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민은 궁금했는지 작게 물었다. 넓은 집에서 일 할 수 있는거야 가정부 말고 또 있나 싶다. 하기야 자신은 부자가 아니니 모르겠지마는... 코스튬을 챙겨본 적이 없다라. 오호라, 그렇다면 이 참에 코스튬이나 몇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성 싶었다. 물론 자기가 사주는 건 아니고. 내가 고작 세 치되는 구매 욕구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사람이다. 흐흐, 충동 구매와 과소비의 단 맛이 무엇인지 쬐끔만 알려주지... 아주 못돼먹었다.
"이, 이 옷은...! 집에서 제일 편하게 입고 올 수 잇는 옷으로..."
사민은 변명하든 꾸물거렸다. 묘하게 투덜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니 뭐, 직장도 아니고 집 앞-좀 많이 걷긴 했다-좀 나도는데 챙겨입을 필요가 있나 싶었다. 역린을 찔린듯 사민이 입을 삐죽이며 얼굴을 붉힌다. 그도 잠시, 사준다는 말에 활짝 피어서는 쫄래쫄래 연우 곁에 붙는 것이었다. 이쯤 되니 간신으로서의 역량이 충분하다. 불쑥 팔짱을 끼려고 하며 감언이설을 내뱉는다.
"대박이다. 저 누구한테 옷 선물 받는 건 또 처음이에요. 역시 선배는 마음도 바다같이 넓으시고 통도 크시고 얼굴도 훤하시고 빠지는 거 하나 없네요. 최고예요. 짱!"
그녀는 어머니에 관해서라면 꽤나 느슨해지는 성격이었으므로. 항상 어머니에게 경호원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까이고를 반복하는 느낌이었습니다. 당연히 그녀의 어머니가 뭐 위험한 일을 하는것도 아니긴 했습니다만.. 그래도 그녀는 항상 불안해했죠. 마침 당신이라면 비서일이나 경호원일을 동시에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한걸까요. 그녀는 농담이긴 했어도 또 완전히 헛소리는 아닌듯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미소지었습니다.
"하지만 날씨가 춥잖아요? 조심해야죠."
건강도 그렇지만 혹시 나쁜 사람을 만날수도 있지 않냐며 그녀는 작게 핀잔을 줬습니다. 워낙에 말투가 사근거려서 핀잔이 핀잔같이 안 들릴지도 모르지만 그녀 나름은 꽤나 힘줘서 혼낸(?)겁니다. 그녀는 익스퍼들은 묘하게 안전에 둔감한 느낌이 있는거 같다고 말하며 당신을 바라봤습니다.
"별것도 아닌걸요."
갑자기 칭찬을 늘어놓는 당신의 말에 왜 그러지? 하는 느낌으로 그녀는 미소지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신과 팔짱을 낀채 옷가게들을 슬쩍 둘러본뒤 다시 당신을 바라봤죠.
일단 사민의 입장에서 '어머니 = 엄함' 이라는 공식이 한켠에 자리잡고 있었다. 게다가 비사에 경호원이라니 경찰보다 더 빡빡하게 살아야할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사민의 표정이 급격히 안 좋아졌다. 나는 그냥 적당히 한량처럼 청소하고 붕어 밥이나 먹여주고 강아지 있으면 산책... 사민이 슬쩍 묻는다. "집에 혹시 반려견이나 반려묘가 있나요?" 얼핏보면 실없는 질문이지만 무척 중요한 문제였다. 회사 복지 차원 관련이라 할 수 있겠다.
"으음, 그래도 후리스는 따뜻한 걸요. 평소에는 좀 더 차려 입고 와요."
윽, 나 혼난건가? 사민은 기분이 미묘해져서 턱을 잠시 만지작거렸다. 평소 혼나는 강도를 생각하면 또 그렇게 혼난 것 같지도 않고... 이게 바로 직장인들이 받고는 한다는 연상 선배에게 상냥하게 혼나기 같은 걸까? 오호라, 사민이 변명을 하다말고 가자미 눈으로 툭 내뱉었다. "근데 평소에도 이렇게 혼내요?" 굉장히 직장인 같고 멋있다라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저는...... 음, 사실 인터넷 쇼핑을 자주해서 말이에요. 이렇게 나와본 적은 별로 또 없네요. 선배 자주 가시는 곳 있으면 따라 갈게요."
