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MI.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대한민국에는 '나례(이칭: 구나, 대나, 나희)'라는 이름의 할로윈 비슷한 명절이 있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나례의 행사를 주도하는 전문 기관까지 생겨났을 정도였다. 음력 섣달 그믐에 궁중에서 묵은 해의 잡귀를 몰아내기 위해 행하던 행사다. 가정에서는 집안을 깨끗이 청소하고 새로 보수하며, 자정에 마당에서 불을 피워, 폭죽을 터뜨리곤 했으며, 궁에서는 커다란 볼거리를 만들기도 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나례(儺禮))]
그는 최근 라온 밖으로 자주 나온다. 굳이 흡연의 이유 뿐만이 아니라 건강과 그의 평온한 삶을 위함이다. 삶을 점점 바꾸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진통제도 잡다한 신비한 약초를 섞어 무엇을 초래할지 모르는 물약과 알약이 아닌 머글 사회에서 안전함이 보증된 걸 공수한다. 점수도 필요 이상으로 깎지 않는다. 그는 허무 속에서 MA와 대화하고, 혜향 교수의 환영을 죽여버린 뒤 더이상 농간에 당하지 않으리라 작정했다. 그리고 움직인다.
칼 교수는 평화를 사랑하는 자를 찾으라 했고, 혜향 교수는 할미탈을 찾으라 했다. 돌아다니다 보면 언젠가 그와 함께 하는 작은 매처럼 연이 닿지 않을까 싶은 이유도 있다. 라온은 활기차 과연 누가 할미일지는 모르겠으나 그 당시 보았던 드문 흰 머리카락은 기억한다. 그러나 오늘도 공탕이다. 뭐, 인생사 다 그렇지 않은가.
"흐음."
그는 연초를 벽에 비벼 끄고 기지개를 쭉 켰다. 늦가을 사이로 슬며시 다가오는 겨울은 메마른 바람을 몰고 온다. 골목 밖에서 본 마법사와 마녀 중 몇은 추운지 옷깃을 여민다. 북부에서 살던 그는 이정도 날씨가 추운 건지 감도 오지 않는다. 추위를 잘 타지 않아 다행이지, 그가 만약 추위마저 잘 탔다면 빈약한 몸뚱아리는 진작 쓰러졌을 것이다. 남은 담배 냄새도 좀 뺄 겸, 좀 걷고, 초콜릿이나 사가는게 좋겠다. 우연찮게도 그가 골목 밖으로 나올 때 보인 흰 백발은 기대하던 자와는 달랐으나 호의적인 자였다. 살금살금 다가간 그가 무엇을 하였냐면..
"Boo."
하고 뒤로 가서 어깨 위에 손을 얹고 놀래켜보려 한 것이다. 하물며 검지를 쭉 뻗고 있어 뒤로 고개를 돌리면 볼까지 찌를 것이 분명하리라. 무려 그가. 발렌타인이, 절대 안 그럴 것 같은 이상한 사람이!
세상은 언뜻 마구잡이로 돌아가는 듯 보여도 들여다보면 나름의 규칙과 균형을 이루며 굴러가고 있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근래들어 외출이 잦아진 사람이 있다면 반대로 얼굴도 보기 힘들어진 사람도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아주 못 보는 건 아니고 수업 때는 얼굴을 비췄으니 반쯤, 이라고 해둘까. 누가 그러한지는 새삼 말할 필요가 있을지 싶지만 일단은 확실히 해두자. 펠리체 스피델리, 그녀 본인이었다.
어쩌다 그리 되었는지는 그녀도 모른다. 짐작 가는 이유만 몇 있을 뿐, 수일동안 이어진 무기력의 근본적인 원인은 알 수 없었다. 아니, 알고 싶지 않다는게 맞다. 알아봤자 해결할 방법은 없고 그 사실을 직면하게 되면 지금보다 더한 무력감이 몰려오리란 걸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기 때문일거다. 그렇다고 계속 외면하는게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것도 마찬가지로 알고 있었고.
