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내게 말했다. "인간은 독선적이야. 자기가 하고싶은데로 움직이고 그게 이뤄지지 않으면 화를 내곤 하지. 자신이 왜 실패했는지보다 일단 자신이 기분 나쁜 것에 분노를 해. 그리고 뒤에야 그것을 알고 움직이는 듯 하지." 그는 꽤 심각한 인간 부정에 빠진 듯 보였다. "그래? 그렇지만 모든 인간이 그렇다면 그런 이들이 나타날 수는 없었을거야. 모든 인간의 죄를 뒤집어 쓰고, 언덕을 오르며 죽을 길로 걸어간 인간도 있거든.", "그건 거짓말일거야. 분명 인간놈들은 그런 희생따위 신경도 쓰지 않았을거야."그는 내 말에 투덜거리면서도 꽤 관심이 있는 듯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그런 인간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인간들도 천천히 달라지고 있는 거겠지. 난 인간을 싫어하는 너를 이해하면서도 인간의 좋은 점까지 부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그는 내 말을 끝가지 들어주었다. 그러곤 웃기지도 않는다는 듯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터무니없는 박애주의자 같으니라고." 별로 다른 것은 없었지만 나는 그의 말에 웃어주었다. 마지막에는 인간성애자같은 말이 나오지 않은 것이 어디냐고 생각하면서. - 필립 헨딜, 수정구 속 세상
휘황찬란한 조명과 화려한 무늬의 붉은 카펫, 그리고 보색대비를 이루는 녹색 테이블과 총천연색의 슬롯 머신. 웨이는 카지노에 발을 딛고 서 있었다. 여기가 어디인지, 왜 자신이 여기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나이 때문에 여러 번 거절당한 경험이 있으므로-, 재산과 희비극이 끊임없이 사람들 사이에서 돌고 도는 공간의 분위기 자체에는 꽤 익숙했다.
웨이는 룰렛이 돌아가는 테이블 앞에 앉는다. 룰렛에도 역사 이래 카지노에서 일확천금을 꿈꾸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확률을 따져 가며 세워 둔 배팅 전략이라는 게 존재하지만, 웨이는 그런 것쯤은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마음 가는 대로 숫자 하나, 혹은 두 개를 고르고 기다릴 뿐이다.
도박이란 결국 사람의 정신을 혼란스럽게 하는지라, 도박을 손에서 쥔 적도, 놀이를 즐기려 한 적도 적었다. 그것도 단지 들어오는 것 만으로도 충분한 대가를 치르었다 말하며 수많은 칩을 쥐여주는 이들의 모습은 지극히 분주하면서도 또 차분한 모습이 어색한 기분을 들게 했다. 손에 쥐었던 검들이 오늘은 없었고, 마음을 짓누르던 것들이 훌훌 털어져 하나도 남지 않은 것 같았다. 단지 그렇게, 에반은 자신의 마음을 놓아갔다.
룰렛은 한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수많은 욕망과 미남, 미녀들 앞에서 그들은 일확천금을 노리고 소릴 질렀다.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룻렛마저도 그의 눈에는 한없이 느린 속도였다. 아쉽게도 그의 육체는 여하의 인간과는 궤를 달리하고 있었다. 조용한 한탄을 내뱉고 누군가가 준 음료 한 잔을 쥔 채로 에반은 천천히 고갤 돌려보았다. 그리고, 누군가가 눈에 들어왔다. 차가운 한기를 지닌 소녀였다. 키는 큰 듯 했고 투박한 형태의 손을 가지고 있었다. 그 손끝은 다루는 기술의 영향인지 살짝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런 한기를 본인은 아는지, 아니면 모르는지. 아무렇지 않은 듯 했지만 이 열광적인 카지노 속에서도 그 주위만큼은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참으로 이상한 이치였다.
