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쉬움에 호수로 손을 뻗는 그녀의 앞으로 빠르게 무언가 지나갔다. 손끝을 짜릿하게 스치며 지나간 그것은 호수 아래로 가라앉는가 싶더니, 이내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며 호수의 물과 생물들을 날려버렸다. 방금 전까지 첨벙거리며 놀던 호수는 그렇게 그녀의 눈앞에서 사라져버렸다. 약간의 흔적만 남기고.
후두둑 떨어지는 호수물에 젖은 건 그녀도 예외가 아니었다. 폭발을 따라 치켜들었던 고개 탓에, 위를 향한 얼굴로 차가운 물이 인정사정 없이 쏟아진다. 얼굴만이 아니라, 바닥에 늘어진 머리카락과 주저앉은 몸도 물에 담근 것 마냥 적셔버렸다. 오늘도 역시나 노출이 많은 옷차림이라 물이 제법 스며들었을텐데 찝찝하지도 않은지 가만히 앉아있기만 한 모습이 누가 거기 놓아둔 인형 같다.
물이 맺혀 무거운 눈커풀을 내리 깔고 비어버린 호수를 보던 그녀는 티르가 제 앞으로 와 고함을 질러대서야 다시 시선을 주었다. 숙였던 고개를 들자 머리카락에서 흐른 물이 볼과 턱을 타고 흘러 그 아래로 뚜욱 뚝 떨어지는게 선명히 보인다. 젖은 걸 빼면 전과 다를 바 없이 멍한 눈으로 티르를 보는데, 그 순간만큼은 오싹하리만치 아무런 생각도 그에게 전해지지 않는다. 그렇게 그를 보다가, 시선을 내려 그의 발밑에 짓이겨 죽은 물고기를 보고, 재차 고개를 들어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끊어줄게..."
그가 말한 건 그런게 아닌데, 그녀는 그냥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다시 내렸다. 멍한 눈으로 티르 너머의 풍경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 얼마간을 석상마냥 가만히 있다가 느릿느릿 손을 움직이며 전과 비슷하지만 다른 주문을 읊는다. 그러자 그녀의 손에 가느다란 실 같은 것이 한가닥 엉겨드는데, 그것의 양 끝은 각각 그녀와 티르의 머리에 이어져 있었다. 그 실을 본 티르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저것이 지난번에 건 마법이자 텔레파시의 원흉이며 저걸 끊으면 마법도 끊길 거라는 걸.
"끊으면, 안 들리겠지..."
그 직감이 맞다는 듯, 그녀는 다시금 중얼거리며 끈이 감긴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실이 팽팽히 당겨져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만 같았다.
인형같은 모습의 시안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이 너무 심한 짓을 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의 모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시안 역시 흠뻑 젖은 모습이었고,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호수가 있던 자리를 가만히 보고 있었으니까. 머리가 조금 식은 뒤 이성이 돌아온 상태에서 어떤 말을 꺼낼지 고민하다가, 이내 저도 모르게 멍청한 표정을 지어보인다.
"...뭐?"
이어진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잘못 들은건가 싶어 생각을 읽어보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번엔 전달되는 생각은 없었다. 무슨 짓을 할지 몰라 티르는 시안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에서, 팔로, 손 끝으로 이어진 시선은 어떤 실 같은 것을 붙잡는 그녀의 모습을 봤다. 그는 당황하였는지 급하게 억센 손길로 시안의 손목을 붙잡았다. 실이 끊어지지 않도록, 자신의 쪽으로 살짝 당기면서.
"무슨 짓이냐 이게."
다시 한번 시안을 노려보았다. 그 실은 그녀와 자신을 잇는 텔레파시 마법의 근원이었다. 다시 말해, 저것이 끊어지면 텔레파시 마법도 끊어진다. 그리고 그것은 티르가 원한 것도, 의도한 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경고만 하려고 한 것이었으니.
"난 끊으라고 말하지 않았다. 연결해두되, 그런 의미없는 생각들을 보내는 것을 그만두라고 했지."
티르는 시안의 손을 붙잡고는, 그녀의 멍한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글거리는 황금빛 눈이 공허한 바닷빛 눈을 깊게 들여다보았다. 어째서인지 저 너머에서는 더이상 생각이 들리지도 않았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을 수도 없는 눈이었다. 말 그대로 공허한 감정. 그렇기에 티르는 그녀가 어떤 의도로 이런 짓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어떤 의도였든 간에, 그는 이 연결이 끊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렇기에 막는 거기도 했지만.
"끊지 마라. 이것 역시 경고다."
으름장을 놓으며 붙잡은 손에서 힘을 조금씩 뺐다. 시안이 줄을 끊으려고 했다면 그대로 손에 힘이 들어가 막았겠지만.