그러한 흐름으로, 오늘도 어김없이 빈 시간 내내 기숙사에 틀어박혀 있던 중이었다. 옆에서 리치가 놀아달라고 보채도 꼼짝도 않고 누워있던 그녀가 돌연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그러더니 급하게 시간을 확인하곤 더 급하게 외출 준비를 해 쌩하니 밖으로 나간다. 오늘 남매들 중 한명이 라온에 올 거라 했던 걸 방금 떠올린 탓이다. 요근래 정신을 얼마나 빼놓고 살았으면 가족과의 약속도 깜빡하는지. 헐레벌떡 나갔으나 라온에 도착해 남매를 만났을 때는 약속시간이 제법 지난 후였다. 하필 나온게 가장 장난기가 심한 셋째라 한바탕 시달릴 줄 알았으나 셋째는 하나 뿐인 언니를 얼어죽게 할 셈이냐고 농담만 쳤다. 그리고 정신없이 오느라 흐트러진 그녀의 머리를 정돈해주고, 제법 커다란 라탄 가방을 건네준 뒤 다음에 보자는 말만 남기고 가버렸다.
평소와 달라도 너무 다른 남매의 모습에 그녀는 잠시 자신의 무기력증도 잊고 가만히 서 있었다. 멍- 하니 서 있는 그녀였기에 발렌타인이 다가오는 것도 눈치채지 못 했고, 손이 어깨에 닿았을 때는 화들짝 놀라는 반응이 나갈 수 밖에 없었다.
"히익!"
그야말로 온 머리칼이 곤두서는 듯이 깜짝 놀라며 짧게 소리까지 내었다. 그리고 곧장 고개를 돌리자 이번엔 볼에 푹, 하고 찔리는 감각이 있어 그녀의 놀람은 2차까지 이어졌다. 정말 세상 깜짝 놀란 사람처럼 파드득 떨고 휙 뒤돌아 그런 장난을 친 사람이 누군지 확인한다. 놀람으로 크게 뜨인 두 눈에 발렌타인의 모습이 비추고 누구인지를 인지하고 나자 가장 먼저 나온 건 짜증 반 놀람 반의 볼멘소리였지만.
"뭐, 뭐하는거에요 지금?! 진짜 사신이라도 되서 제 심장이라도 떨어뜨리려고 한거에요 뭐에요!?"
한번 빼액 소리를 치고 재차 파르르 몸을 떠는게 꼭 성난 어린아이였을테다. 달리 말하자면, 엉뚱한 곳에 성을 내는 것 같았을지도. 어쨌거나 그녀는 놀람이 쉬이 가라앉지 않는지 잠시 동안은 그런 상태였을 것이다.
만족스러운 반응이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음침해서 장난 하나 없을 것 같았지만 그는 이런 장난을 제법 좋아한다. 인간을 싫어하는 자가 대체 왜 놀라는 반응을 좋아하는지, 나쁜 취미다. 인간은 전부 짜증나니 대충 아무나 심장이 빠르게 뛰며 몸이 펄쩍 뛰는 고통이라도 받으란 심보인지. 속내는 그가 꽁꽁 감싸매니 알기 어려우리라. 다만 서술자가 메타적으로 쓰되 발렌타인 샬럿 언더테이커라는 사람은 겉으로는 칙칙하나 속으로는 환장할 가문 안에서 자라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일과 이렇게 누군가를 하나 잡고 장난을 치는 정도였음을 서술한다.
"오!"
그는 감탄사를 내뱉는다. 놀란 고양이는 허리부터 쭉 길어지는데 펠리체가 딱 그런 모습이다. 파드득 떠는 모습과 함께 손가락에 닿는 감촉에 제법 즐거운듯 그의 눈이 장난기로 반짝인다. 이런 반응은 늘 그를 짜릿하게 한다. 볼멘 투정에 그는 진심으로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표정 변화가 적던 그가 보인 첫번째 변화다.
"글쎄?"
적어도 마음을 열어낸 사람에겐 이렇게 표정을 한번쯤 보여준다는 것이다. 만족스러운 표정 뒤로 어느날 그가 눈앞의 여성에게서 보았던 깐족거림이 업이 되어 돌아온다. 재차 몸을 떠는 모습에 그는 결국 만족스러운 표정에서 아랫 입술을 천천히 깨물곤 비죽 새어나오는 웃음을 꾹 참았다. 애매하게 올라간 입꼬리 뒤로 그가 숨을 잠시 고르곤 천천히 대답했다.
"자네야말로 무슨 생각에 그렇게 잠겨있어 내가 오는 것도 몰랐을까?"
그는 손을 거두고 눈앞의 여성이 주궁의 검은 머리카락의 맹랑하고 싸움을 즐기는 학생처럼 주먹부터 나간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한 보 물러난다. 성난 모습이 장난치는 주체는 대다수 같구나 싶어 다시금 웃음이 새어나오자 그는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그리고 지난 잠깐의 침묵. 그는 눈을 흘끔 굴려 장난스레 묻는다.
