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기만자 아닌데. 가볍게 놀리는듯한 말투에 입술을 살짝 내밀고서 삐진척을 해보지만 금방 원래대로 돌아온다. 잡고 있는 손이 너무 좋아서 손가락으로 장난을 치려다가 이어진 그녀의 말에 나는 또 한번 잠깐 말을 잃었다.
" ... 네 그럴께요. "
유진아 이거 맞아? 맞냐? 진짜 맞는거야? 하는 물음이 깊숙한 곳에서부터 스르르 올라왔지만 지금의 나는 그 물음에 답을 해줄 수 없다. 일단 알겠다곤 말은 했지만 ... 나중에 그게 정말 이루어질지는 제쳐둔다. 그렇게 잠에 빠져버린 나는 영화가 상영되는 내내 연우씨의 어깨에 기대서 사람들 비명소리에도 불구하고 깰 생각없이 엔딩 크레딧이 올라올때까지 쭉 잠들어있었다.
" ... 저 잤나요? 정말 잤어요? "
그리고 사람들이 영화관을 빠져나가는 기색이 느껴지자 마법과도 같이 눈이 떠진다. 피곤할때의 쪽잠이 그렇게 상쾌하다던데 영화관에서 잔 것임에도 불구하고 간만에 상쾌한 잠을 잔 것 같다. 하지만 ... 연우씨 어깨에 기대서 잤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또 금방이었다.
" ... 저때문에 죄송하네요. 불편하셨을텐데 ... "
그래도 잡은 손은 그대로라 거의 다 남아버린 음료수와 나초를 들고서 자리에서 일어난다. 뭐 한 것도 없고 고작 자고 일어난 것뿐인데 허기가 지는 것이 딱 저녁시간인 것 같다.
" 영화는 다음에 집에서 봐야겠네요 ... 그럼 이제 저녁 먹으러 갈까요? "
음료수는 들고 나가면서 마실 수도 있지만 차가운 날씨에 얼음이 들어가있는 음료를 마시는건 극구사절이다. 거의 마지막으로 상영관을 빠져나온 나는 출구를 향해 가며 말했다.
비명소리 라던가, 날아다니는 팝콘(?)이라던가, 뭔가 상당히 소란스러웠던 느낌이었지만 당신은 눈을 뜰 기색이 없었습니다. 그만큼 피곤했단걸까요, 쉬어도 괜찮은걸 왜 오늘 만나자고 한건지. 그러나 지금만큼은 미안함도 잠시, 그저 영화는 신경쓰지 않고 당신만 보고있는 그녀가 있었습니다.
영화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플레이 타임동안 정말 스크린조차 보지않고 그저 당신만을 관람하다 끝난 시간. 영화관만 아니었다면 분명 사진을 찍었을겁니다. 그러나 그 시간도 끝나고 엔딩크레딧과 함께 사람들이 일어나며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녀가 깨울 필요도 없이 당신은 눈을 떴습니다. 그 사이에도 당신에게서 고개를 돌리지 못했던 그녀와 눈이 마주쳤겠지만, 그녀는 딱히 불편하지 않았다며 당신을 따라 일어났습니다.
"피곤하면 무리하지 않아도 됐는데.. 일단 식사하러 가요."
조금은 피곤이 풀리긴 했으려나. 저녁을 먹으러 갈까요? 하고 묻는 당신에게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메뉴는 뭐로할까 생각하며 상영관을 따라 나섰습니다. 그러나 생각한 메뉴대신 얼떨결에 출구 근처에서 천천히 느려지던 발걸음이 멈춘 그녀의 입은 전혀 다른것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1. 에스더의 시 에스더의 시는 극중극으로, 설정상 애쉬가 '리리'라는 필명으로 집필한 판타지 범죄 소설 시리즈다.
우연히 초능력을 가지게 된 '에스더'가 살인을 실행하기 위한 계확과, 에스더의 뒤틀린 시선을 낱낱이 고하는 등 충격적인 전개로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았던 소설이며, 한국어 정발본도 있다는 설정.
해당 극중극은 애쉬 독백에서 서술트릭으로 사용 됐다.(위키 애쉬/익스레이버 항목에 기재 되었던 ASH, 감기, 장례식 독백의 문단.)
2. "리리야. 당신은 정말 잔인한 사람이야."
퍼디난드는 퇴근 후 애쉬에게 케이시의 말을 전하곤 흥얼거리며 집에 돌아간다. 샤워와 환복을 마친 뒤 소파에 앉아 맥주 캔을 땄다. 시덥잖은 건배사 이후 안주도 없이 맥주를 목구멍 너머로 때려붓는다. 그렇지만 그의 대부는 잔인한 사람이 맞지 않은가. 청량한 탄성 뒤로 소파에 냉큼 늘어진 다리를 꼬며 tv에 비친 자신을 본다.
"편지에 미안하다고만 써두고 용서해달란 말은 죽어도 안 적었잖아. 어쩜 그렇게 사람이 뻔뻔하담."
자기가 무슨 짓을 하는지 알면서도 사과 하나 안 하는게 뉴욕 경찰국의 마녀가 맞긴 하지만.
