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있었구나- 이번에는 내가 놀려서 그런 거 아니다? (너 혼자 갑자기 빨갛게 변했어. 그 의미를 담아 말한 랑은 쿡쿡 작게 소리내며 웃었다. 이번에 빨갛게 변한다면 그건 놀려서 빨갛게 변했다고 인정할 수 밖에 없겠다.) 세상에서 제일 예쁜 장미꽃보다 네가 더 빨갛겠다. (사과나 토마토를 제끼고서 장미가 생각난 이유는 그 가시 때문이다. 당신이 툭툭대거나 찌푸린 표정을 짓고는 하는게 장미의 가시가 생각났다. 뺨까지 빨갛게 오른 당신이 또 표정을 찌푸린다면 랑은 생각할 것이다. 정말 장미꽃이라고.) 와아~. (당신이 내민 곰인형을 거절할 리가 없었다. 랑은 내밀어진 곰인형을 끌어안았다. 끌어안은 곰인형은 무언가 익숙한 향기가 머무르고 있었다. 무슨 향기인지 기억하는데까지 걸린 시간은 찰나. 곰인형에 파묻힐 것처럼 꼭 끌어안았다가, 인형이 푹신하다거나 기분좋단 이야기를 하려 당신을 보았을 때. 그때 바로 떠올렸다.) 여기서 너랑 똑같은 향기 나- (넘어지려던 것을 잡아줬던 당신의 품에 부딪혔었다. 그때 풍겼던 향기를 기억한다.) 그래도 나름 시험이니까 제한 시간도 있다? 1시간 동안이야! (랑은 한쪽으로 밀어냈던 책과 노트 등을 다시 앞으로 가져온다. 당신이 문제를 푸는 1시간 동안 마저 정리노트를 만들 것이다. 당신이 대답을 하고서 문제를 풀기 시작하면 폰에서 타이머를 찾아 1시간 동안 흘러가게 두었다. 당신이 시간을 보고서 문제마다 시간 분배를 할 수 있도록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그럼 이제 노트를 만들면 되는데, 크로플에 시선이 계속 가는게 문제다. 어쩔 수 없는게 6시가 지난 시간이다. 저녁 시간대에 취향에 맞은 음식이 눈 앞에 있다니. 그렇지만 준비해준 당신은 문제를 풀고 있는데, 방해되게 앞에서 먼저 먹기도 좀 그랬다. 그러다가는 아이스크림이 다 녹아버릴텐데, 결국 랑은 조용히 먹기를 택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용히. 이럴 때에는 작은 소리 하나조차도 왜 이렇게 크게 느껴지는지 랑은 조심스레 아이스크림을 입에 넣고서 행복해했다.)
(이 소년이 붉은 얼굴을 하고 가시를 톡톡 세우는 장미라면, 랑은 어린 왕자가 되는 걸까.) 빨개져서 싫냐? (붉은 얼굴을 하고 그는 툴툴대면서 랑에게 인형을 안겨주었다. 그러다가, 랑이 한 마디 얹어서 던진 말에...) ............ (온 얼굴이 잘 익은 감색이 됐다. 이젠 툴툴대지도 못하고 화난 표정도 못 짓고 온 얼굴이 갈피를 잃어선 얼굴 표정이 주체가 안 된다. 현민이 결론적으로 내린 궁여지책은 두 손바닥을 들어올려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는 것이었다. 애석하게도 손까지 빨개질 정도라 얼굴이 안 보인다는 걸 빼곤 별 차이가 없었지만. 한동안 손에 얼굴을 파묻고 있다가 현민은 손가락 한편을 빠끔 벌려서 그 틈으로 랑을 조심스레 내다보았다.) 그... 향기...면, 냄새가 이상한 건 아니지? (뭐가 부끄럽다고 그러는지. 온 몸의 향기는 처음에 고꾸라지려던 랑을 받아줬을 때 이미 다 내어줬는데 말이다. 현민이 어떤 심경인지도 모르고, 소년의 삶이 파편화되어 숲 냄새로 묻어있는 곰인형은 향기롭기만 하다.)
