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이 파인 검정색 드레스를 입은 설화는 능청스레 옆머리를 쓸어넘기며 갑판으로 나와 벽에 기대선 바다를 바라보며 중얼거린다. 잠복하는데에 가장 좋은 방법, 그것은 역시 자연스럽게 탑승객처럼 행동하면 될 일이었다. 본인 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설화는 꽤나 핏이 받쳐주는 편이었으니 노는 것을 좋아하는 승객이 되기로 했다. 절대 술이 있다고 해서 이쪽이 끌린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그렇다.
" 지하라고 그랬지. 아무래도 그쪽으로 가야겠네. 바람 쐬는 것도 질렸고. "
태평하게, 세상물정 모르는 부잣집 아가씨 흉내를 내며 또각거리는 구두소리와 함께 지하로 향하는 사람들에 섞여 나아가기 시작한다. 그런 와중에도 한쪽 팔에 맨 고급스런 핸드백에서 거울이 달린 화장품을 꺼내 화장을 손보는 척 하며 주변을 둘러보는 것을 잊지 않는 설화였다.
지하 4층으로 내려가면 정말로 호화로운 음식들이 테이블에 가득 차려진 것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내려가면서 벽을 체크했다면 배의 단면도를 볼 수 있었을텐데 아무래도 엔진이나 주요 기기들은 모두 지하 3층 복도 맨 오른쪽 끝에 있는 문에 담겨있는 모양이었다. 그 이외에는 왼쪽 계단, 중앙 계단, 오른쪽 계단. 총 3개의 계단 라인으로 갑판에서 지하 4층까지 이어져있는 모양이었고 엘리베이터는 따로 없었다. 지하 1층에서 지하 3층은 탑승한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는 객실이 있었으며 지하 1층 제일 안쪽에는 가볍게 놀 수 있는 오락시설들이 모여있는 오락실, 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스포츠실이 있었으며 지하 2층 제일 안쪽에는 식당과 매점이 있었다.
아무튼 지하 4층에는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조금 질이 안 좋아보이는 불량배 느낌의 20대 남성이 있는가 하면, 하얀 백의를 입고 있는 여성, 그리고 이 배의 선장인 올해 54세 사내인 민광호를 포함해 여러 승무원들이 있었다. 허나 모든 이들이 있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근무를 서는 이들은 분명하게 있었고 교대 식으로 돌아가는 모양이었다.
선장인 광호는 근처에 있는 무대로 올라간 후, 마이크를 잡고 승객들에게 인사를 올렸다.
"모두들 안녕하십니까! 저희 블루네이쳐호는 2시간 후, 시범출항을 마치고 다시 청해시에 있는 청해항으로 돌아갈 예정입니다. 이미 밤 늦은 시간인만큼 오늘은 신나게 놀고 객실에 들어가서 푹 주시면 청해항에 도착해 있을테니 편안하게 주무시길 바라겠습니다. 그리고 이 블루네이쳐호를 연구하고 만드신 담당자 분의 말씀도 들어보겠습니다."
광호의 목소리가 끝나자 백의를 입고 있는 여성.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그 여성이 선장이 있는 곳으로 이동한 후, 마이크를 잡았다.
"안녕하십니까? 친환경문물 연구소에서 근무하고 있는 신나영 박사입니다. 이 블루 네이쳐 호에 탑승하고 있는 모든 분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겠습니다. 이 블루네이쳐 호는 세계 최초로..."
간단하게 세계 최초로 만들어진 정말로 환경에 아무런 악영향도 주지 않는 친환경 문물이라고 하며 그 원리를 설명하는 복잡한 말들이 이어졌다. 그것에 집중하는 이들은 그다지 없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적어도 지금까진 크게 수상한 행동을 보이는 이는 없었다.
이내 긴 설명이 끝이 나자 나영은 아래로 내려왔고 이어 신나게 먹고 놀자는 분위기가 이어졌고 신나는 음악이 재생되었다. 춤을 추는 이들도 있었고, 그냥 가볍게 앉아서 식사를 하는 이들도 있었다. 일단 아직까진 어떻게 행동하는지는 자유로워보였다.
