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혹시 알아요?! 누가 당신이랑 제 관계를 어렴풋이 알아채서, 당신을 팔아서 절 유인할지 어떨지.. 그럴 때를 대비하려면 서로 알아차릴 수 있는 것 정도는 있어야 할거 아니에요. "
연우는 자신과 거리를 두려는 듯 냉담하게 대꾸를 하고는 집을 나서려는 설영을 바라보다 답답함을 조금 담아 말한다. 거리를 두려는 것도 이해한다. 화를 내는 것도 이해한다. 근데 이름 하나 정도는 만약을 대비해서 알고 있으면 나쁠 것은 없다 생각했다. 오늘처럼 자신을 노리려는 존재들이 나타난다면 이름을 물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낚아채지는 것을 피할 수 있을테니까.
" 그러니까 이름 하나만 알려주면 오늘은 더이상 귀찮게 안 하고 보내드릴게요. 이정도는 죽을 뻔한 사람, 그러니까 피를 먹인 것 말고도 얼어죽을뻔한 사람 도와준 값어치 정도는 될 것 같지 않아요? "
당신이 그냥 피를 몇번 빨고 갈 것이라는 것을 모르는 건 아니라는 듯 한숨을 푹 내쉰 연우가 허릿춤에 손을 올려둔 체 어떻게 할 것이냐는 듯 바라본다. 반쯤은 이판사판이었다. 또 욕을 퍼붓고 떠났다가 예정한 날에 돌아올지도 모르지만 이름 정도는 알아둬야 할 필요가 있다는게 연우의 고집 아닌 고집이었다.
" 그리고 잘 따라주길 바란다면 너무 날 세우는 것도 좋지 않을거라고 생각해요. 물론 당신이란 존재가 절 얼마든지 죽일 수 있는 존재란 건 알지만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린다고 하잖아요. 저도 너무 몰아붙여지기만 하면 귀찮게 만들지도 모른다구요. "
한숨을 푹 내쉰 연우는 어떻게 할거냐는 듯 식탁 근처에 서서 팔짱을 낀 체 설영을 바라보았다.
대체 오늘만 몇번째 걷다가 멈추는 걸까. 설영은 또다시 걸음을 멈추고 생각했다. 대체 몇번이나 자신을 멈추게 해야 성에 찰까. 저 인간은.
"...하."
나름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을 드러내는 연우의 말들에 설영이 제일 먼저 내뱉은 건 한숨이었다. 생각해보니 한숨도 도대체 몇번째인가. 원래 이렇게 쉽게 한숨을 쉬는 편이 아닌데. 답지 않은 짓거리들을 하게 되는 이유가 모두 저 인간 하나라는게 경이롭게 느껴질 일은 영영 없겠지.
거듭된 짜증에 되려 뚝 하고 감정이 끊긴 설영은 천천히 연우를 향해 돌아섰다. 마주 서서 고개를 똑바로 들자 후드를 썼음에도 얼굴이 선명히 연우에게 보였을 것이다. 마치 석고로 뜬 가면을 쓴 것처럼 아무런 표정도 없던 하얀 얼굴이, 돌연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일그러진 조소를 짓는 것까지.
"분명히 말 했지. 네가 뭘 당하든 난 구해주지 않을 거라고. 그런데 그걸 구실 삼아 협박을 해? 거참 웃기는 군. 너 말야. 착각하는게 있는데, 내가 너한테 제일 화가 나는 부분은 내게 억지로 식사를 하게 만든게 아냐. 기껏 지긋지긋한 삶에 미련을 놓고 포기하려는 걸 막은게 화가 나는 거다."
사실은 그랬다. 설영은 너무 오래 살았고 앞으로 살 시간들이 너무 끔찍하게 여겨져 식음을 전폐했던 것이다. 공복에 추위가 겹쳐진 상태로 햇빛까지 쬐면 적어도 추하게 가는 꼴은 면할 거라고, 추위 속에 웅크리며 생각했었다. 연우를 향한 조소는 점점 더 일그러져 비참하게 변한다. 올라갔던 입꼬리는 떨어지고 두 눈은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눈빛을 띄었다.