(...결국 현민이 얼굴에서 손을 떼고 문제집으로 주의를 돌리기는 시간이 좀 걸렸다. 다만 문제는, 문제집도 워낙에 귀여웠던 탓에 기껏 가다듬은 안색과 마음이 또 흔들려버리고 만 것일까.) 맘껏 먹어. 손님 대접하려고 가져온 건데... (문제에 집중하면서, 현민은 목이 타는지 우유를 몇 모금 마셨고, 이따금 그가 풀기에는 어렵되 못 풀 것 같지도 않은 문제가 나와서 문제에 시간을 너무 많이 쓰면 이따금 포크를 들어 크로플과 아이스크림을 잘라먹기도 했다.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는지 초콜릿 아이스크림이 올라간 크로플을 먼저 먹었다.) (알람 소리가 먼저 울렸다.) 뭐야, 1시간이 벌써 지났어? (아무래도 그가 문제를 다 푸는 것보다 시간이 다 가는 게 더 빨랐던 모양이다. 기본 개념을 알고 있는지 체크하는 간단한 문제라고 해도 1시간 동안 60문제, 문제당 1분이라는 시간은 평일 수업을 3교시에서 6~7교시밖에 듣지 못하는 축구부에게는 벅찬 것이었나 보다.)
(전체적으로 수업을 중간중간 빼먹은 티가 난다...는 느낌일까. 기본적인 이론에 대해 묻는 문제는 다 맞췄는데, 이따금 엉뚱한 부분에서 오답이 나오기도 했고, 기존 교육과정을 응용한 심화 교육과정 문제는 거의 틀렸다. 다만 고무적인 것은 국어 문제는 17개가 정답이었고, 중간중간 심화과정 문제 중에서 자신이 모르는 이론이나 공식인데도 불구하고 랑의 메모에서 힌트를 얻어서 해결해낸 문제가 보인다는 점일까. 머리가 나쁜 건 아닌 것 같다. 다만 수학 과목은 시간이 모자라서 그런가 11번까지밖에 풀지 못했다.)
너 아까도 그 말 했었는데. (현관문 앞에서의 일이다. 붉힌 얼굴이 터질 것 같다하니 당신이 얼굴 빨개져서 싫냐고 툴툴거렸다. 랑은 그때 싫다고 한 적 없다 대답했었다. 이번에도 같다.) 싫다고 한 적 없다니까~. (당신이 안겨주었던 인형에 포옥 기댔다. 그럼 다시 당신의 향기가 난다. 그래서 문득 당신을 바라보면, 이번에는 유달리 심하게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손까지 붉게 달아오른 당신을 보며 랑은 눈을 깜빡였다. 곰인형은 여전히 당신의 향기를 머금고 있었고, 당신이 손 틈새로 바라보면 웃었다. 틈새로 보이는 시선을 꼭 맞추고서 찡긋 웃는다.) 응- 향기 좋아. 안 이상하니까 안 부끄러워도 돼. (랑은 당신이 혼자서도 곧잘 붉어진다고 생각했지만 자신이 무언가 말을 얹으면 파장이 더 큰 것 같다고도 생각했다. 랑은 당신이 가라앉을 동안 안고 있던 곰인형을 자신의 왼쪽 옆자리에 앉혀두었다. ) 으악, 들켰다~. (나름 조심한다고 조심한 거였는데, 랑은 조그맣게 웃고서 조심하기를 그만뒀다.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올라간 크로플 하나는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우유도 반 잔이 사라졌다. 그동안 먹기만 한 것이 아니라 정리 노트도 꼼꼼히 만들어가고 있었고, 당신을 위한 문제집을 만드느라 쓴 시간만큼 밀린 부분까지 다 정리하는데 성공했다. 마침 1시간이 지났다는 알림이 울릴 때였다. 랑은 타이머를 껐다.) 응, 벌써 지났습니다~. 이제는 채점 시간이야! (필통에서 빨간 색연필을 꺼냈다. 동그라미와 선을 거침없이도 그린다. 다만 못 푼 문제들은 건들지 않았다. 어려워서 풀지 못한게 아니라, 시간이 없어서 못 풀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채점을 끝낸 시험지 노트를 다시 돌려주나 싶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답싹 당신의 오른편에 자리를 잡고서 앉는다.) 못 푼 문제들 중에 진짜 몰라서 못 풀겠는 거 있어? (원래 랑이 앉아있던 자리에는 곰인형만 덩그러니 앉아있다. 지금 랑은 곰인형에 묻어있던 당신의 향을 조금 가져온 채 당신의 옆자리에 있다. 랑은 시험지 노트를 제일 처음 틀린 문제가 있는 장으로 넘겼다.) 우선은 틀린 거 같이 풀어보자. 그래도 국어는 3문제 밖에 없어!