망설임 없이 시끌벅적 파티를 즐기는 사람 사이에 스며든 설화는 와인잔 하나를 들곤 음미를 하듯 입에 머금으며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여보인다. 살짝 홍조를 띈 것이 술이 들어가긴 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 했고, 그런 설화에게 이따금 남자들이 말을 걸어왔지만 도도하게 고개를 저어 쫓아내는 설화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래뵈도 설화는 경찰이었으니까, 잠복근무라는 것을 잊지않았기에 와인을 마시는 척 하며 주변을 살필 뿐이었다. 혹시 몰라서 일부러 신나영 박사나 선장이 돌아다니는 곳 근처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 다른 곳도 확인하긴 해야할 것 같은데.. 아무래도 복장 때문에 엔진실 같은 곳으로 가긴 애매하단 말이지.. "
뭐,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긴 하지만. 설화는 그렇게 생각하며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댄 체 생각에 잠긴다. 이래저래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었기에, 언제든 써먹을 수 있는 카드를 만들어둘까 하는 생각을 하며 주변에서 웃고 즐기는 남자들은 눈에 담아둔다.
" 으음, 머리 쓰니까 담배 땡기네. "
핸드백 안의 담배를 생각하며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는 설화는 갑갑함을 달래려는 듯 괜스레 옆머리를 귀 뒤로 쓸어넘겨본다. 중얼거리면서도 여전히 오늘 행사에서 중요해보이는 인물들은 눈에서 빼놓지 않은 체로.
선장인 광호의 일정 안내, 그리고 백의를 입고 있는 박사의 어렵고 아무도 관심없는 과학 이야기가 끝나고 계속해서 파티가 이어져갔다. 춤꾼과 식사꾼이 한데 어울려 있는 이곳에서 화연은 작업꾼에 가까웠다. 파티 참가자라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어울리며 대화를 한다. 젊은 벤처기업 사장을 연기하며 다른 이들의 정보를 캐내었다. 미리 승객들의 정보들을 공부한 다음 실제 인물과 대화하며 잘못되거나 어색한 부분, 이상한 부분은 없는 지 관찰한다. 물론 모든 승객들의 정보들을 다 외우진 못했지만 기억나는 몇명과 이야기하며 정보를 쌓아간다.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가운데 시간은 천천히 흘러갔다. 처음보다는 사람들이 어느 정도 빠져나간 것을 그들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불량배 느낌의 사내도, 어린아이와 같이 온 것으로 보이는 부부도, 정말로 돈이 많은지 양손에 반지를 잔뜩 끼고 있는 여성도, 그 외에 헌팅을 하고 있던 남성도. 어느 정도 빠져나간 상황 속에서 나영은 전화를 받았다. 이내 주변을 둘러보는 듯 하더니, 계단을 통해 윗층으로 올라갔다. 통화를 계속 이어나가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와 다른 곳에서 통화를 하려는 모양이었다.
한편 선장 역시 시계를 보더니 교대를 해야겠다고 이야기하며 윗층으로 천천히 올라갔다. 그 외 다른 사람들도 점점 빠져나가는 분위기였고 그 와중에 방송 소리가 이내 또 들려왔다.
-내빈 여러분들에게 알려드립니다. 지금부터 10분 후 불꽃놀이가...
[피융. 팡!!]
-어. 뭐야? 불꽃 누가 쐈어?
이내 방송 기기를 통해 불꽃이 한 발 발사되는 소리가 들렸다. 작은 트러블이었을지도 모르나 그 당황하는 목소리를 그대로 방송으로 낸 것은 명백한 방송 사고였다. 누군가는 혼란을 느낄지도 모르고 누군가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느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허나...
그 순간 배의 진동이 멈추며 창밖의 풍경 역시 멈추는 것을 그들은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기분 탓이었을까? 지하 4층 창문으로 보이는 풍경이 점점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천장의 붉은색 비상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비상! 비상! 비상! 바닷물이 올라오지 않도록 잠금 장치를 발동합니다!
