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을 나기 위해 이불을 솜이불로 바꿨다. 이른감이 있지 않나 싶지만 현궁은 사시사철 겨울이고 11월만 되어도 춥다. 그는 생일 선물로 받은 새 베개를 집어들며 대체 왜 이런걸 선물로 주나 싶어 괜히 팡팡 쳐 먼지를 털곤 침구를 정리한다. 제법 가정적인 모습이고, 평온한 한때였다. 교장의 호출이 있기 전까지는.
"따라오겠더니."
그는 당신을 돌아보며 늘 그렇듯 자유를 보장한다. 따라오지 않는다고 해도 그러려니 하고 달링을 데려갔을 것이다. 교장은 감 사감과 대화를 하고 있었고, 현장 경험이란 말에 입을 다물었다 뗀다. 좋은 의미가 전혀 아니지 않은가. 산전수전 다 겪은 너희에게...
"위험한 일이 발생한다면 주저없이 신호 마법을 쓰겠습니다."
이번엔 제발 호출에 제대로 응해주길 바란다는 말을 삼키며 그는 고개를 숙였다. 까라면 까는 수밖에 없다. 적어도 감시할 자를 감시하고 말썽 피울 기미가 보이면..아니면 탈이 보인다면..그는 소맷단을 정리하는 척 하며 숨겨둔 살아있는 죽음의 약을 확인하고 온화하게 교장을 돌아봤다.
인상을 확 구기고 째려보았다. 친구라고 부르기에는 애매한 포지션의 학생이 살짝 수그러들며 으응.. 하고 말하자 레오는 '비켜'라는 말과 함께 앞으로 나섰다. 교장선생님이라. 이제와서는 별 감흥이 생기지 않는다. 학생들이 사라지고 있으니 경험이 풍부한 너희들이 가봐야겠다는 말이렸다. 레오는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 레오 괜찮아? ' " 어. 신경쓰지마라. "
그보다 확실히 할 건 확실히 하고 가야겠지. 레오는 한 손을 번쩍들곤 '주궁 4학년 레오파르트 로아나입니다.' 하고 자신의 소속과 이름을 말했다.
" 왜 저희가 하죠? 교수님들은요? 깊은 숲으로 우리가 들어가고 나면 그때부터 우리 안전은 누가 어떻게 책임져주나요? 숲으로 들어간 이들중에 사라지는... 아이씨.. 야! 걸리적거리지말고 저리 비켜! 확 쳐죽여버리기전에 "
몇 번의 사건을 겪고 난 뒤에 드는 생각이라면 역시 자신과 친구들의 안전이 확실히 보장되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탈을 쓰고 있었던 그 녀석이 아직도 원내에 있고 그 녀석이 교수중 하나였다는 사실 이후로는 교수나 선생이란 자들을 쉬이 믿지 못하게 되어버렸다.
" 어쨌든. 안에서 뭔가 위험한 일이 생긴다면 그 때 우리 안전은 누가 어떻게 책임져줍니까? "
그는 양 팔을 벌려 머리 위에 앉은 당신을 품으로 옮겼다. 교수는 다른 방향을 찾고 있으며, 무사한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른다. 깨진 신뢰는 복구할 수 없으나 산전수전 다 겪은 자신의 위로 산전수전 다 겪은 교수가 있음을 깨달은 그였다. 그는 편 없이 혼자 있느니 차라리 믿는게 낫다고 생각했다. 이번만 믿어보고, 이번에도 달라지는 기미가 없다면 교장에게 담판을 지어보고자 하는 그였다. 아니면 냅다 고문저주부터 사용하고 아무도 모르게 관에 담아 화장터로 옮겨 증거를 인멸하거나.
지나가며 듣기론 금지된 숲과 가림빛까지 돌아보고 있다고 한다. 알지 못 하는 사이 무슨 일이 어디까지 벌어진 걸까. 성큼 들어섰던 걸음이 얼마 못 가 수풀 사이에 멈춘다. 까칠한 잎사귀들이 살갗을 스쳐 따갑다. 그렇지만 멈춘 채 한 손으로 가슴팍을 짚었다. 얄팍한 옷 너머의 호크룩스가 손바닥에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작은 중얼거림은 숨소리와 같아 그녀에게 다시 들리기도 어렵다. 말로 내뱉고보니 마음이 착잡해지는지 영롱한 금빛에 희미한 불안이 퍼진다.