" 별로 돈을 바라진 않는 모양이군요. "
에반은 고요한 목소리로 웨이를 지켜봤다. 두 손에는 돈을 걸었다는 종이를 쥐고 있었지만 그 눈빛은 룰렛의 추가 향하는 곳보단 룰렛 전체에 눈을 주고 있었다. 다른 바라는 것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처럼 조용한 이치를 띄는 모습이 신비로웠다. 꼭 어린 시절의 유스티시아를 보는 것만 같았다. 물론 유스티시아는 온기의 빛을 다루었고, 이 아가씨는 차가운 바람을 다루고 있었지만 말이다. 에반은 조금 자신의 의념을 허공에 흩뿌렸다. 순식간에 주위 공기가 무겁게 진동했고 수많은 기기가 이상현상을 발했다. 몇몇 손님들은 얼굴이 푸르게 변한 채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단지 조금의 실력을 보인 것만으로도 이곳의 분위기를 휩쓸어버린 것이다. 물론 에반에게 이들을 붙잡을 마음도, 아니라면 강제할 마음도 조금도 없었다. 어디까지나 일분의 여흥을 위하여 오지 않는 곳에 왔을 뿐이고, 상대에게 자신을 알리는 것으로 조금은 긍정적인 이야기를 끌어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단점이 있었다면, 100레벨 이상 차이나는 웨이가 그 의념을 느낀 것은 개미에게 드래곤이 안녕? 하고 인사한 것과 다르진 않았겠지만.
정보 1. 에반 보르도쵸브가 자신의 의념 일부를 허공에 흩뿌리는 것은 상대방에게 자신의 정체를 알리고, 자신이 상대를 위협할 의도가 없음을 알리는 것이다. 오히려 너무 강한 의념을 가지고 있어 의념을 제약하기 시작한다면 약한 각성자는 의념을 사용할 수 없게 되므로 상대방이 의념을 사용할 수 있을 정도의 의념을 풀어 자신의 정체를 알리는 것이기도 하다. 정보 2. 에반의 각성 이전 직업은 수도사였기 때문에 그는 도박에 관련된 부분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 정보 3. 저 카지노는 코인샵을 통해 방문 가능한 카지노가 맞다. 에반이 지급한 대가는 '자신이 카지노에 방문했다는 것.'
에반이 그렇게 말했듯이 웨이는 손에 쥘 수 있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 룰렛을 고른 것이 아니었다. 한때는 여비를 충당하기 위해 판돈이 오가는 내기에 참여했던 적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웨이에게 있어 그것은 즐거움을 제1의 목적으로 하는 놀이였다. 그러니-그것만이 이유는 아니겠지만-소용돌이치는 욕망과 탄성 속에서 웨이가 유리된 것처럼 보이는 것도 당연한 일이리라.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느리게 돌아가는 룰렛 속 구슬의 궤도를 웨이는 눈으로 좇았다. 들어갈지, 들어가지 않을지는 아직 모른다. 그러나 만약 이대로라면…
그 순간, 공기가 움직였다. 쿵, 하는 감각이 청각인지, 시각인지, 아니면 촉각인지 알 수 없었다. 슬롯머신은 덜컥 멈추거나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맹회전하며 구슬을 줄줄 쏟아내고, 주변의 사람들 중 몇은 스위치라도 꺼진 것처럼 바닥으로 무너졌다. 의념이다, 하지만 무슨? 웨이의 정신이 경종을 울렸다. 웨이는 고개를 천천히 돌려 압도적인 존재의 근원지를 찾는다. 그가 있는 곳은 멀지 않았다.
가벼운 소음이 있고 나서 에반에게는 당연하다는 듯 의념 억제용 팔찌가 쥐여졌다. 그것을 팔에 묶어봐야 간단히 폭발해버려서, 그는 자신의 의념을 억누르는 것으로 일을 대신했지만 말이다. 자연스럽게 이 작은 카지노의 의념은 에반이 스스로를 억누르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억제되어갔다. 의념 지수를 측정한다면 한없이 0에 수렴할 것 같은 상황 속에서 에반은 고갤 돌려 자신을 바라본 소녀의 질문을 들었다. 들어오면 안 되는 곳, 당황한 듯 보이는 표정까지 영락없이 오해를 산 모양이었다. 천천히 살펴보았더니 의념의 흐름이 그리 두텁지 않고 얇았다. 기술의 수준도, 성장도 아직 완전히 무르익지 않은 듯 보였다. 가장 최근에 만났던 것이 지훈이였기 때문일까. 그는 자신의 의념을 너무 만만히 보았구나 생각해 쓴 미소를 지었다.
