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은 하늘이 제법 궂은 날이었다. 온종일 우중충하더니, 밤늦게부터 굵은 비가 쏟아졌다. 빗소리 아래 세상은 적막하다. 쥐새끼 하나 나다니지 않는 그런 빗속을 로브 차림의 사람이 한명, 느긋하게 걷고 있었다.
"......"
검은 로브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두르고 빗속을 차박차박 걸어가는 그 사람은 매우 가벼운 차림으로 보인다. 등이 납작하니 달리 가진 것도 없어보이고, 제 몸을 지킬 무기도 보이지 않아 매우 무방비하다. 그럼에도 무슨 배짱으로 이런 빗속을, 산속을 혼자 걷고 있는 건지. 근처에 산적이 있다면 목표물로 노려지기 딱 좋은 상태이지 않은가.
그래. 지금처럼.
멈출 줄 모르고 걷던 로브인의 걸음이 한순간 멈칫, 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길 옆 수풀에서 누군가 튀어나왔다. 이야아! 하는 어설픈 소리와 함께 튀어나온 사람이 로브인의 얼굴 쪽으로 가루 같은 걸 팍 뿌리더니 그 위로 잽싸게 자루를 씌운다. 로브인은 잠시 저항하듯 움직였지만 그대로 푹 쓰러졌다. 쓰러진 로브인은 자루를 씌운 사람에게 주워져(?) 그대로 어디론가 데려가졌다.
자. 이제 시간을 돌려 장소를 바꿔보자. 헬하운드의 어느 투기장 안, 불법적으로 데려온 외부인들을 모아두는 장소로 말이다. 그곳에는 아마 여러 종족과 여러 인물이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자신이 왜 여기 있는지 알 것이고, 누군가는 아무것도 모른 채 내보내달라며 아우성을 치고 있을지도 모른다. 또 누군가는 체념하고 조용히 있었을테고, 또 다른 누군가는...
"...Zz..."
늘어지게 자고 있었다. 입고 있던 로브를 이불 삼아, 그 공간 한구석을 차지하고서, 아주 편안하게. 로브의 틈새로 검고 푸른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그 인물이 누구였는지는 그 투기장 통틀어 단 한명만이 알고 있었지 않을까.
티르는 자신의 집무실에서 서류들을 확인하고 있었다. 일단 자신의 욕구를 위해 존재하는 투기장이긴 하지만, 그래도 일단 돌아가는 모양새라도 나게 만들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많은 일을 해야했다. 지금처럼 최근 들어온 대전 후보들을 정리하고, 서류에 적힌 내용으로 대략적인 강함을 파악해 적절한 상대와 붙여주는 것 또한 그의 일이었다. 이 과정이 없다면 일방적인 학살극이 벌어질 뿐. 물론 그런 걸 가끔 이벤트성으로 하기도 하지만, 사람들이 그런 것을 원해서 투기장에 오는게 아니다. 이것은 긴장감 있는 싸움을 조정하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었다.
- 보스! 새로운 '후보'가 들어왔습니다!
문을 두드리는 것에 티르의 눈매가 좁혀졌다. 자신의 투기장에 들어온지 얼마 안 된 새내기가 내는 소리였다. 보자, 이 날씨라면 노예상이 온 것은 아니었다. 후보라는 호칭이 나왔으니 매수 역시 제외. 도전자... 라고 볼 수도 있었지만, 애초에 그렇다면 내게 직접 보고할 필요는 없었겠지.
납치인가. 왜 저리 호들갑을 떠는지도 알겠군. 티르는 나름의 이유를 추측하고는 문을 열어준다.
"그래, 네가 잡아온 거냐?"
새내기라 불린 남자는 조금 놀란 눈치였지만, 이내 흥분한 듯 티르를 바라보았다.
"네, 지금 막 '대기실'에 가둬놨습니다!"
"수고했다. 포상금은 곧 정산해줄테니 그녀석에 대해서는 할아범에게..."