그리고 지하 4층에서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정확히는 4층과 3층과 중앙 부분에서 강화철판이 튀어나와 길을 가로막았다. 말 그대로 지하 4층에서 3층으로 올라가는 길이 모두 막혀버린 상황이었다.
갑작스런 사태를 마주 한 설화의 입에서 나온 것은 곤란함이 가득한 말이었다. 강화철판으로 막혀버린 것을 확인한 설화는 곤란한 듯 벅벅 머리를 긁으며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일단 일이 터진 만큼 제대로 움직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듯 신고 있던 구두를 아무렇게나 내팽개쳐 맨발이 된 설화는 움직이기 거추장스런 드레스를 쫙 찢어올려 움직임에 불편함이 없게 만든다. 나름 아끼는 옷 중 하나 였기에 아쉽단 생각도 잠시, 밑에 남은 사람들을 살피기 시작한다.
" 분명 여기에 이 빌어먹을 사태랑 관련된 인간이 있을거란 말이지. 그냥 가둬두는 것으론 효과가 적을테니까. "
... 일단 저 강화철판은 누가 처리 좀 해줬으면 좋겠는데, 내 능력이랑은 상성이 안 좋단 말이지. 손톱을 잘근 깨문 설화는 일단 사람들부터 진정을 시켜야겠다 생각하며 서둘러 마이크를 향해 달려간다.
"저..저어기... 휴대폰이 있으신 분은 얼른 신고해주시고 나머지는 모여있는게 아무래도 좋지 않을까요~? 여러분...! "
당황하고 겁먹은 여자를 연기하면서, 울먹이는 목소리로 허둥지둥 하는 사람들에게 말을 던지는 설화였다. 역시나 담배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런 와중에도 인파 속의 사람들을 하나하나 예의주시 하는 설화였다. 분명 숨어있을 가능성이 있었으니까.
시간이 제법 지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 위해 또는 다른 곳에서 놀기 위해 연회장에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10분 후 불꽃 놀이를 시작한다는 말이 나온 것을 보아 아마 대부분 갑판에 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펑 하는 불꽃 터지는 소리와 당황하는 소리가 방송으로 울려퍼졌다. 화연은 피식 웃으며 첫 출발부터 망했구나 생각했다.
그 순간 배의 진동이 멈추며 창밖의 풍경 역시 멈췄다. 그리고 지하 4층 창문으로 보이는 풍경이 점점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침몰이었다.
"아...망할..."
지하 4층에서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막혔다. 아직 일부 사람이 4층을 빠져나가지 못했을 것이다. 화연은 방화문처럼 이 강화 철판에 미처 나가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문이 있을 것이라 추측했다.
갑작스런 사태에 사람들은 혼란에 빠져있었으나 설화의 마이크 발언 덕인지 일부 사람들은 핸드폰을 꺼내서 통화를 시도하려고 했다. 허나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익스레이버 위그드라실 멤버들도 핸드폰을 확인하면 알 수 있었겠지만, 통화가 불가능한 지역인지 안테나가 완전히 꺼져 있었다. 아무래도 바다 한가운데로 나간 탓일까? 적어도 신고를 하는 것은 아무래도 핸드폰으로는 불가능한 모양이었다.
"저, 저거 뭐야?!"
그 순간이었다. 한 여성이 바닥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건 절대 기분 탓이 아니었다. 바닥을 통해 바닷물이 조금씩 올라오고 있었다. 창밖의 풍경 역시 점점 더 위로 올라가고 있었고 이내 들려오는 방송은 현 상황을 정확하게 짚고 넘어가고 있었다.
-승객 여러분!! 절대 당황하지 마십시오. 지금 블루 네이쳐 호는 아래로 가라앉고 있습니다. 지금 최대한 빨리 저희 승무원들이 철판의 잠금장치를 풀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으니 당황하지 마시고... 일단 지하 4층에 있는 여러분들도 안내에 따라 ㅂ...
허나 방송이 무슨 소용일까? 당장 바닷물이 조금씩 차오르는 모습은 사람들을 패닉 상태에 빠지게 하기 충분했다. 사람들은 일제히 빠져나가겠다는 듯, 계단 쪽으로 달려나갔고 위로 올라가는 통로를 차단한 강화 철판을 있는 힘껏 두들기기 시작했다.
