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회복은 너무나도 방대한 마나에 의한 것이지 그녀가 의식해서 한 건 아니었다. 그러니 티르가 마법인가, 하고 중얼거려도 별다른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이번에도 역시나 눈을 깜빡이며 붉은 입술을 한번 달싹이기만 했다. 이쯤 되면 일부러 말을 안 하는가 싶기도 하다.
얼굴을 아주 살짝 돌리기만 해도, 시선을 아주 조금 움직이기만 해도 매번 다른 빛을 내는 푸른 눈을 마주했을 때, 어쩌면 티르라면 보였을지도 모른다. 잠잠한 눈빛 너머에 어렴풋이 비춰지는 메마른 황야의 풍경 혹은 그 가운데를 도려낸 듯 존재하는 공허를.
모든 것을 불살라 허무 밖에 남지 않은 존재를.
"...그 땐, 싫다고 해도, 공격했으면서.."
거절은 거절한다, 라며 무대포로 주먹을 때려박을 때는 언제고 이제는 그걸 들어주는지. 티르를 응시하는 그녀의 눈에 이채가 감돈다. 옅은 미소에 잠시나마 빛이 깃들 듯이. 그 뒤 그녀가 여기가 그 투기장이냐고 물으니 티르는 보기와 다르게 친절하게 그렇다고 얘기해주었으나 그 말투가 금방 바뀌었다. 이번에도 그녀 때문이다.
이제는 귀찮다고 내칠 법도 한데 그는 투덜대면서도 그녀의 불만을 받아준다. 편히 자리를 잡을 수 있게끔 해주기에 그녀는 사양하지 않고 티르의 다리 위에 걸터앉았다. 앉을 곳도 등을 기댈 곳도 있으니 한결 편해졌는지 몸의 긴장을 슥 풀며 작게 숨을 내쉰다. 언제 공격하거나 내칠지 모르는 상대를 두고 어떻게 이리 무방비해 질 수 있는걸까. 그런 건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 힘을 풀어 늘어뜨린 팔다리가 유독 희게 보였을지도.
"...나...잡혀온 거였어...?"
자리 잡기도 끝났겠다, 대화를 좀 해볼까 했더니 시작부터 복장 터지는 소리가 나온다. 저도 몰랐다는 듯 티르를 빤히 바라보며 되묻는 말이 그랬으니 말이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그래도 이번엔 마냥 답답하게 두진 않을건지 그녀 나름 고심하는 모습을 보였다.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고 음... 하는 소리를 잠시 흘리더니 아마... 라며 운을 떼었다.
"마지막 기억이... 어느 산길을, 걷고 있던 건데... 비도 오고 하니까.. 엄청 졸렸단 말야. 걷고 있는데... 그래서, 졸면서 걷는데.. 갑자기 달콤한.. 그런 향이 나고, 눈 앞이 어두워져서, 어... 잠들었어...."
그리고 깨어보니 티르의 집무실이더라, 라는게 그녀의 길고 긴 설명이었다. 달콤한 향이라는 건 아마 마취제였겠지. 거기까지 말하고 그녀는 더 설명이 필요하냐는 시선을 티르에게 향했다.
시아나의 눈을 들여다보고 알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 공허였다. 단순한 공허가 아니다. 티르는 오랜 세월을 살며 많은 경험을 했고, 그렇기에 알 수 있었다. 이것은 평범한 공허가 아니라는 것을. 모든 것을 불사르거나, 혹은 타인에 의해 희생당하여 오직 공허만이 남은 허무한 눈이라는 것을.
이런 눈을 한 놈들은 보통 두가지 부류다. 이미 아무것도 하지 못 하는 폐인이거나-
-그 특유의 공허함으로 '무엇이든지' 해버리는 특히 위험한 부류거나.
"그 때는 너에 대해서 몰랐다. 허나 지금은 너에 대해서 조금은 알고 있지. 그 차이일 뿐이다."
별 거 아니라는 듯 태연히 말한다. 그 때는 일단 인사차 주먹을 건넸을 뿐이다. 허나 지금은 그녀가 자신과 같은 부류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굳이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 하는 것 뿐이었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시안이 자신이 인정하는 '강자'이기 때문이기는 했지만.
긴장을 푼 시안의 몸을 대신 지탱해주며, 티르 역시 작게 숨을 돌린다. 드디어 대화를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에. 하지만 또 이어진 말은 슬슬 티르의 인내심을 시험하고 있었다.
