을 가늠하듯 핥기 시작한거다. 이게 뭐하는 건가 싶겠지만 혀가 반복적으로 닿는 부분이 얼얼하게 마비되어 가는 것이 느껴질 거다. 설영의 송곳니가 뚫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하지만 거기까지 밑준비를 다 해놓고 설영이 무는 일은 없었다. 이제 드디어 무나 싶을 쯤, 작게 한숨을 쉰 설영이 연우의 셔츠를 도로 올려주고 다시 물러난 것이다. 순간적으로 시야가 흐릿해 낯빛을 제대로 못 봤지만 살갗에 혀를 대니 이젠 모를 수가 없었다. 설영은 잠시 고개를 숙여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 있다가, 그 상태로 말을 꺼냈다.
"일단 물어보기는 하겠는데. 제대로 대답하는게 좋을거야."
후... 느릿하게 숨을 한번 내쉰 뒤, 묻는 말이 뒤를 잇는다.
"너 지금 몸 상태 안 좋지."
질문을 던진 설영이 고개를 약간만 들어 좀전보다 깊게 패인 눈으로 연우를 응시했다. 대답을 기다리면서.
설영의 혀가 닿을때면 작게 몸을 움찔거리던 연우는 갑작스레 입술을 떼어내곤 물러서는 설영의 말에 화들짝 놀라 몸을 돌린다. 한눈에 보아도 물음의 대상인 자신보다 상태가 더 안 좋아보이는 모습에 놀란 표정을 짓는 것은 덤이었다. 자신을 응시하는 그 눈을 피하는 순간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아니면 여기서 설영을 먹이지 않으면 위태로워 보였기 때문일지 몰랐지만 똑바로 설영의 눈을 응시했다.
" ...저 그래도 이틀 내내 푹쉬고 밥도 잘 먹고 해서 멀쩡해요. 근데 오히려 그쪽이 아파보여서 ... "
무어라 호칭을 할까 고민을 하던 연우가 말을 골라가며 조심스럽게 말한다. 최대한 기분이 상하지 않게 하고 싶었다. 더 나빠질 것도 없는 관계라고 하지만, 그래도 위태로워 보이는 사람을 내버려둘 생각은 없었다. 또 오지랖을 부린다며 설영에게 무슨 말을 들을지 알 수 없었지만.
" 제 걱정은 할 필요 없어요. 이건 오지랖도 아니고, 당신보다 덜 살았을디고 모르지만.. 제 몸은 제가 제일 잘 아니까. 아까부터 말할까 말까 했는데 ..오히려 위태로워 보이는 건 당신이에요. 그러니까 일단 오늘 하려던 것부터 얼른 해치우자구요. "
연우는 몸을 좀 더 가까이해선 거리를 좁히곤 진지한 눈으로 여전히 설영의 눈을 응시하며 차분하게 말한다. 어쩌면 내일은 몸져 눕게 될지 모르지만, 지금은 물러서면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좀 더 강경하게 나가려는 듯 했다.
설영의 물음은 정곡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계속 신경쓰이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명확해졌다. 설영은 여기서 더 실수를 얹지 않게 된 것에 속으로 안심했다. 연우 본인은 저렇게 괜찮다고 어필하고 있었지만, 연우의 상태를 대부분 파악한 설영에게 통할 리는 없었다. 그러니 연우가 돌아서 고집스럽게 설영을 보고 말을 해도 설영의 태도가 바뀌지는 않았다.
"그래. 말씨름 하는거 싫으니까, 한번에 알아들어."
연우의 말꼬리를 잡으며 말문을 튼 설영이 잠시 손으로 눈가를 가렸다. 사람이 피곤할 때 미간을 누르거나 이마 양 옆을 누르듯이 말이다. 그러면서 숙였던 몸을 세워 바르게 앉았다. 자세를 고친 후 손을 내려 얼굴을 드러내니 눈가 만이 아니라 얼굴 전체가 잿빛이다. 설영은 또 호들갑을 떨기 전에 말을 막듯, 손을 잠시 들었다 내리고 말했다.
"일단 내 상태는 아픈게 아니야. 사흘 내내 잠을 거의 안 자고 도망쳤던 걸 찾아다녔어. 그래서 이런거지 그 날 처럼 식사가 간절하거나 그런 건 아니야."
그 말을 뒷받침 하듯 지금 설영은 짜증보다 피로와 졸음이 더 짙어보인다. 너무 피곤해서 짜증 낼 기운도 없는 것처럼. 곧이 곧대로 들으라는 듯 몇초간 응시한 뒤 다시 입을 움직인다.