티르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지 않았다면 그 손아쉬에 쥐인 실은 그대로 허물어졌을 터였다. 그리 하면 더이상 그녀의 생각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을텐데, 어째서인가 그는 그녀의 행동을 막았다. 자신이 말한 건 이런게 아니라면서. 또다시 경고라는 말에 그녀는 실을 거두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언제든 끊어버릴 것처럼.
"...너도, 어지간히 제멋대로구나.."
둘의 의식을 잇는 실을 쥔 그녀가 중얼거렸다. 그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보고 있었겠지만 그녀는 티르와 시선을 맞추지 않았다. 그 푸른 눈의 시선은 제 손에 쥔 실에 향해 있었다. 티르가 손목을 잡은 덕에 느슨해졌지만 완전히 거두지 않은 이상 언제 다시 끊으려 할 지 모르는 상황이다. 그것을 노렸는지, 아니면 그저 거두는 것을 잊었는지, 의도도 생각도 알 수 없는 그녀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이 마법은, 본래.. 이런 용도가.. 아니야... 일방적으로, 내보내기 위한... 그런 마법..."
그녀가 잠들기 전, 한참 세상을 뒤숭숭하게 만들고 다닐 적 얘기다. 당시의 그녀는 제 안에 쌓인 감정을 주체하지 못 해 무차별적으로 마법을 써 답답함을 해소하려 했다. 단순히 마나를 쓰는 것도 도움은 됐지만 머릿속에 담긴 것들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고심 끝에 그녀는 자신의 의식을 불특정 다수에게 연결시켜 그리로 쏟아내는 방법을 익혔다.
본디 그런 건 일방적일수록 효과가 좋은 법이다. 그 탓에 다수의 희생이 일어나더라도.
"....그걸 응용한거라, 저절로, 흘러.. 들어가는 건... 어쩔 수 없어..."
느릿하게 얘기하던 중 그녀의 눈이 한번 움직여 티르를 본다. 힐끔, 하고 지나가는 시선에 역시 담겨있는 건 없다. 그녀는 실을 쥔 손의 손끝으로 희미하게 빛나는 실을 슬슬 문지르며, 맹함보다는 가라앉았다는 느낌의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내가.. 투기장에 다시 찾아갈 때... 그 때를 위해서, 이게.. 필요하다고 했었지... 그래서, 끊는게 안 되는 거면... 안 갈게. 투기장... 그럼 되잖아..?"
그녀는 너무 쉽게 말해버렸다. 가지 않겠다고. 그의 투기장에. 이 마법의 용도가 그것을 위해서라고 그가 말했으니, 용도가 없어지면 끊어도 되지 않겠느냐고 말하며 실을 거둘 생각을 보이지 않았다. 되려 손목을 놓으라는 듯 제 팔을 당겨 빼내려고도 했다.
산다는 것은 언제나 종점을 향한다는 것이다. 죽음을 향해 모두가 나아가는 것이 인생이라고- 길거리의 시인은 그랬었지. 이 곳에 온 후로 깨달은 것은 화장실이 귀찮다는 것, 내 키는 굉장히 찔끔씩 자란다는 것, 그리고 나이가 27세인데도 불구하고 성인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밤하늘이 아름답다는 것. 살아있었을 때는 보지 못했던 무수히 많은 별이 수놓은 하늘.
"..좀 더 일찍 알았으면 좋았을까"
덤덤히 그런 말을 무심코 내뱉고 만다. 구세라고는 없고 책임감만으로 살아가던 나는 이 곳에 와서 책임질 것도 없으니 '놀기'로 했다. 모든 것은 당신이 바라는대로- 이 곳에 깨어나기 전 우연히 들은 목소리에 따라서. 처음엔 이름조차 없던 나였기에 이 곳에서 이름을 얻고, 떠돌고, 하루 살고 하루 벌고, 웃고 떠블고, 가끔씩은 울고, 가끔씩은 놔두고 와버린 이들을 걱정하고. 그런 삶을 몰랐던 나이기에, 이 곳의 모든 삶은 '즐겁다'. 인형이 감정을 얻으면 그런 기분이 들까. 하루하루 톱니바퀴에 불과하던 내가 이제는 세상을 자유롭게 떠들며, 자유롭게 살아가는 몸이 될 줄은 몰랐지. 이름조차 앖던 내가 신님에게 이름을 받고, 기회가 없던 교육을 받으며, 교육이 끝나고 떠돌다가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서 밤에 이렇게 드러누워 밤하늘을 보게 될 줄은..
"전생..이라고 했던가"
호령이라고 한 이가 말했던 말. '다른 세계에서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라...
"뭐..좋나요"
이 곳에선 내게 비극을 일으킬 시스템도 사회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번에야 말로 자유롭게 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