귀찮다는 듯 새내기를 물리려던 티르는 눈가를 찌푸렸다. 뭔가... 감이 좋지 않다. 이대로 두면 안 될 것 같다고, 감이 자신에게 속삭였다. 티르의 짐승과 같은 감각은 새내기가 할 법한 작은 실수를 알아차리고는 티르에게 경고한 것이다. 티르가 의식하지 못 해도, 경험을 통해 눈치챈 것.
"아니, 내가 직접 확인하지. 안내해라."
물러나려는 남성을 멈춰세우고는, 티르 역시 자신의 집무실에서 나온다. 이런 감이 들 때는 따를 필요가 있었다.
티르의 투기장에는 여러 종류의 '대기실'이 존재했다. 그 중 티르와 대결하고자 찾아온 도전자들, 투기장의 스타들, 티르의 명령으로 매수해온 강자들은 모두 '귀빈실'이라 불리우는 대기실에서 싸움을 기다린다.
그리고 티르가 지금 향한 곳은 조금 다른 종류의 대기실. 바로 납치해오거나 노예상인에게서 사온 전투노예들을 밀어넣은 일종의 '수용소'였다.
"크으.. 여기는 언제나 적응이 안 됩니다."
새내기라 불리는 남자는 코를 틀어막으며 대기실의 문을 열었다. 그 안에는 온갖 악취와 신음이 흘러나오는, 불쾌한 공간이 있었다. 안쪽에 수감된 노예들은 자신의 사슬을 보며 체념했는지 침묵하고 있었다. 납치의 희생자들은 자신의 신과, 가족의 이름을 부르며 흐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악취와 신음, 흐느낌으로 인해 웬만한 용병들도 기피할 만한 공간에서 태연히 자고 있는 누군가가, 티르의 눈에 띄었다.
"저 자인가?"
"네, 넵! 로브를 쓴 놈입니다!"
안쪽의 사람들따윈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 티르의 발걸음은 거침없었다. 몇 번인가 노예와 희생자들을 밟고, 차며 마침내 도착한 구석에는 분명히 자고있는 로브를 쓴 누군가가 보인다. 티르가 로브를 들춰 확인하는 사이, 뒤쪽에선 새내기가 흥분한 듯 떠든다.
"어떻습니까 보스? 이정도면 꽤 상급 아닙니까? 얼굴도 반반하니 노예로 쓰다가 검투사들에게 하사해도 되고, 노예로 팔아도 될 겁니다! 아, 그리고 제 포상금은..."
"닥쳐라."
"네, 넵?"
"투기장을 망하게 할 생각인가? 이런 놈을 납치해오다니. 네가 그 자리에서 뒤지지 않은 것이 용하군. 오히려 처벌을 내리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라."
티르가 쏘아붙이자 남자는 벙찐 듯 입을 꾹 다문다. 오직 혼자만 이유를 알고있는 티르는 로브를 벗기며 얼굴을 확인하고, 이내 눈매를 심하게 좁혔다. 검푸른 머리카락에 창백한 피부, 그리고 화려한 미모. 자신이 아주 잘 알고 있던 '마왕'의 얼굴이었다.
시안이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한바탕 소동이 일어나고 티르의 집무실로 옮겨진 뒤였을 것이다. 그녀의 로브는 어느새 벗겼는지 옆의 옷걸이에 걸려있었고, 대신 고급 실크로 만들어진 배게와 이불이 제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그렇다. 로브 차림으로 빗속을 걷다 어벙한 새내기에게 붙잡혀 온 이는 다름아닌 시아나, 그녀였다. 그녀가 어째서 말단 부하 같은 녀석에게 잡혔는지는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그녀는 순순히 잡혀서 티르 앞에 나타났다. 얼마나 황당하고 어이가 없었을까!