"죽으려는 사람을 구해줬다고 해서, 그 사람이 감사를 표할 거라 생각했나? 오지랖도 정도껏 부리고 살아라. 네 명을 재촉하는 꼴 밖에 되지 않으니."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하고 피하듯 돌아선다. 고개를 숙인건지 후드가 내려온건지 애매한 기울기로 얼굴을 다시 감추고, 덧붙인다.
"귀찮게 하던지 말던지 네 맘대로 해. 잠시 더 연명하게 된 생에 자존심 한번 꺾는 것 쯤 못 할 것도 없어."
더 할 말 있나. 설영은 또 붙잡혀 서기 싫었기에 그렇게 물었다. 할 말 있으면 지금 다 하라고.
" 이제야 말해주네요. 왜 그런지 말을 안 해주면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해요.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슨 의도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제가 마음을 꿰뚫어 보는 능력 따위가 있을리가 없잖아요. "
연우는 죽기 위해서 그랬다는 것을 설영의 입으로 듣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보인다. 이제야 눈 앞의 존재에 대해서 한가지 알게 되었다. 여태껏 왜 그렇게 분노하는지, 왜 그렇게 다 내려놓은 사람처럼 구는 것인지 말 한마디 해주지 않았으니 연우는 그것에 대해 알 턱이 없었고, 그녀에게 거슬리는 행동들만 해올 수 밖에 없었다.
" 뭐,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죽으려는 사람을 살리면 기뻐하고 감사할걸요. 당신의 경우는 특별한 경우가 되겠지만. 오지랖이면 오지랖이고 선행이라고 하면 선행이라고 할 수 있겠죠. 어떻게 말하든 말하기 나름이니까. "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하는 설영의 말에, 어깨를 으쓱이며 후회 같은 것은 절대로 하지 않을 것이라는 듯 말한다. 앞으로도, 홀로 죽어가던 설영을 구한 일을 그저 단순한 오지랖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는 듯 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말이다.
" 예에~ 그러시겠죠. 더이상 잡지 않을게요. 아예 얻은게 없지 않기도 하고.. 찾아오실 날엔 깔끔하게 준비하고 있을테니 잊지 말고 오시기나 하세요. "
더이상 붙잡아 봐야 네게서 뭔가 돌아올 것이란 생각이 들지 않았는지 연우는 가볍게 고개를 저어보이곤 가도 괜찮다는 듯 손짓한다. 일단 설영에 대해선 서둘러 다가가려고 해봐야 소용이 없다는 생각을 품은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포기한 것은 아니지만.
... 설영주의 레스를 본 연우의 꼬리가 맹렬하게 흔들리는게 보이는 것 같다. 연우 만나기 이전엔 다른 인간이랑 사적 대화도 안 했다는 말에 기뻐하는게 보이는 것 같아 ㅋㅋㅋㅋ 연우주도 왠지 기쁘다 (??) 그렇게 방어적이 된 일에 대해선 차차 연우가 노력해서 알아나가야지...! 그래야 스토리를 짜둔 설영주가 보람이 있찌!
ㅋㅋㅋㅋㅋ 설영이가 애 돌보는 느낌이 나는 것 같은데! ㅋㅋㅋ 일단 별 탈 없이 사흘 뒤로 하는 건 어때? 중간에 또 연우한테 무슨 일 있으면 설영이가 또 화낼 것 같아서...음.. 사흘 뒤에 왔는데 하필 컨디션이 최악일때고, 그걸 연우는 또 약속을 어기면 설영이랑 벽이 더 두터워질까봐 숨기고 피를 준다던가..
나이로 보면 한참 애기긴 하지...ㅋㅋㅋ 어 그럼 사흘 뒤에 약속대로 만났는데 연우의 상태가 썩 좋지 않더라, 인 걸로 시작하자. 낮에 카페를 가있는 것도 생각해보긴 했는데 아직은 이른 거 같기도 하고. 아 맞다. 만약 설영이 연우 만날 때랑 그 외랑 차림새가 완전 다르면 어떻게 생각하려나? 연우한테 올 때는 맨날 비슷비슷하고 시꺼먼 옷만 입고 오는데 알고보니 낮이나 다른 사람 만날 땐 전혀 다르게 차려입는 걸 알아버린다면?