실로 그랬다. 사민이 자주 옷시키는 곳이야 인터넷 쇼핑몰일뿐 백화점에 들어올 정도로 큰 브랜드는 아니었다. 백화점에서 옷을 사봤자 학생때 옷 뿐이었으니 따로 찾아가기도 뭣했다.
그녀는 어머니 옆에만 있어주면 될거라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허들이 높은가봅니다. 당신의 말에 그럼 다른걸로 해야하나.. 생각하다가 갑자기 반려묘 이야기가 나오자 그녀는 눈을 깜박인뒤 대답했습니다. 일단 현재 고양이 한마리를 키우고 있다고 말이죠. 갑자기 반려동물 이야기는 왜 물어본걸까요?
"으음- 그럴리가요."
당신의 변명 아닌 변명을 듣던 그녀는 평소에도 혼내냐는 말에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녀는 남을 잘 혼내지 않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후배는 보통 선배 안 혼내요."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답했고. 오늘은 휴일이니까 연상으로서 혼내는거라며 덧붙였습니다.
"그런가요. 그럼 너무 부담되지 않는쪽으로 가볼까요."
어차피 지금 입을 옷을 살거니까 갑자기 양복을 고를 생각도 없었지만. 그녀는 비교적 가벼운 스타일에, 범용적으로 입을만한 옷이 많은 브랜드로 들어갔습니다. 지금도 위에는 따뜻해보이니 일단은 바지만 보강하면 될거 같은데..
공항은 소란스럽다. 늘 안전에 주의를 기울이는 보안 요원들, 비행기 시간이 늦을까 뛰어가는 가족, 소리높여 웃고 떠드는 학생과 불안한 눈치로 핸드폰과 뒤를 쳐다봐 누가 봐도 일행을 기다리는 것 같은 사람까지. 각양각색의 사람이 모여있는 그 장소에서 애쉬는 가만히 서 이번에 자신 대신에 위그드라실에서 일할 후임을 기다렸다. 짧지 않은 시간이 지나자 수많은 사람이 캐리어를 끌며 나온다. 그중 유독 눈에 밟히는 사람이 있었다. 애쉬의 대자代子 퍼디난드다. 그새 또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앞머리 양쪽을 한가닥씩 백금색으로 탈색하고 사과머리로 대롱 묶은게 멀리서도 보였다. 캐리어는 파스텔 옐로, 덕지덕지 붙은 스티커는 유니콘과 스폰지밥. 거기다 옷차림은.. 애쉬는 커다란 미러 선글라스를 쓰고 롱치마를 휘날리며 걸어오는 저 아이가 자신을 모른척 하는 바람이 들었다.
"아-!! 리리!!! 마중 왔어요?"
어쩜 저렇게 한결 같이 내 말을 들어먹지 않을까? 애쉬는 한숨을 쉬었다.
공항 내부의 스타벅스에서 퍼디난드는 우유를 두유로 바꾸고, 자바칩을 최대치로 추가했으며, 휘핑은 에스프레소로 바꾼 자바칩 프라푸치노를 주문했다. 점원도 많이 달 텐데 괜찮겠냐는 질문을 했지만 퍼디난드는 잠시 고민하다 빠진게 있다며 카라멜 드리즐을 추가했다. 이후 자리에 앉아 점원을 갈아 만들어 무시하지 못할 칼로리의 설탕 덩어리를 아무렇지 않게 쭉 빨아마시는 모습에 애쉬는 몸서리를 치며 아메리카노를 덩달아 들이켰다. 보기만 해도 혀가 아팠다. 퍼디난드는 빨대에서 입을 떼곤 의자에 푹 늘어졌다.
"아, 이제 좀 살 것 같아요." "그러다 병 생긴다고 말했을 텐데." "괜찮아요! 병 생기는 건 리리가 아니라 나예요." "퍼디난드." "그치만 이거라도 먹어야 좀 머리가 돌아간단 말이에요. 오는 내내 머리가 띵해서 못 참겠더라고요." "설마 비행기 안에서도 술 마셨니?" "원래 하늘에서 마시는 와인이 좀 각별한 법이잖아요, 이번만큼은 눈 감고 넘어가줘요." "기내에서 난동 피우지 않은 걸 다행이라 여겨야겠구나." "나 참! 리리는 날 어떤 사람으로 보는 거야." "제멋대로에 말썽쟁이지. 넌 평생 트러블 메이커야." "정말이지! 나빴어."