하. 다시 한번 짧은 한숨을 내쉬자 옅은 입김이 흩어졌다. 툭툭. 두어번 가슴팍을 두드린 그녀는 손을 내려 허리에 꽂은 지팡이 끝을 만지작거리며 굳은 걸음을 떼었다.
앞을 향해 걷고 있긴 했지만 실상 그녀의 시선은 바닥을 향하고 있는거나 다름없었다. 그래서였을까. 바닥에 나타난 발자국을 놓치지 않고 발견할 수 있었다. 자리에 멈춰 둘러보자 딱 봐도 사람의 것이 아닌 발자국이 그 주변에 제법 찍혀있었다. 그 흔적에 그녀는 불현듯 언젠가 있었던 괴형 트롤을 떠올렸다.
설마.
잘못 말하면 사람 잡는다는 그 말을 입안으로만 되내이며 길을 찾아본다. 오래 볼 것도 없이 나타난 두 갈래의 길을 보고, 그녀는 아주 잠깐 고민한 듯 싶다. 양쪽을 한번씩 보고 바로 걸음을 옮겼으니.
당신이 사람이 되자 그는 혹여나 들킬까 주변을 둘러보다, 할미란 말에 고개를 돌린다. ..칼 교수가 말했던 자가 아닐까 싶던 자. 할미를 찾아가라던 혜향 교수. 공격해야 할까. 그는 아무도 모르는 것 같으니 당신의 손을..잡아도 되는 걸까. 허락한다면 손을 잡고 앞으로 소리없는 발걸음을 재촉하여 죽 앞으로 나아가려 했을 것이다.
"대화 좀 하지."
공격하지 않고 대화를 시도하려 했던 것이다. 안 통하면? 러빗 교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하는 수밖에..
그녀의 부름에 누가 나타나기는 커녕 오히려 잠든 학생들끼리 잠꼬대하는 모습을 보고 저도 모르게 실소가 나왔다. 밖에서는 지들 찾겠다고 난리인 걸 알긴 하나. 이러고 있는데 알 턱이 없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숙였던 몸을 일으킨다. 손을 댄 학생도 제대로 숨을 쉬고 있었으니, 최소한 살아는 있다. 그렇다면 깨워야지.
"아쿠아멘ㅌ, 아니지. 아쿠아 에럭토."
허리춤의 지팡이를 뽑아 학생들의 위를 향해 들고 주문을 외운다. 일일히 깨우고 다니기 귀찮으니 한번에 물을 끼얹어서 깨울 심산이었다. 여기까지 오게 수고값이라는게 그녀의 명분이었다.
보통은 자다가 찬물을 맞으면 바로 깨기 마련인데, 이것들은 어떻게 된 일인지 깼다가 다시 잔다. 다시 잔다고? 뭔데 이게?
"마법인지 약인지 아니면 그냥 진짜 잘 자는 놈들인건지..."
지팡이를 까딱까딱 흔들며 중얼거린 그녀. 찬물로 안 된다면 또다른 충격으로 깨워야 하나 싶다. 또다른 충격... 스윽 지팡이를 드는 모습이 또 뭔가 마법을 날리려는 듯 하다. 마침 푹 젖었으니 여기에 전격을 흘린다면, 이라는 무서운 생각이 덤덤한 표정 위로 드러나지만 누구 하나 말릴 사람은 없다. 그대로 지팡이를 든 그녀가 주문을 외우려고 입술을 열었지만 나온 건 에휴, 하는 한숨 뿐이었다.
"귀찮네 진짜."
들었던 지팡이를 내리고 좀전에 맥을 짚었던 학생에게 다가가 한 손으로 멱살을 잡아올린다. 난 분명히 말했다, 라고 중얼거리곤 남은 손을 쫙 펴 학생의 뺨을 후려갈긴다. 미리 물을 뿌려논 덕이랄지, 맞닿는 순간 제법 찰진 소리가 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