그렇게 나타난 것도 모자라, 투기장 안이 한차례 소란스러울 동안 그녀는 도통 깰 줄을 몰랐다. 로브를 들추던 들어서 옮기던 세상 모든 곳이 제 잠자리인마냥 새근새근 잘도 자고 있었을거다. 잠든 그녀는 보기보다 가볍게 느껴졌을테니 옮기는게 어렵진 않았겠지만. 분명 빗속을 걷고 있었을텐데도 로브나 구두나 어디 하나 젖지 않은 건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소란이 지나가고 제법 한참을 지나서야 그녀의 눈이 느릿하게 뜨였다. 지난 시간이 얼마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어도 더이상 바깥에서 빗소리가 들리지 않는 때임은 분명하다. 상황만 놓고 보자면, 그녀는 마치 비가 그쳤기 때문에 깬 것처럼 보일 법도 했다. 그쳐가는 빗소리를 따르듯 서서히 눈을 뜨고, 아직은 잠에 젖은 눈으로 허공을 한번, 제가 누운 곳을 한번, 티르를 향해 한번, 번갈아 눈을 깜빡인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이불을 끌어올리며 움직였다.
"...흐암.."
작은 하품 소리가 나고, 움직이는 몸을 따라 가지런하던 이불이 이리저리 당겨지며 다소 흐트러진다. 일부는 다리에 걸리기라도 한 듯 팽팽히 당겨지며 윤곽이 어렴풋이 드러나기도 하고. 평소 차림을 생각하면 이렇게 눕고 움직이는게 불편하지 않을까 싶지만, 그녀의 로브를 걷은 이는 알 것이다. 그녀의 로브 속 차림은 아주 최소한의 옷, 거의 잠옷 수준의 탑원피스 하나 뿐이었다는 걸.
"...더 잘래..."
티르에게는 눈길 한번 주고 뒤척거리던 그녀가 지나가듯 흘린 말은 그게 끝이었다.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스윽 눈을 감는 걸 보니 이대로 냅두면 다시 잘 듯 했다. 그럼 다시 깰 때까지 몇시간, 아니, 어쩌면 며칠을 더 기다려야 할지 모를 일이었다. 이미 천년을 잔 전적이 있는 그녀였으니까.
"네가 어쩌다 그런 놈에게 잡혔는진 모르겠다만... 아니, 애초에 네놈에겐 경각심이라는 것도 없는 건가?"
눈을 깜빡이며 하품을 하는 그녀에게, 티르는 미간을 좁히며 잠깐 설교한다. 그가 '설교'라는 것을 한다는 이야기에 조금 놀라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는 전생의 기억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생각보다 상식적인 편에 가까웠다. 전투만 관련되면 맛탱이가 가서 그렇지. 이불 속에서 꾸물거리는 시안의 모습을 보며 조금 짜증을 느꼈는지 점점 티르의 표정이 구겨졌다 새삼 저 상태로 잘도 저렇게 꾸물거린다고 생각하다가, 시안의 복장을 떠올리고는 조금 납득했다. 그건 거의 잠옷 수준이었으니까. 그렇다면 저건 잠옷을 입고 이부자리에 든 느낌인 건가... 새삼 저 차림으로 잘도 다니는군. 그녀의 복장을 다시 한번 상기하며 든 감상이었다.
"...이봐."
더 잘래. 라는 말에 티르의 표정이 완전히 구겨진다. 여기서 더 잔다고? 내가 앞에 있는데? 자존심 이전에 사람이 깨웠으면 적어도 일어나는 것이 예의 아닌가. 슬슬 무시당하는 것도 짜증난다. 티르는 화를 참지 못 하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일어나라 이 굼벵이 자식. 사람을 앞에 두고 잘 생각인가."
티르의 손이 시안의 볼을 향하더니 그녀의 볼을 꼬집고는 쭈욱 당기기 시작한다. 그의 성격을 생각하면 꽤나 관대한 처사였지만, 지금 당장은 싸움보단 시안을 깨우는 것이 먼저였으니까.