뭐하는거냐는 그 말처럼, 그녀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이 선배가 지금 나랑 뭐 하자는거지? 보아하니 방금 건 분명한 고의적 행동이었던 듯 한데. 그녀로서는 완전 처음 보는 이 황당한 행동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갈피가 서지 않았다. 우왕좌왕 갈팡질팡 머릿속이 어지럽게 요동친다. 하지만 표정 없던 얼굴에 만족스러운 표정이 차오르고, 그것도 모자라 희미하게 입술을 깨무는 것까지 보이자 딱 정리가 되어버렸다.
그냥 장난 친 거구나, 이 선배...!
"이익...!"
제대로 대답도 안 해주고 혼자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성질이 발끝에서 정수리까지 쫘악 뻗치는 느낌이다. 그녀가 고양이였다면 당장 털을 곤두세우고 위협적인 하악질을 했지 않을까. 아쉽게도 그녀는 사람인지라 잇새로 분한 소리만 짧게 흘렸다. 곧이어 쳇! 하고 불만 가득하게 혀를 차며 발렌타인의 물음에 툴툴대기까지 했다.
"남이사 길바닥에서 생각을 하던 말을 하건 무슨 상관이에요?"
별꼴이야, 라며 연신 투덜투덜대고 그새 어깨에서 흘러내린 가방끈을 추켜올려 제대로 멘다. 제법 묵직해 보이는 가방이 한번 들썩이자 희미한 단내가 과일향과 섞여 슬쩍 지나간다. 그런 가방을 어깨에 무리가 가지 않게 메곤, 여전히 뚱한 얼굴을 한 그녀는 발렌타인의 행동을 역시나 힐끔 보았다. 뒤로 물러나는거나 고개를 돌리거나 그녀를 곁눈질하는거나. 시선과 함께 들려온 장난스런 물음엔 눈을 가늘게 뜨고 흘겨보며 뾰족하게 대꾸했다.
"화 났으면 어쩔 건데요. 그런 걸로 화 내는 거냐고 놀릴려구요?"
그런 식으로 많이 당해봤는지 쌀쌀맞은 말투에 익숙함이 베어있었다. 그야 그녀도 남매들에게 온갖 장난이란 장난은 다 당해봤고, 저질렀었으니 대충 예상은 한다 그런거지. 그녀는 잠시간 발렌타인을 흘겨보다가 눈길을 거두며 으휴, 하고 한숨 쉬었다. 악의 없는 장난에 화내봤자 제 기운만 갉아먹는 짓이다. 됐다는 듯이 고개를 두어번 흔들고 아주 약간은 누그러진 기세로 말한다.
"우리집 첫째였으면 갈비뼈 하나 뜯어냈겠지만 선배는 생판 남이니까 그렇게까진 안 할게요. 그래서, 뭐하고 있었어요? 이런데서."
정말로 그의 목적이나 이유가 궁금하다기보다 그냥 예의상, 형식상이라는 느낌이 팍팍 드는 질문이었을 거다. 마주쳤으니 물어봐주긴 할게, 뭐 그런 느낌 말이다.
분한 소리가 들린다. 너무 심했나 싶어도 이미 엎지른 물을 다시 담기는 어려운 법 아닌가. 그는 불만 가득한 혀 차는 소리에 만족스러운 표정이라도 관리해야겠다 싶어 미적미적 입꼬리를 내렸다. 이것 봐라, 이젠 툴툴대기까지 하지 않는가. 그가 생각하건대 지금 당신의 입장에서 대역죄인이 된 것이다. 그래도 내가 재밌었으니 됐다. 뻔뻔한 생각 뒤로 그가 투덜대는 모습에도 아랑곳 않고 흠, 하고 짧은 소리를 냈다. 희미한 단내와 과일향. 보아하니 뭔가 사거나 받아 가는 길이겠거니, 아니면 주러 가는 길이겠거니 추측할 수 있겠다. 그는 쌀쌀맞은 말투에 주저없이 답했다.
"내가 그렇게까지 장난스러운 사람은 아닌지라, 수업 시간에 은근히 물어보려 했네."
