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마셔보는 술은 생각보다 강하게 다가왔다. 레오는 갑자기 졸음이 쏟아지는지 느리게 숨을 쉬었고 움직임이 점점 잩아들었다. 그리곤 가만히 자기도 데려가라던가, 자기랑 같이 가자던가 따위의 말을 중얼거렸다. 이 정도도 못해줄까, 라는 그 말이 왜 그리도 편했을까. 레오는 이히히, 하고 기분좋게 웃으면서 얼굴을 부볐다.
" .... "
천천히 눈을 뜨고 몸을 돌리고 고개를 돌렸다. 레오는 가만히 눈을 뜨고 바라보다가 천천히 일어섰다. 연민이나 동정따위의 것들은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다. 누구도 자신을 연민이나 동정심의 눈빛으로 보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더욱 신선하고 거기에 더욱 매달리게 되었는지도 모르지. 천천히 몸을 일으킨 레오는 자세를 바꿔 버니의 허벅지 위에 앉아 가만히 마주보았고, 손을 뻗어 목에 두르고 풀린눈으로 바라보다가 어깨에 머리를 묻고 기댔다.
" 응.. 나랑 같이 있으려고. 계속계속 같이 있어주려고. "
레오는 '좋아' 하고 말하곤 다시 이히히, 하고 웃었다. 목덜미에 머리를 묻은 레오는 그대로 잠시간 부비적 거리다가 다시 얼굴을떼고 또 멍하니 바라보다 이히히, 하고 웃었다. 감정의 기복이 잦아지는 순간이었다. 술기운을 빌려볼까. 레오는 손을 뻗어 입술을 만지작 거리다가 놀리듯이 가볍에 입술을 맞추곤 또 이히히히, 하고 웃어버릴 뿐이었다.
" 나도 데려가... 무서운건 싫으니까... "
그리곤 다시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천천히 숨소리를 늦춰갔다. 밤이 깊었다. 술기운에 져서, 레오는 그렇게 잠들었다.
졸업식 마치고 첼이도 짐 다 정리해서 윤이 손 꼭 잡고 집에 갔겠네. 미리 편지를 보내두었으니 필립과 클로에가 둘을 마중 나와있었을거고, 첼이랑 윤이가 도착하면 반갑게 맞아줬을거야. 집 안에선 기다리던 남매들이 시끌벅적하게 반겨주고, 그 날은 밤늦게까지 이런저런 얘기들을 하다가, 첼이의 졸리단 말에 자러가고... 아직 둘의 방은 준비되지 않았을테니 원래 첼이 방에서 새삼 편하게 잠들었으려나.
>>633 그렇다면 얼마간 고민하다가 새 신분으로 바꾸자고 권했겠네. 이름은 본명인 레이먼드를 써서 해달라고. 새 신분을 얻는데 도움이 필요하다면 첼이네 집안에서 기꺼이 도와줬을거야. 첫째가 데릴사위로 들어간 집안에 서류상 양자로 만든다던가 하는 식으로.
윤이의 존재는 편지로 미리 알렸었으니까 첼이가 따로 소개할 것도 없이 남매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서 이것저것 엄청 질문할 걸 ㅋㅋㅋ 그러다 돌아가면서 한마디씩 하겠지. 첫째는 아직도 윤이의 존재가 못마땅해서 왜 왔냐고 투덜대고, 둘째는 위아래로 스캔 딱 한 다음에 니들 할거 없으면 내 작업실 와서 인간 마네킹이나 하라고 하고, 셋째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면서 흐음~ 니가 그 건방진 빨간머리구나~ 하고 놀림 반 장난 반 하고, 넷째는 멀리서 퀭한 눈으로 빤히 보고만 있고... 윤이가 남매들한테 시달릴 동안 첼이는 부모님한테 앵겨서 어리광 피우느라 정신없고. 우당탕탕 스피델리 집안! 일까나 ㅋㅋㅋ
당신이 희미하게 미소 짓자 심장이 요동친다. 웃음이 만개한다면 어찌 될지 두려우면서도 한편 그 모습을 바라게 된다. 당신이 그에게 웃는 것이 잘 어울린다 했지만 과연 당신만할지 하는 생각을 입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당연한 사실일 뿐더러 작은 설렘을 혼자 끌어안고 두고두고 꺼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당신의 손등을 조심스럽게 토닥인다. 당신이 건장한 사내임에도 앙상한 손에 혹여 닿아 멍이라도 들까 싶다. 그만큼 당신을 아끼고 사랑했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천천히 알게 될 게야. 중과 할미가 이야기 해준 것도, 내가 이야기 한 것도, 나는 모르지만 네가 알고 있는 것도."
맞잡는 손길에 온기가 느껴졌다. 한 때 몸서리 치도록 싫어하던 것이 이제는 없으면 안 될 것이 되었다. 당신의 온기가 없으면 밤을 지새우게 된다. 각시를 처단하기 이전 새근거리며 자는 숨소리를 한참이고 들어야 잠들 수 있었고, 이제 천천히 극복해가며 당신의 온기를 가만히 느껴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이 없는 삶은 이제 꿈도 꿀 수 없게 되었다. 어쩌다 이렇게 말려버렸나 하는 생각도 있지만 나쁜 것이 아니니 깊게 고민할 필요도 없다.
그는 잠시 당신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당신의 단어에서 그간 어떤 사람으로 살았는지 그 편린이 작게 보인다. 그는 당신을 물건처럼 처분할 사람이 아니기에 안타까움을 속으로 삼켜 드러내지 않는다. 대신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내 곁에 있어줘서 고마워."
신뢰를 잃어 방황할뻔 했던 그날도, 그 이후의 지금도. 당신은 한결같이 그의 곁에 있다. 세상이 달라지고 격동한다 하여도 당신은 평생 곁에 있을 것이다. 그는 눈을 내리감는다. 칼 교수의 말이 귓전을 맴돈다. 맹수를 길들였다 하였음을 기억한다. 길들여졌다 한들 인간으로 같이 살아갈 것이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아마 그가 맹세할 적 끼워주었던 가주의 반지가 있을 그 손등에 이마를 댔을 것이다. 그의 이마는 체온이 낮기에 서늘하다. 당신의 온기가 서늘한 피부에 흘러오는 것을 느끼며 그는 눈을 내리감았다.
"나의 신아, 한 순간도 스러져선 안 될 고귀한 생명아, 시체 쫓는 까마귀가 절애하는 자야. 네 떠나지 않는다 맹세하였으니 나도 맹세하마. 너를 떠나지 않을테니, 너를 연모한다. 사랑하며 더없이 아낀단다."
그리고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듯 하며 눈을 휜다. "하여 너에 대해 좀 알고 싶어지니 이 어찌할까?" 하고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양 아이처럼 순수히 웃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