영화관이 따뜻한데다 어두워서 숨어있던 피로가 잔뜩 등장해버린게 아닐까 싶었다. 잠을 그렇게 못잔 것도 아닌데 왜 이러는건지. 그냥 지금까지 누적되어있던 피로가 한번에 쏟아져나온거라고 생각하면 되겠지. 다행인 점은 상영 시간동안 정말 푹 자고 일어났기에 이젠 몸이 가뿐하다는 점? 그래놓고 집 가면 또 쓰러져 잠들겠지만.
" 그래도 맛집 같은 것들은 많이 알고 있으니까 ... "
평소에 저녁은 맛있게 먹자는 주의에 따라서 여러 식당을 가보았기에 메뉴를 골라두면 어느정도 가이드라인은 만들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래서 뭘 먹을까 고민하면서 나가려는 찰나, 연우씨의 물음이 들려왔다.
" 아 그거 말이죠. "
걸음을 멈추고서 그녀를 바라본다. 언젠간 얘기했어야하는건데, 막상 말하려니 입에서 꺼내는게 좀 어렵네. 나는 머리를 살짝 만졌다가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
" 그냥 일반적인 동료들을 좋아하는거랑 다르단 말이었어요. 제가 아무한테나 이런 말을 늘어놓지 않는다고 누누히 말했잖아요? "
그렇게 나는 시선을 피하며 얘기했다. 학생도 아니고 이런거 얘기하는게 뭐가 이렇게 힘든가 싶었는데. 막상 말하려니 어렵다.
당신과 대화하고 있으면서도 그녀는 다른곳에 신경이 가있었습니다. 한 사람의 얼굴을 그렇게나 보고 있었던건 언제였을까요. 어릴때 어머니를 봤을때 뿐이던가. 그저 자는 모습이 재밌어서 같은 말로 끝낼 수 없다는건, 그녀도 알고 있었습니다.
"...."
그래서 맛집 이야기에도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던 그녀는, 이내 시선을 피해가며 자신의 물음에 답해주는 당신을 똑바로 보고 있었습니다. 어째서일까요 손만 닿고있어도 오르던 열이 순식간에 내려갔습니다. 좋아한다고, 이성으로서. 속으로 그런걸까, 아니면 겉치레일까. 고민하던 이야기의 답이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듣고싶지 않았던 답이.
'다른 이의 마음을, 제대로 답해주는게 아닌 순간의 기분이나 손익으로 받아들이지 마세요'
어머니의 가르침이 머리속을 맴돕니다. 좋아하니 사랑이니, 이해하지 못하는 그녀는 그 말에 답해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쩌죠? 이렇게 당신의 옆에 있을 수 없는걸까요? 이 관계는 사라져버릴까요? 아니면 당신은 그래도 웃으며 있을까요? 하지만 어쩌죠, 나는 그걸 버틸 자신이 없어요.
.... 버틸 자신이 없어? 왜요? 아무런 감정이 없다면 그저 거절한 사람중 하나잖아요. 빈말로도 오래 만나본것도 아니고 당신(내가)이 저 감정을 이해할 수 있을리없어.
그럼에도. 그녀는 다가온 당신에게 자신도 다가가 당신의 품안으로 쓰러지듯 기대려 했습니다. 지금은 차마 당신을 좋아한다고는 말로 하지 못하더라도.
1권. 에스더의 각성과 살인의 시작. 첫 피해자와 두번째 피해자가 생겨났으며 이때까지는 에스더가 단순히 자신의 콤플렉스 극복과 욕구 충족을 위한 범죄를 저질렀다. 2권. 에스더의 어긋난 시선이 본격적으로 보이는 것. 사랑하는 사람을 천사로 칭하며 자신의 행위를 구원으로 받들기 시작한다. 천사를 구원하며 이 능력을 가진 이상 자신을 '특별한 메시지를 줄 수 있는 존재'로 받아들이며 이 '메시지'를 전하고자 범죄를 저지른다. 3권. 에스더의 위기 상황에 가깝다. 천사의 탈출을 비롯해 신변상의 위협이 생기나 경찰을 따돌릴 수 있었고, 자신을 추종하기 시작하는 사람을 모아 '선지자 에스더'라는 자아를 만들기에 이른다. 4권. 선지자 에스더는 작은 규모의 테러를 저질렀으며 이는 '추악한 것'을 없애기 위헌 정화 의식과도 같다는 등, 소위 말하는 '목적형 살인'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적이 나오며 당연히 경찰. 경찰은 에스더의 신변을 알게 되고, 저지하는 특수 수사 본부를 만드는 것으로 4권 끝. 5권. 현재 집필 중
까지는 있어. 사람이 초능력을 얻게 되고 그로 인해 점점 미쳐가며 자신을 신격화 하는 과정을 적어둔 소설이라고 보면 되겠네..여러가지 사회의 범죄와 사람의 광기가 어디까지 가는지 묘사가 적나라하게 나와서 불쾌한 느낌이 많이 드는 소설이지만 그만큼 인간의 현실적인 불쾌감을 잘 살렸다는 느낌 때문에 인기가 많다는 설정이야...이제..이제 진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