"열어! 빨리 열란 말이야! 이거! 안 열어?!" "살려줘요!! 제발 이거 열어줘요!!"
화연은 문을 찾아보려고 했으나 위로 올라가는 문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오로지 철판으로 막혀있는 계단만이 유일하게 올라갈 수 있는 길이었다.
허나 화연은 여기저기를 돌아보다 갑판 위, 선장실과 조종실로 연결이 되는 수화기를 각각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걸 이용하면 갑판의 조종실 혹은 선장실과 연결이 가능한 모양이었다.
그 와중에도 물은 천천히 차오르고 있었다. 아직은 괜찮을지도 모르나 차오르는 속도가 그렇게 느린 것은 아니었고 점점 빨라지는 것을 계산하면...그렇게 오래 버티지는 못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한편 설화는 벽면에서 번호를 입력하는 전자장치를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가까이 가서 확인했다면 총 6자리를 입력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화연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안 그래도 물이 올라오는 판국에 불꽃까지 보이니 사람들은 더더욱 강한 패닉 상태에 빠졌고 도저히 통제가 불가능한 지경에 도달하고 말았다. 나름 좋은 시도였으나 패닉에 빠진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좋은 효과는 아닌 모양이었다. 애초에 그게 어디서 나온 불인지도 전혀 파악이 힘들 정도로 사람들은 강한 패닉에 빠져있었다.
그렇기에 설화의 목소리도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닿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도 몇몇 겨우 정신을 차린 이들이 찾아보려는 듯 움직이는 듯 했으나 화연이 가지고 있는 수화기 이외에는 크게 보이는 것이 없었다.
방송으로 뭔가 이야기가 계속 나오는 것 같았으나 패닉 상태에서는 그게 전달이 되지 않았다.
한편 화연은 선장실로 전화를 시도하는 것 같았으나 선장실에서 받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래도 여기엔 지금 사람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선장은 지금 선장실에 없다는 이야기일까?
점점 물은 차오르고 있었고 어느새 발목 부분이 차가워지는 것을 그들은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패닉에 빠진 것은 좋지 못한 징후였다. 이대로라면 잘 풀일 일도 제대로 풀리지 않게 된다. 그러면 곤란하다. 일단 사람들을 진정시키는게 먼저다. 곤란해. 설화는 머리를 쓸어넘기며 생각에 잠긴다. 아직 물이 다 차오르려면 시간은 남았고, 분명 위랑 연락이 가능한 방법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번호를 입력하면 철제벽을 해제시킬 수 있다. 그렇다면.. 잠시지만 악역이 되면 된다.
" 다!!!! 조용히!!! 해!!!! "
설화는 이를 이용해 손가락들을 물어 뜯고는 피를 뚝뚝 흘리며 크게 외친다. 그리곤 두둥실 피가 떠올라 굵은 창들로 변해선 벽을 두드리는 사람들과 벽 사이로 내리꽂아진다. 아슬아슬하기 닿지 않는 곳에 피의 창을 꽂아버린 설화는 마이크를 들곤 악역처럼 사악한 미소를 지어보인다.
" 지금부터 입 다물고 가만히 안 있으면 큰일난다! 알았어? 앙?! "
이런거 질색인데.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이 인파 속에 숨어있을 동료를 믿으며 악역에 충실하기로 한다.
아비규환 속에서 동료들은 저마다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힘쓰고 있었다. 그렇다면 자신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가. 고민하다 인파와 발목까지 고인 물을 거슬러 물이 밀려오는 곳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정확히 어디쯤에서 밀려오는지 알 수 있다면 그곳을 막아 조금이나마 시간을 벌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지하 4층 외벽에 제대로 손상이 간 거라면 수압으로 인해 지금보다는 훨씬 빠르게 물이 차올랐으리라. 손상은 분명 다른 곳에 있었다. 고로 제대로 막기만 한다면 대피할 때까지 얼마간의 여유가 생긴다. 그 사이에 철판을 없애 주면 더욱 고마운 일이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