"그런데 너는 달라. 네 몸은 네가 잘 알지 몰라도, 인간의 몸은 내가 더 잘 알아. 이미 넌 흡혈당한지 열흘 밖에 안 됐어. 내가 마셨던 피가 전부 회복되었을 리도 없는데 거기다 무슨 헛짓거리를 했는지 그 정도로 컨디션이 떨어진 거면, 후... 반컵은 커녕 이를 꽂은 것만으로 기운이 빠져나갈 수도 있어."
설영은 말을 이어가는 것만으로 피로가 몸을 점점 적셔오는 듯 했지만 꿋꿋하게 설명을 마쳤다. 무조건적으로 무시하던 전에 비하면 나은 대응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말투는 딱딱하고 기계적이었다. 잠을 쫓아내려는 듯 고개를 살짝 저은 설영이 반음 더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 목적을 이루는데 너를 무리하게 하는 건 내 자존심이 허락치 않아. 그러니 오늘은 기각이다."
제발 이 한번으로 알아듣고 가게 해줬으면, 하는 생각은 삼킨 채 천천히 후드를 쓰는 설영이었다. 이제 갈 것처럼 말이다.
연우는 잠자코 설영의 말을 듣고 있었다. 결국은 설영은 지난번의 여자를 찾아다니느라 피로가 쌓인 상태라는 것이겠지. 그렇다면 조금이나마 눈을 붙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판단이 서자 연우는 망설임 없이 이야기를 꺼낸다.
" ...이상한 생각하고 말하는 건 아니고.. 합리적으로 생각해보면 오히려 도망친 그 사람이 절 노리고 있으면 제 집을 노릴게 분명하잖아요? 제 가게 손님들은 대부분 제가 이 건물에 사는걸 알고 있거든요. 그 사람도 일주일 이상 머물렀으니 제가 여기 살고 있는 걸 알고 기웃거릴지도 몰라요. "
혹여 설영이 또 연우가 개수작을 부린다고 생각할까봐 다급하게 손을 내저으며 말을 이어간다. 합리적으로 생각해서 자신이 반쯤은 미끼가 되는 것 같은게 그 여자를 잡는데에 큰 도움이 될테니까.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방법으로써 자신이 제안하는 것이라는 듯 연우는 맞춘 눈동자를 움직이지 않고 말한다.
" 전 거실에서, 그쪽분은 방에서 주무시는걸로. 혹시 모르잖아요, 제 집에 기웃거리거나 몰래 들어올지. 그때는 그쪽분이 바라는데로 잡아서 해결하면 될거구요. 그러니까 자고 가는건 어떨까요..? "
정말 다른 불순한 의도같은 것은 없다는 듯 두손을 들어보이며 말한다. 잿빛같은 설영의 얼굴을 좀 더 눈여겨 보면서.
" 그 상태로는 잡을 수 있는 것도 못 잡을 것 같단 말이에요. 정말. "
몇시간이라도 눈 좀 붙이다 가요, 그러다 혹시 잡으면 일석이조 잖아요. 연우는 그렇게 덧붙여 말하곤 어떻게 하겠냐는 듯 말한다.
" 당신이 근처에 있으면 저도 맘 편히 잘 수 있을테니 금방 몸도 좋아져서 오눌 못 한 흡혈도 할 수 있을거구요. 네? "
말싸움 하기 싫다더니, 무슨 말을 저렇게 길게 줄줄이 늘어놓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자신의 피로가 가중된 것이 연우의 말들을 듣느라 그런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졸음에 겨운 설영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간다. 아마 반은 맞다고 봐도 무방하겠지. 지금처럼 졸릴 땐 주변을 인지하기가 어려워지니.
잠시 딴 생각을 하며 넋을 놓았더니 어느새 연우의 말이 끝나있었다. 그렇다고 말을 안 듣고 있던 건 아니라, 제대로 그에 대한 생각도 했다. 결과적으로 연우가 한 얘기는 합리적, 효율적인 방법이 맞긴 했다. 손사레를 치면서 그저 한 말의 의도 뿐이라고 표현하는게 먹힐 거라 생각했다면 오산이다만. 설영은 연우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후드를 좀더 깊게 눌러 쓰며 말을 골랐다. 그러니까-
"너라면 널 죽일 뻔한 상대가 있을지도 모르는 곳에 다시 얼씬거릴 마음이 들겠나? 고작 여흥 한번에 목숨을 거는 부류가 아냐. 그것들은."
그랬으면 그 날 보자마자 도망을 치지 않았을 거라고, 설영은 거의 잠긴 목소리로 말을 했다.
"똑똑히 기억해. 그 때 그 잡것을 놓친 건 네가 날 붙잡아서라는 걸.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거슬려. 고작 인간 주제에."
