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더럽다. 추악하다. 내게 붙은 평가들이었다. 하룻밤의 여흥으로, 불어터진 몸으로 내 몸을 깔아뭉개던 그들이 내게 잔에 담은 물을 얼굴에 부우며 했던 이야기들은 아직도 날 살아있도록 만들었다. 그들이 내 얼굴과, 몸을 보고, 터진 입술에 흐르는 피를 삼킬 즈음에는 난 그들에게 방긋 웃는 얼굴로 인사해야만 했다. 그게 내 역할이었다. 이름 없는, 단지 누군가에 의해 휘둘리는 인형. 죽는 것도 거부된, 그저 살아야만 하는 인형.
게이트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존재한다. 많을 뿐만 아니라 매 순간 나타나는 것이 게이트이다. 게이트가 발생하고 관련 의뢰가 생기면, 그 중에서 수준에 맞는 임무를 수주해 문제를 해결하고 빠져나오는 것이 헌터의 일이다. 라임과 웨이가 이번 임무에 착수한 이유도 어떠한 타의도 없이, 단지 그뿐이었다.
소탕 의뢰의 대상이기도 한, 이 게이트 안의 생명체-웨이는 이것의 이름을 잊어버렸다-는 적어도 헌터를 대상으로 유의미한 물리력을 가지고 있지 않아 보였다. 슬라임처럼 반투명하고 흰 점액질로 구성된 그것들의 몸체는 내구도는 물론이거니와 파괴력도 원시적인 수준에 불과했다. 다만 그것이 인간 사회와 비슷한 삶의 양상을 보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외양과 흡사한 형태를 띠고 있다는 점이 특기할 만했다. 헌팅 네트워크로 검색해본 결과 초보적인 수준의 의태가 가능하다고 되어 있었으니 이들은 일전에 게이트에 들어왔던 헌터들을 데이터 삼아 변신한 것이 틀림없었다.
관찰 중에 연구자가 발각되어 이러한 문제가 생겼으며, 만에 하나 이들이 바깥으로 나오게 되면 큰 혼란을 빚을 것이므로 처리하라, 그것이 의뢰의 개요였다. 발주자는 자신이 모르는 길드인 듯했다. 인간이란 어설프게 닮은 것에는 혐오를 느낀다. 그렇다면 완벽하게 닮은 것에는 공포를 느끼게 되어 있는 것일까. 웨이는 눈앞에 펼쳐진 생명체들의 군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제 어떻게 할까? 라는 듯이 라임에게 시선을 두었다.
소탕 의뢰의 대상이기도 한, 슬라임의 아종으로 추정되는 이 게이트 안의 생명체는 분명히 인간을 닮아있었다. 무표정한 듯하면서도 희미하게 미소를 띠고 있는 얼굴, 뭉툭하게 튀어나온 가슴과 유려한 곡선을 그린 허리, 그리고 두 팔과 두 다리. 무릎 아래로는 촛농이 녹아내린 초처럼 모호한 형태를 하여 바닥을 기고 있으며, 전신은 미끈하고 반투명한 점액질로 이루어져 마치 밀랍으로 빚은 인형이 바닥부터 열을 받아 발끝부터 녹아가면 그런 모습이지 않을까 상상하게 된다.
그들은 웨이와 라임을 경계하며 보통의 인간이 뛰는 것보다 느린 속도로 온몸을 부딪쳐왔다. 그들의 공격은 터지지 않는 물풍선으로 힘껏 후려치는 것처럼 웨이와 라임에게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으나, 웨이의 주먹과 라임의 화살 또한 그들에게 유의미한 피해를 줄 수 없었다. 처음에는 말이다.
라임의 화살은 잔잔한 호수에 쏘아낸 것처럼 그들의 몸체를 그대로 뚫고 지나쳤고, 웨이의 주먹에 맞아 찰박거리며 흐트러진 살결은 곧 빠르게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러나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인형(人形)의 아랫배. 그러니까, 인간의 창자 부근에 자리한 조약돌만 한 핵을 부수면 재생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우쳤고, 이후에는 어렵지 않게 슬라임의 모체가 있는 군락에 다다를 수 있었다.