그...... 그랬었다. (짧은 시간 내에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비단 등교길에서부터 지금까지가 아니라, 랑이, 네가 모퉁이를 돌다가 내게로 고꾸라진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숨이 붙어있을 뿐, 아무리 발버둥쳐도 조금씩 가라앉아갈 뿐이라고 생각했던 나날들에 신선할 정도로 새롭고 자극적인 순간들이었다. 네가 그것을 친절하게 지적해준 덕분에 도무지 어떻게 손에서 얼굴을 떼어야 할지 모르겠다. 이렇게 열이 오른 머리로 공부를 얼마나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 성적이 형편없거나 하면 절반 정도는 열의 탓으로 돌릴 것이다.)
(열을 식히기 위해 현민은 아이스크림이 반쯤 녹은 크로플로 시선을 돌렸다. 초콜릿 아이스크림 하나 바닐라 아이스크림 하나가 남아있다.) 둘 중 뭐 먹을래? (포크는 집어들지 않고 있다가, 마침 랑이 되돌려주는 시험지를 받아든다. 그러다 랑이 불쑥 옆에 붙어앉자 흠칫 놀란다. 본인 딴에는 흠칫하지 않으려고 애깨나 쓴 것 같지만 약간 움찔하는 게 랑에게도 느껴졌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이 향기를 의식하지 않기 위해 애써야 한다...) (다행히 시험지로, 정확히는 폰트가 아닌 컨텍스트로 의식을 집중하자 훨씬 견딜 만했다.) 어. 그 쓰이는 공식이라거나 문법이라거나를 아예 모르니까. 국어는 좀 쫀심상하네. 나름 책 많이 읽는다고 생각하는데... (책장에 나름대로 전문 서적이 몇 권인가 있었으니 의외로 독해력도 괜찮은 모양이다. 예전부터 현민의 보잘것없는 학과성적 평균은 국어에 크게 기대고 있는 편이었다.)
(그랬었다는 무슨 말투야- 하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이를 입에 담았다가는 당신은 계속 불타오르고 있을 듯 싶다. 부끄럼을 이렇게나 타는 당신이고, 문제도 풀어야하는데 계속 손이 얼굴을 가르고 있어서는 펜을 잡을 수가 없다. 그래서 조용히 쿡쿡 웃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그럼 초콜릿. 바닐라 먹었으니까! (당신에게 시험지를 건네고 나서는 포크를 집었다. 초콜릿 아이스크림만 떠먹고, 초콜릿의 단 맛을 느꼈다.) 초콜릿 좋아해? (타이밍이 엇갈렸다. 랑은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먹을 때 당신이 움찔한 줄 알고서 당신을 바라보았다. 설마 옆에 앉았다는 것으로 당신이 그러리라고는 짐작도 못했다. 랑에게서 부끄러운 것에 순위를 매기자면 데이트 신청이 아무리 생각해도 1순위였기 때문이다.) 그런 문제들은 알려줄게! 틀린 문제들 풀고나서 알려주면 되겠다. (쫀심 상한다는 말에 포크를 내려놓고 펜을 집은 랑은 당신을 바라보며 장난친다.) 밴드 빌려줄까? 가방에 많은데. (실없는 소리를 하면서 웃었다. 그럼 이제 랑은 당신에게 틀린 문제를 풀어줘야겠으니, 상체를 조금 당신에게로 기울였다. 랑과 당신 사이에 놓인 시험지 노트를 같이 보아야 하게 되었으니 의식치 않고 나온 행동이었다. 랑은 조곤조곤 문제를 설명하고, 틀린 답이 틀린 이유와 맞는 답이 맞는 이유를 설명한다. 당신의 실력을 파악하기 위해서 본 시험이 제대로 그 역할은 했나보다. 과하게 쉬운 설명도 아니었고, 이해하지 못하게 어려운 설명도 아니었다.)