수업 시간에 은근하게 아직도 화가 났는가? 할 것이다. 분명 불투명도 30으로 그의 깐족거리는 미소가 걸려있을 것이고, 심하면 지팡이를 살살 흔들며 얄미움까지 배가 될 것이다. 현궁의 사신이 이렇게까지 위엄이 없다. 당신이 한숨을 쉬자 그게 또 재밌는지, 아니면 흥미로운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그는 누그러진 기세와 달리 나오는 흉흉한 발언에 잠시 말을 멈추고 만다. 사고회로도 잠시 정지했는지 그가 아무 말 없이 당신을 쳐다보기만 한다. 갈비뼈를 뜯어낸단 말은 지금껏 많이 들었지만 가문 외부에서 듣는 건 또 처음이다. 갈비뼈를 뜯어내면..그게..그는 과거 타니아가 그의 갈비뼈를 실제로 부러트렸던 날을 기억한다. 깔깔 웃으며 팔꿈치로 그를 퍽 쳤을 뿐인데 그의 갈비뼈는 부러진 것이다. 그는 답지 않게 조용히 팔을 움직여 자신의 양 팔을 부둥켜 안는다.
"내..갈비뼈는 좀 소중한데 말입세.."
하고 더듬더듬 느릿하게 말하는 걸 보니 꼭 그 나이대 학생이 잔뜩 장난쳐놓고 다시는 안 나대겠다 하는 느낌과도 같았다. 그는 뭘 하고 있었냔 질문에 대수롭지 않은 양 안은 팔을 움직여 홀로 팔짱을 꼈다. 그에게선 여전히 매운 향기가 난다.
"글쎄..이걸 뭐라고 하지? 운동? 산책? 하여튼 초콜릿이라도 사서 돌아갈까 했는데 자네가 보인지라."
그렇게 장난스러운 사람이 아니라면서 그걸 수업 때 은근히 물어보려 했다는 말이 그녀의 신경줄을 건드린다. 송진 듬뿍 바른 활로 팽팽히 당겨진 신경줄을 긋는 듯한 감각이라고 할까. 말 그대로 은근하게 건드리려 했다는 해석이 들어 짜증을 더 내야 할지 아 그러세요 해야 할지 순간 고민이 들었다. 찰나의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한마디만 하자, 였다.
"퍽이나요."
갓 깨진 유리창의 단면 같은 대답이었다고, 후에 그녀는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더 화를 내는 건 관둔 그녀가 툭 하니 내뱉은 말이 의외로 발렌타인의 내심 어딘가를 찔렀나보다. 말없이 응시해오는 시선을 마주해보니, 흐응, 그런 식으로 갈비뼈가 부러진 적이 있었던 걸까. 조용히 양 팔로 감싸는 모습을 보고 흥미를 가진 듯 눈이 가늘어진다. 그러면서 제 갈비뼈는 소중하다던가 하는 말에, 킥, 하고 혀를 차듯 웃고 한마디를 보탰다.
그렇다. 방금은 그녀가 멍하니 있었기에 그냥 깜짝 놀란 걸로 끝났지, 아니었다면 어깨에 손이 닿는 순간 낚아채 그대로 지면에 내쳤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랬다면 절대 갈비뼈 하나로 안 끝났을테다. 그렇게 되기 싫으면 조심하라고 주의 아닌 주의를 주던 그녀가 공기를 타고 온 향에 코를 실룩였다. 코끝을 스치는 매운 향. 그녀는 이 향을 알고 있었다. 여전한가보다 생각하며 뭐하냐는 물음에 대한 답을 듣다가 에? 하고 조금 얼빠진 소리를 냈다.
"에? 선배가 운동을?"
흐름상 산책이 더 맞는 표현이었겠지만 그녀에게는 그가 운동이라는 단어를 꺼낸 것 자체가 놀라웠나보다. 그대로 발렌타인의 전신,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를 싹 훑더니 진심이냐는 눈으로 빤히 바라본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고, 잠깐이었다. 곧 평소에 가까운 표정으로 돌아와 하다 만 말을 잇는다.
"이제라도 몸 챙기고 살 생각이 들었다면 뭐, 나쁘지 않죠. 트레이너가 필요하면 얘기하세요. 10살짜리도 할 수 있는 코스로 기초 단련 시켜줄게요. 그리고 초콜릿 하니까 생각났는데-"
잠깐, 말을 끊은 그녀가 슬쩍 팔을 들어 메고 있는 가방 안을 본다. 뭐가 들었는지 확인하는거 같다. 그리고 다시 발렌타인을 보고 입꼬리를 씨익 올리면서 하는 말이,
"저번에 드린 것들은 어떻게, 마음에 드셨을려나요? 사탕은 유용하셨는지?"
맛있었냐 보다 그 용도가 쓸 만 했느냐고 묻는 의도가 정말 짖궂기 그지 없었다. 마치 그저 먹기만 하지 않았을 걸 다 안다는 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