웨이와 라임은 나지막한 언덕에서 커다란 호수를 끼고 있는 그들의 군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군데군데 넷, 다섯 정도의 개체들이 모여있었고, 저 멀리 보이는 무리의 중심에는 다른 개체보다 몸집이 크고, 보다 형태가 모호한 특이 개체가 하나 있었다. 많은 수의 일반 개체들이 그것을 지키듯 둘러싸고 있는 그것이 그들의 모체임이 분명했다.
위기감 없는 일방적인 사냥에 점점 불쾌감이 차오를 때쯤, 라임은, 이제 어떻게 하냐는 듯한 웨이의 시선에 쉬이 대꾸할 수가 없었다. 데구르르, 라임의 시선이 옆으로 굴러간다. 어느새 기척 없이 그녀들의 코앞까지 다가온 슬라임 개체를 발견한 그녀는, 조심성 없이 그것을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그것은 웨이와 라임에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았고, 일방적인 사냥에 마음이 지쳐 있었기 때문이다.
"웨이, 뒤."
마치 등에 벌레가 붙었다고 알려주는 것처럼 귀찮아하는 태도였다. 그러나, 웨이가 행동을 취하기 전, 그 슬라임은 다른 개체들이 그랬던 것처럼 온몸을 부딪쳐오는 대신 가만히 손을 뻗어왔다. 마치 그리운 사람을 붙잡으려는 것처럼 말이다. 그것은 눈도 깜빡이지 않았고 입도 벙긋거리지 않았다. 말없이 소리 없이 가만히 가만히 손을 뻗고만 있었다. 순간, 눈동자 없는 그것과 눈이 마주친 것도 같았다.
꿀렁.
라임이 그것을 바라보고만 있는 동안, 그것의 모습은 일렁였고 뒤틀렸다. 아주 잠깐 동안이었다. 그것은 인간의 모습을 원시적으로 모방하던 껍데기를 한층 벗어내고, 조금 더 인간에 가까운 모습으로 변화했다. 그것은 웨이의 눈에 그토록 찾아 헤매던 제 오빠를 닮아 보이기도 했고, 라임의 눈에 너무나 그리운 아저씨를 닮아 보이기도 했다. 알 수 없는 불쾌감은 더욱 치솟았고, 순간의 착각이었으나, 의아하게도 라임은 그것에게서 그리움과 안타까움을 느끼고 마는 것이다.
그렇게 웃으며 다리를 내뻗었지만, 마치 각성하기 이전의 그가 바위나 전봇대를 세게 걷어찼을 때처럼 단단한 느낌에 강산의 표정이 순간 바뀌었다.
"...!"
강산이 순간적으로 당황하는 그 짧은 순간 명진은 강산의 공격을 받아 흘리고 상대의 다리를 잡았다. 강산의 몸이 휘청인다. 그러나 거기서 포기할 그가 아니었다. 그의 손에는 아직 스태프가 들려 있었다. 한 순간 바람이 일었다. 짧게나마 겨울 바람처럼 차갑고 거센 바람이었다. 얼굴을 밀어낼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시야를 잠깐이나마 흐릴 순 있겠지. 머리카락이 헝클어질지도 모른다.
그렇게 명진의 얼굴에 마도로 일으킨 바람을 쏘아버리고 강산은 잽싸게 몸을 뺀다.
"야, 방금 뭐냐. 방어구 쩌는 거 장만하기라도 했냐?"
아니면 기술인가? 뭔지 모르겠지만 그런 게 있다면...
"좀 안심하고 세게 가도 되지?"
그렇게 말하는 강산의 손가락이 성냥을 긋듯 스태프를 훑자, 의념의 불길이 그 끝에 피어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