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 군중이 소란스럽네.. 어딜 가든 따라 붙는 환호성은 언제 들어도 좀처럼 질리지 않는다. 가끔은 귀찮게 느껴지지 않느냐고? 그럴 리가. 손짓 한 번이면 흥분한 관중들도 한순간에 나의 포로가 되어 머리를 조아리는걸.
"너무 야만적으로 굴지 마. 신입에게도 나를 바라볼 권리는 있지 않겠어?"
나는 열혈 신자에게 상큼한 미소를 지어 주며 독설을 날린다. 다른 사람이라면 삽시간에 호감도가 떨어졌겠지만 나는 율리안, 타인들에게는 이것조차 업계 포상으로 통하는 모양이지. 봐, 아까 전의 열혈 신자가 '율리안 님이 내게 말을 걸어 주셨어!!'라며 기절했잖아?
오늘 외출의 목적은 가벼운 장보기다. 나가는 건 귀찮으니 아무에게나 집까지 배달하도록 시켜도 괜찮지만 이렇게 사람들에게 칭송받는 기분을 오랜만에 느끼고 싶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아까까지 없었던 여자아이가 전열에 나타난다. 이 인파를 뚫다니 만만치 않은걸? 걸음을 계속하던 내 귀에 여자아이가 하는 말이 들어온다.
"신? 내가?"
신 같은 존재긴 하지. 사람을 고치는 마법도 쓸 수 있고, 나를 숭배하는 자들도 있으니까? 게다가 이 얼굴, 이렇게 빛나는 미모를 보고 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존재가 어디 있겠어?
"고개를 들어라."
나는 한껏 거만한 목소리로 여자아이에게 말했다. 이 정도 찬사야 늘 듣긴 하지만 기분이 좋으니 이 정도 아량을 베풀지 못할 것도 없지.
마리안의 썰... 제일 좋아하는 술은 포도주입니다. 자기답게. 그리고 원래는 가이아교로 내려고 했어요. 시트 중에 '창조신께서는 이 땅을 모든 종족이 살아가며 먹을 빵을 키울 수 있게 풍요롭게 지으셨고, 인간은 그 위에 포도를 심어 술을 담궜다~' 라는 식의 이야기가 들어갔을 예정이었지만... 삭제! 삭제!
재차 거절해도 그녀의 눈빛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이럴 때만 의지가 아주 대쪽 같다. 완강하게 거부하는 그에 맞서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고 서서, 되려 그의 반응이 불만이라는 듯 입술을 비죽 내민다.
"한번 만지게 해주면 뭐어가 덧나나..."
예전 같이 굴지 않고 제대로 물어보고 양해를 구하는 건데. 두번이나 안 된다고 하니 이제 흥미를 넘어 무언가 오기가 생긴다.
"치.."
씩씩대며 싫다고 하는 그의 앞에서 떠날 생각을 않는 그녀. 그가 어떻게 해야 그녀를 쫓아낼 수 있나 궁리하는 것처럼, 그녀도 뭐라고 해야 그가 만지게 해줄까 나름 고민이란 걸 해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 고민을 단박에 제치게 만드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저 요망하게(?) 움직이는 꼬리렷다.
한순간에 꼬리로 정신을 빼앗겨버린 그녀는 왔다 갔다 움직이는 꼬리를 보며 눈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마치 고양이가 점찍은 먹잇감을 쫓아 시선을 움직이는 것처럼... 말 그대로 그렇게 시선을 꽂고 있다가 예고없이 손을 확 뻗어 꼬리를 잡으려 했을 것이다. 늘어진 말투에 비해 놀라울 정도로 빠른 움직임을 보여주었는데, 그가 제때에 반응해서 피했을지는 모르겠다.
천천히 다시 고개를 들었습니다. 무언가 신과 만난다는 실감은 없었으나 그렇게 떠받드는 것을 보니 분명 위대한 분이겠지요. 보석과 같은 눈동자, 하늘의 은혜를 그대로 받은 듯한 머리카락. 분명 어디에 내놓도라도 모든 것을 매료할 수 있을 정도의 외견. 이것을 신이라 하지 않으면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베스터 가문의 마쿠즈라고 합니다. 마왕을 죽이기 위한 고행길에 당신을 뵙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헌데, 당신은..."
인간이 아닌지? 말은 하지 못했습니다. 어쩐지 그 말 자체가 불경하게 느껴지기는 하는 걸 보니 신이 맞는 걸까요? 그렇다면 저는 행운을 거머쥐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무언가 부족합니다. 가이아님의 예배당에서 느꼈던 신성함 보다는 퇴폐와 향락의 기운이 느껴집니다. 분명 모든 것을 홀릴정도로 아름답지만 어쩐지 신이라기엔 뭔가 부족한 것 같습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잘못된 발언인건지 좌중이 조용해지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말이 되지 않는 소리라는 걸까요.
"실례했습니다. 허나 답해주시기 바랍니다. 당신은 진정 신이 맞습니까? 저는 위대하신 어머니 가이아님의 아이로서 신성을 땅에 떨어뜨렸다면 그에 대한 속죄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답해주시겠습니까."
넌 모르는 사람이 갑자기 몸 만지게 해달라면 좋겠냐, 는 악에 받친 소리가 그녀에게 향했을 때, 대답으로 나온 반응은 어쩌면 그를 황당 그 이상이 무언지 알게 해주었을지도 모르겠다.
"응...? 응..."
뭘 그런 걸 묻느냐고 하듯 짧게 응? 하고 곧이어 그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응,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의 행동거지를 보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아보이긴 하다. 지금껏 그런 일은 한번도 없었지만.
아무튼 그로 인해 더욱 거세게 움직이는 꼬리는 그녀의 좋은 먹잇감이 되어버렸다. 잽싸게 움직여 끝내 그 꼬리를 제 손아귀에 쥐는데 성공한 것이다. 맹해보여도 한때 마왕이라 불렸고 지금도 변함없는 존재다. 마음만 먹으면 이런 꼬리잡기로는 끝나지 않을 수도 있는.
"오......"
그녀는 그가 얼굴을 붉히건 말건 소리를 지르건 말건 손에 잡힌 꼬리에 온 신경을 쏟았다. 털결이 부드럽다던가 푹신하지 않아도 그녀의 관심을 끌기엔 충분했다. 그것이 유감인 부분이었다만. 음. 꼬리 주인이 뭐라고 하건 쓰다듬고 만지작거리며 한참 정신이 팔려있는가 싶더니, 그가 밀치려고 시도하자 귀신같이 반응해 샥 피해버린다. 물론 꼬리를 쥔 채로.
"조오금만... 더 만지구..."
그러고 놔줄게, 라는 말은 붙지 않았다. 어서 떼어내지 않으면 한참을 더 이대로 붙잡혀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듯 하다. 그러던가 말던가, 그녀는 다시 꼬리를 만지기 시작했을 것이다. 특히 꼬리 전체를 슥슥 쓰다듬는게 마음에 들었는지 그는 안중에도 없이 그랬을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