응애라기보단... 한입에 쏙 먹겠네...같은 느낌? 아... 확실히 이런 초반을 겪었으면 그럴 만도 하네. 응. 싸움이 될지 투정세례가 될진 그 때 가봐야 알겠지만 어느쪽이 됐든 설영이도 많이 미안해할거 같다. 자기 업보에 뒤통수 맞은 기분이 들지도 ㅋㅋㅋ 근데 지금에서 보면....진짜 아득한 나중이긴 하네....
ㅋㅋㅋㅋㅋ 간식에서 머물지말고 더 나아가야지! ...혹 나중에 다른 뱀파이어들이 합심헤서 설영이를 어떻게 한다고 협박하고 그러면 자기보다 설영이가 중요하다고 하면서 하는 수 없이 그러는 경우 같을 때에? 어지간히 자기가 힘든 일로는 포기 안 할걸! 설영이랑 관계된 일이라면 모를까..
설영이 끝내 자신의 사정을 털어놓고 만 그 날 밤, 연우가 더이상 잡지 않겠다 하여 설영은 조용히 그 집을 빠져나왔다. 어쩐지 몹시 지치고 힘들어, 5층 계단을 비실비실 내려오는 동안 넘어져 구르지 않은게 용했다. 그래도 내려오는 동안 다리가 점점 풀리기는 해서 나가는 문턱을 앞에 두고 설영은 주저앉고 말았다. 풀석. 가볍게 앉는 소리가 난 뒤 설영이 계단 옆 벽에 몸을 툭 기댔다. 센서로 켜지는 등이 꺼질 때까지 가만히 앉아있다가, 쥐어짜낸 듯한 탄식 한마디를 흘렸다.
"지긋지긋해......"
앞으로 해야 할 것도, 그 시간도, 설영에게는 전부 그렇게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이런 생각과 고뇌를 털어놓을 곳이 없다는 사실 역시 설영의 고독을 더욱 깊게만 만들었다.
유난히 길게 느껴진 그 밤. 계단의 센서등이 다시 켜지는 일은 없었지만 동이 터 올 무렵엔 그저 빈 계단만이 여명빛으로 물들을 뿐이었다.
그 뒤 사흘 동안 설영은 제법 바빴다. 연우를 덮치려 한 뱀파이어를 찾으러 다녀서였다. 낮에 자야 하는 잠도 줄여가며 일대를 샅샅이 뒤지고, 해가 질 무렵엔 연우의 카페를 감시하던 곳으로 와 밤새 카페 감시를 했다. 혹시나 다른 뱀파이어가 드나들지도 모르니. 그렇게까지 철저할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머릿속이 복잡할 땐 바빠야 잡생각이 안 난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설영의 행동 패턴은 딱 그랬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기 위해 몸을 혹사시키는, 전형적인 과로의 패턴.
그렇게 자신만의 일과로 바쁜 시간을 보내다보니 사흘이 지나가는 건 눈 깜빡하는 것보다 금방이었다. 카페를 보던 중에 문득 생각나지 않았다면 오늘이 사흘째 되는 날이라는 걸 잊고 있었을 만큼 말이다. 그만큼 정신없고 지쳐있다는 걸 보여주듯, 설영의 눈 밑은 거뭇하게 패여 있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식사고 뭐고 은신처로 돌아가 퍼질러 자고 싶었지만 이놈의 자존심이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사흘 전 연우가 잊지 말고 오기나 하라고 했던 말이 귓가를 맴돌기도 했으니.
동시에 연우의 집에 흐르던 커피의 향이 뇌리에 스쳤지만, 무시했다. 그깟 커피 따위, 라고.
결국 설영은 피곤한 눈을 뜨고 카페의 마지막 손님이 나가는 것까지 지켜보았다. 겨우 카페 내부가 비고, 조명이 꺼지며 마감 준비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지켜보던 자리에서 일어섰다. 순간 현기증이 번지며 눈 앞이 어지러워져 몸을 휘청이며 넘어질 뻔 했지만 간신히 바닥을 짚어 추락하는 불상사는 면했다. 놀란 숨을 고른 후 설영은 아래로 내려갔다.
천천히 카페를 향해 걸어가며 어디에서 기다릴까 하다가, 이전에 연우가 설영을 기다리던 그 골목 어귀로 향했다. 차가운 벽에 등을 기대로 반쯤 가로등 불빛에 걸쳐진 채로 서서, 언제나처럼 검은 후드를 푹 눌러쓴 모습으로 연우가 나오는 것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