" 그럴리가요. 제가 이 곳의 주인도 아니고요. "
쓴 미소라고 표현하였지만, 그것은 꽤 부드러운 미소였고. 또 괜찮은 미소였다. 조금 듬성한 수염들을 두고 미소를 지은 에반의 표정은 썩 부드러운 분위기를 만들었다. 금새 수습되어 돈을 걸고 도박을 시작한 이 곳의 분위기를 두고 에반은 손을 들어 음료를 하나 더 주문했다. 곧 나온 것은 밀알을 가루내어 차로 만든, 별 맛이 느껴지지 않는 텁텁한 밀차였다.
" 많은 사람들이 돈에 열광하고, 사람에 열광하는 모습 속에서 관심보다는 관찰을 하는 사람은 흔치 않은 법이니까요. 수중에 돈이 많아보이진 않지만, 큰 돈을 바라지만은 않는 듯 보여 흥미가 동했을 뿐입니다. "
그는 차 한 모금으로 마른 입을 축여내고 신사적인 인사를 올렸다. 두 팔은 자연스럽게 굽혀졌고 가볍게 숙인 고개에선 짙은 환영의 분위기가 났다. 진심으로 미안한 듯, 에반은 천천히 말을 꺼냈다.
" 소개가 늦었군요. 제 이름은 에반 보르도쵸브라 합니다. 부족하나마, 사람들은 저를 검성이라는 호칭으로 부르더군요. "
의념 억제용 팔찌라는 도구가 저렇게 허망한 물건이었던가? 식견이 좁은 웨이의 눈에도 썩 그렇게 보이진 않았다. 마치 교실에서 신나게 떠들다가 선생님이 들어왔을 때처럼 착 가라앉은 의념과 분위기가 오히려 웨이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아, 아하하... 저는 완전히, 쫓아내려는 줄 알고…”
그의 미소가 아니었더라면 웨이는 아직까지도 초긴장 상태에 있었을 것이다. 그래 봤자 피해서 도망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놀람으로 경직된 자신의 얼굴에 온기 있는 미소가 다시 떠오를 때, 사람을 앞에 두고 이렇게까지 굳어져 본 경험은 손에 꼽는다고 웨이는 생각했다. 카지노는 다시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알코올도 아니고 주스도 아닌 차를 주문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야 웨이는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음, 이런 곳에서 돈은 얻기 어려우니까요? 사람 대 사람이라면 모를까, 이런 큰 카지노는 함부로 들어갔다가는 큰코다친다고 주변 어른들도 그랬고.”
돈도 좋지만 재밌게 노는 게 더 좋으니까요. 에반이 올린 신사적인 인사를 처음 받아보는 웨이는 조금 당황했다가, 이내 평소처럼 고개를 숙여 목례했다.
“저는 웨이에요, 유웨이!”
웨이가 에반의 자기 소개를 듣고, 자신의 이름을 댄 후 잘 부탁드립니다! 하고 쾌활하게 인사를 마칠 수 있었던 건 검성이라는 칭호의 뜻을 한 박자 늦게 이해한 덕분이었다. 여기에 와서 배운, 영웅 중에 한 사람? 정말 그 사람이 맞다고? 놀람을 감추지 못한 눈동자가 좌우로 흔들렸다.
“…저야말로 부족한걸요!”
당연한, 그리고 실없는 말이 덧붙었다. 룰렛의 추는 진작에 멈췄지만, 웨이는 결과를 확인할 마음 따위는 들지 않았다. 잭팟이 바로 눈앞에서 살아숨쉬고 있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