거기까지 말을 하고 이제 됐으니 가겠다고 하려했다. 원래대로라면. 딱 그 말을 하려는 순간, 설영은 떠올렸다. 아까 카페로 오기 직전에 현기증을 일으켰던 걸. 아까보다 더 피곤한 지금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오히려 위험성이 더 늘면 늘었다. 건너뛰는 중에 정신을 잃는다면... 생각만 해도 오싹한 상황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선뜻 가겠다는 말이 나오질 않는다. 잠깐의 텀을 두고 설영이 입을 열었다.
"그것이 집 안까지 들어올 일은 없겠지만, 지금은 내가 한계라 좀 쉬었다 가야겠어. 자리면 여기 소파면 충분해. 몇시간 눈만 붙이고 갈테니."
결국 쉬어가는 쪽을 택한 설영은 몸을 뒤로 돌리고 후드를 쓴 채로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편히 누운 것도 아니고 앉은 자세로 쪽잠을 자듯이 말이다. 이젠 설영이 연우에게 등을 보이고 잠에 겨운 목소리가 몇마디를 덧붙였다.
"이 정도면 네 같잖은 요구를 많이 들어준 셈이니, 이 이상 내게 아무것도 하지 마. 담요 따위를 덮어주는 것도, 네 멋대로 나를 옮기는 것도."
치욕스러워. 이를 악문 듯한 말을 끝으로 설영은 조용해졌다. 등을 돌렸으니 얼굴이 보이지 않아 잠이 든 건지, 그저 연우가 가길 기다리는 건지 알 수 없는 채로.
" 근데 오히려 궁지에 몰린 먹잇감이 무엇을 할지 모르는 법이니까요. 앞도 뒤도 막혀버린 사냥감이 뭐가 망설여지겠어요. "
연우는 설영의 말을 듣곤 잠시 생각에 잠긴 듯 하다 희미한 미소를 지은 체 말한다. 앞도 뒤도 없이 몰리다보면 자포자기하고 행동하게 될지도 모르는 법이다. 게다가 며칠간 제대로 잠도 못 자서 약해진 사냥꾼을 우연히라도 보게 된다면 더욱 더 앞뒤 가리지 않는 행동에 기름을 끼얹는 일이 될지도 모르는 법이니까.
" 아하하.. 미안해요.. 저도 의도했던 건 아니지만... "
똑똑히 기억한다는 말에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뺨을 긁적이던 연우는 일단 얌전히 사과를 한다. 그땐 정말 설영의 손에 피를 묻히기 싫다는 마음에, 멋대로 몸이 움직였던 것이니까. 그래도 자신의 몸이 한 일이니 얌전히 사과는 해두기로 하는 연우였다. 미움을 받는 건 지금 정도도 충분히 무거웠으니까.
" 알겠어요. 더이상 건드리지 않을게요. "
연우는 등을 보이고 움크린 설영의 말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는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어찌됐든 이것으로 한걸음 나아가지 않았는가. 물론 설영의 몸상태라던가 환경의 요소가 더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자신의 말을 수긍하고 설영이 자고 가기로 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연우는 자신도 모르게 절로 지어지는 흡족한 미소를 억누르며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킨다. 그대로 방에 돌아가는 것이 아닌, 주방으로 가서 너무 차갑지 않은 미지근한 물을 컵에 따르고, 아까 커피가 담겨있던 텀블러도 들고와선 소파 옆의 테이블에 언제든 마시기 좋게 올려두곤 거실의 불을 꺼준다.
" 굳이 건들지 않을테니까 신경 쓰지 말고 푹 주무세요. 진짜 저보다 아파보였거든요. "
연우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등을 돌린 설영에게 작게 말한다. 그리곤 설영의 숙면에 방해가 되지 않으려는 듯 발소리를 죽여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는다. 물론 방에 들어가선 그대로 몸을 침대 위에 던지곤 몰려오는 기쁨에 발을 동동 구르기는 했지만. 최대한으로 소리를 죽이려곤 했다.
"...발전은 했네..응..."
몸관리 좀 더 해야겠다, 라는 막간의 반성도 하면서 연우는 자꾸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주체하려는 듯 두손으로 볼을 만지작 거렸다.
기다렸을텐데 답레 대신 이런 얘기로 갱신하게 되서 유감이야. 음. 그냥 본론만 말할게. 나는 이 어장을 더 이어가지 못 하겠어. 이유는... 일상을 이어가다보니까 연우주와 내가 잘 안 맞는다는 느낌이 계속 들었어. 그리고 이걸 맞추는 건 어렵겠단 생각도 자꾸 들었고. 그렇다고 그냥 두고 계속 하다간 끝이 좋지 않을 거 같아 이 생각이 들었을 때 끊는게 나을거라 판단했어. 다른 이유도 여러가지가 있지만 대부분 내 쪽의 일방적인 이유들이라 자세히 풀지는 않으려고 해. 짧은 기간이나마 실례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