초콜릿도 바닐라도 다 좋아해. (그러면 굳이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건드렸다고 움찔한 것은 아닐지도. 사실 별 이유 아닐지도 모른다. 다만 랑이 짐작하지 못한 일이 하나 더 있었는데, 아침 당시 현민이 '태연하게' 데이트 신청을 해온 이유는 현민의 열 게이지가 극도로 차오른 나머지 과부하가 걸리는 바람에 열에 무감각해져 버린 탓이었다. 그러나 아침은 아침이고, 지금은 지금이지. 차라리 게이지가 터져나간 김에 영영 터져나간 채로였다면 차라리 좋았을 것을, 아침이 지나기도 전에 고쳐져 버려서, 도무지가 오늘은 빨간 날도 아닌데 온통 하루 종일 빨갰다.) 밴드갖곤 안 돼. (현민은 툴툴거렸다. 그러면서도 머리가 복잡했다. 그렇기에 차라리 랑의 수업에 귀를 기울이는 게 머리가 훨씬 덜 복잡했다.) (아무래도 배웠는데 잘못 이해해서 틀린 게 아니라, 아예 배우지를 못해서 풀지 못한 것이라 배우는 데에 여러 가지로 기초부터 차근차근 설명해야 한 덕에 가르치는 게 조금 오래 걸린다. 국어는 단지 문맥을 실수로 건너뛰었거나, 문제 출제자 스스로 자화자찬해도 좋을 정도의 고급 훼이크에 보기좋게 속아넘어간 케이스뿐이었기에 설명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았고, 영어는 단어는 꽤 잘 알고 있는데 문법이 취약했다. 마치 영어수업은 잘 안 들으면서 단어장만 달달 외운 것처럼. 그렇지만 단어라도 잘 알고 있는 게 매우 고무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역시 가장 큰 문제는 수학. 녹아가는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크로플과 함께 씹으면서, 현민은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여지껏 2학기 내내 배운 양보다 오늘 하루 너한테 배운 양이 더 많을 것 같은데. (그러다가 현민은 넌지시 말했다.) 좀 쉬다 하는 건 어때?
초콜릿 닮아서 좋아할 줄 알았는데. 아닌가, 딸기 닮았나~.(분명 곧잘 빨갛게 익어버리는 것을 보고서 하는 이야기다. 초콜릿은 피부색만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씁쓸하고 단 맛이 공존하는게 초콜릿이다. 당신을 보고서 장미꽃을 떠올린 것과 같은 흐름이다.) 그럼 호- 해줄까? (상처 위에 입바람을 부는 것. 자존심이 있는 곳은 어딘지 모르겠지만 마음이 있는 곳과 비슷하지 않을까, 랑은 생각했다. 그리고 대부분 마음은 가슴 깊은 곳 어딘가 있다고들 취급한다. 호- 해주는 것 자체만으로도 받아줄 것 같지가 않은데 .이번 농담은 꽤 많이 짓궂었다고 스스로도 결론내렸다.) 그럴 리가. (한창 당신에게 공부를 알려주다가, 관자놀이를 누르면서 하는 당신의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그렇지만 이쪽도 쉬고 싶기는 했다. 혼자 공부하는 것과 남을 알려주는 일은 달랐다. 아이스크림이 녹아내려 남은 크로플이 불쌍했다. 공부하느라 먹지도 못 했네- 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랑은 당신을 따라 크로플을 한입 물고서는 오물거린다.) 지금 몇 시지- (찌뿌둥한 몸에 위로 기지개를 쭉 펴나 싶더니 뒤로 넘어가버린다. 누워버렸다.) 조금만 놀까- (하고 누워 있다가, 문득 방안에 옷걸이가 눈에 들어왔다. 아까 걸어둔 랑의 외투를 제외하고서 있는 당신의 옷들을 보다가.) 내일 데이트할 때 뭐 입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