"그대는 정말 내 속을 긁는 것에 타고났다고 볼 수 있겠군..."
저도 몰랐다는 듯 바라보는 표정이 티르의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했지만, 티르는 전생의 자신이 남긴 이성을 최대한 끌어내어 화를 억누른다. 잡혀온지도 모르는 것은 조금 심각했지만... 시아나라면 그럴 수도 있다고 내심 스스로를 납득시키면서.
"결국 네가 부주의해서 그런 것이라는 말이로군. 그렇지 않나? 이 망할 녀석."
달콤한 향이라는 말에 그녀석이 쓰던 마취제를 떠올린다. 그 마취제는 분명 이 투기장에서 나눠주는 물건이었지. 향이 독특해서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 정도의 강자라면 그런 것 따위는 통하지 않을텐데, 시안이 통한 것을 보면... 그냥 그녀가 졸았기 때문이겠지. 갑자기 얄미워져 시안을 째릿 노려보았다.
"그래서, 기왕 투기장에 온 김에 뭔가 해보고 싶은 거라도 있는가? 오랜만에 이곳에 온 '손님'이니 뭐든 시켜줄 의향은 있다만."
>>233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씨 뻘하게 터졌네 ㅋㅋㅋㅋㅋㅋ 입 꼬집으면 도망은 안 가지만 삐질 확률이 갱장히 높다는 것만 말해두지! 딱밤은 걍 째려보고 흥, 하는 정도로 끝나려나. 이그으으 왜 벌써 세시냐.... 빨랑 밀린 숙제해야겠다.. 답레는 다 하고 올릴거니까 슬슬 자라구 티르주~
몰랐으나 알게 되었기 때문에, 태도를 바꿨다. 그 차이라고 티르는 말했다. 그녀에 대해 알고 있다고. 조금은.
"...무엇을..."
나에 대해, 라고 나오려던 말은 끊겼다. 그녀는 언제 중얼거렸냐는 듯 금방 입을 다문다. 금방이라도 흔들릴 것 같던 눈을 깜빡여 가렸다.
일렁임은 언제나 한순간이다.
그녀가 나름대로 생각해 대답을 내어놓은 건 그 이상 파고들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자초지종을 들은 티르는 결국 그녀의 책임이지 않냐며 쓴소리를 짧게 했다. 저를 탓하는 말에 입꼬리가 스윽 내려간다. 말하면서 되짚어보니 꼭 자기 잘못만은 아닌거 같아서 말이다. 그 불만은 기어코 말이 되어 입 밖으로 나왔다.
"그저 걷고 있는 사람을.... 잡아가는게.. 더 잘못이지...."
따지고 보면 그 말이 맞긴 하다. 길 잘 가고 있는 사람을 납치한게 더 잘못이지, 부주의해서 잡힌게 무슨 잘못이란 말인가. 생각할수록 억울한지 그녀의 뚱한 표정은 한동안 유지됐다. 입을 꾹 다물고 티르가 아닌 허공 어딘가로 시선을 돌리고 있었는데. 기왕 온 김에, 라는 말이 그녀의 시선을 다시 티르에게로 되돌렸다. 순도 높은 사파이어 같은 눈동자가 진한 꿀 같은 황금빛 눈과 시선을 맞추었다.
"....뭘, 할 수 있는지... 모르는데.."
이번 대답은 과연 어땠을까. 다시 한번 티르의 속을 긁기에 충분했을까? 아니면 그럴 수도 있지 라고 넘길 만 했을까? 티르의 속내는 몰라도 그녀의 진위는 확실했다. 투기장이 정확히 뭘 하는 곳이고 손님으로서 뭘 할 수 있는지 모른다는 걸.
있는 그대로를 태연하게 말한 그녀는 늘어뜨린 팔을 움직여 다시 한번 티르의 목을 감싼다. 조금은 미지근해진 피부가 부드럽게 스친다. 팔을 따라 몸이 자세를 바꾸어 움직이는 소리, 새로이 닿는 촉감이 있다. 조금의 움직임만으로 티르와 마주보는 자세를 취한 그녀는 멍한 눈을 한 채 얼굴을 스윽 움직여 가까이 하는가 싶더니,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여기, 모르니까... 가르쳐줘. 티르..."
그녀의 말은 하지 말라고 징징대던 것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참 묘한 울림을 주지 않았을까. 여러모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