티르가 나름대로 참을성 있게 해준 설교는 그녀의 귀에 들어가지도 못 했다. 들었으면 더 잔다고 그러고 있지도 않았, 지는 않을까. 아무튼 들었으면 어떤 식으로든 반응했을텐데, 그게 없으니 그의 설교는 허사가 된 셈이다. 덤으로 그가 점점 짜증이 나는 것도, 기어코 화가 나는 것도 그녀는 전-혀 몰랐다.
다시금 잠들 자세를 하고 눈을 막 감은 그녀를 티르의 손이 깨웠다. 뺨을 꼬집어 잡아당긴 건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희고 말랑말랑한 감촉의 볼살이 티르의 손에 의해 조금 늘어나자, 그녀가 눈썹을 찡그리며 앓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늘어난 뺨 때문에 발음이 좀 새긴 했지만.
"아...아흐아.... 하이아....(아파...하지마...)"
당연한 소리를 하며 으으... 하고 아파하는 소리를 내면서도 감은 눈은 도통 뜰 생각을 않는다. 뜯어버린다는 협박을 들어도 낑낑대기만 할 뿐, 볼을 잡힌 채로 늘어져 있기만 했다. 하지만 곧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느꼈는지 그녀도 움직임을 보였다. 그냥 눈 뜨고 잠 깨면 될 걸...
"히어어...(싫어...)"
전에도 들은 적 있을 싫다는 말과 함께 그녀의 두 팔이 이불 밖으로 나왔다. 실크 이불이 스륵 흘러내리며 드러난 팔은 소매가 없어 매끈하고 창백한 피부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팔을 들어 그에게 저항하려나 싶었겠지만, 예상 외로 그녀의 팔은 마법을 쓰거나 하지 않고 다르게 움직였다. 제 볼을 잡은 티르의 손을 더듬어 팔을 거슬러 올라가 어깨에 걸치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 행동을 막지 않는다면 그녀는 상체를 일으킨 자세로 티르를 붙든 모양새가 되었을거다. 여전히 눈을 감고서 징징대는 소리를 내며, 일으킨 몸만큼 흘러내린 이불이 잔뜩 구겨져 대강 걸쳐진 채로 말이다.
티르는 발음이 새는 모습의 시안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쉰다. 자신은 자신의 의지대로 원하는 것을 행한다. 그것은 보통 힘으로 막지 않는다면 막을 수 없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시안에게는 할 수 없었다. 본능적으로 그녀가 강자라고 느꼈기 때문이었나. 아니면 단지 지금 있는 위치가 투기장이었기 때문이었나.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하여튼 요약하자면, 당장이라도 한대 치고 싶은 욕구를 해소할 수 없었다는 뜻이다.
"네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계속 할 거다. 일어나!!"
감은 눈이 도통 뜰 생각을 않자 티르는 시안의 귓가에 대고 큰 소리를 친다. 어찌나 크게 소리쳤는지 주변의 물건들이 살짝 진동했다. 그럼에도 낑낑거리며 늘어져 있기만 하는 모습에, 티르는 그냥 포기하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을지도 모른다.
"...이제 좀 잠이 깨나?"
볼을 계속 붙들며 시안을 똑바로 노려본다. 움직임을 보이자 이전처럼 꼬집진 않았지만 당기는 것은 계속 하고 있었다. 싫어, 라는 말이 얼핏 들린 것 같지만 그는 철저하게 무시한다. 자신도 무시당했으니, 그녀도 어느정도는 무시당하는 것이 이치에 맞았다. 자신에게 접근하는 팔을 보며 조금 긴장하기도 했지만 어깨에 걸쳤을 뿐 별 행동을 하지 않았기에 티르는 크게 신경쓰지 않았을까.
"잠 깼으면 슬슬 떨어져라. 나눌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징징거리지 좀 마."
그는 툴툴대면서 자신을 붙든 시안의 볼을 저 멀리로 잡아당기는 시늉을 하여 떨어트리려고 시도했다. 이 모양새는 대화하기엔 적합하지 않았으니까. 할 말이 있다는 것은 반쯤 핑계였긴 하지만, 조금 건설적인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그녀를 움직이기 위해서라도 거짓말을 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