퍼디난드는 툴툴대며 핸드폰을 주머니에서 꺼낸다. "아! 커피. 사진 찍는 걸 깜빡했네. 어쩐담?" 투명 케이스 너머로 끼워둔 사진이 보이자 애쉬는 질색했다. "제발 그 사진도 좀 바꾸고!" 퍼디난드는 선글라스를 머리 위에 걸쳐두더니 아이폰을 휙 뒤집어 사진을 확인했다. 애쉬와 함께 찍은 사진이다. "싫은데요, 리리랑 디즈니랜드에서 찍은.." 애쉬를 흘끔 바라본 퍼디난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맙소사, 리리!"
"살이 왜이렇게 빠졌어요?!" "난 그대로거든." "무슨 소리예요? 이 사진을 좀 보세요. 다른 사람이잖아!"
퍼디난드가 아이폰 뒷면을 애쉬의 코 앞에 갖다댔다. 너무 가까워 초점이 도저히 맞지 앉자 애쉬는 손을 뻗어 핸드폰을 뒤로 밀어냈다. 이제 보니 조금 살이 빠진 것 같기도 하다. 사진 안에선 강아지 같던 인상의 애쉬와 퍼디난드, 그의 누나 나탈리가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속의 애쉬는 강아지 머리띠가 어울렸다. 지금은 고양이 머리띠가 더 어울릴 것이다. 퍼디난드는 "봐요, 지금은 강아지 같은 모습이 하나도 없다고요! 귀엽던 리트리버가 도베르만이 됐어! 경찰견은 이젠 질색인데!" 하고 불만을 토로하더니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내려뒀다.
"아! 리리, 이번 직장은 좀 고됐나봐요!" "음, 그렇게 고된 일은 아니야. 살인 사건도 드물지, 마약류 단속도 우리 몫이 아니지.." "어? 그러면 총기 사고도 없어요?" "여긴 총기 소지가 불법이지." "적어도 머리 날아간 시체 볼 일은 없겠네! 좋다. 안 그래도 여기 오기 전에 랩에 둘둘 말린 시체를 봤거든요. 진짜 변태 같았어. 으!" "고생이 많았겠구나."
퍼디난드는 허리를 뒤로 쭉 꺾고 기지개를 켰다. 아무리 1등석 의자가 편하다고는 해도 장시간 비행은 지친다. 퍼디난드가 다리를 몇번 구르다 고개를 내렸다. "고생하진 않았죠. 아, 맞다."
"리리, 나 직장 분위기랑 사람들 얼굴도 좀 보고 싶어요." "청해시로 가면 볼 수 있을 거야." "지금 보고 싶은데." "출발하잔 소리니?" "아뇨."
퍼디난드는 몸을 일으켰다. "지금 보고 싶다구. 나 절대 피하면 안 돼." 테이블 너머로 손을 쭉 뻗은 퍼디난드는 애쉬의 양 볼을 손으로 움켜쥐곤 그대로 당겼다. 엎어질뻔한 아메리카노 잔을 겨우 사수한 애쉬는 두 눈을 마주치자 눈을 질끈 감았다. "퍼디난드 테이 베르너. 내 기억 읽지 마." 단호한 목소리에 퍼디난드는 재미 없다는듯 손에서 힘을 빼곤 다시 자리에 털썩 앉았다. "이미 손 닿은 시점에서 다 봤어요. 놀리는 것도 못해!"
"딸, 이번 건 조금 심했구나." "오, 미안해요 리리. 그래도 궁금했단 말이야." "맙소사, 어쩌다 너도 이런 능력을 가지게 되어선!" 애쉬는 들릴듯 말듯 작게 불만을 토로했다. "어쩌겠어요? 극작가의 시나리오가 그렇다는데."
퍼디난드는 빨대로 다시금 프라푸치노를 휘휘 젓더니 이젠 컵째로 쭉 들이켰다. 얼음 덩어리도 망설임 없이 벌컥 들이키고 컵을 내려놓으니 벌써 반절이 줄어있었다.
"그래도 이번 직장은 재밌어보이긴 하네요. 분위기도 떠들썩 하고, 사건에서 범죄자가 윗사람을 공통적으로 신이라고 믿는 것도 그렇고. 우리가 상대할..그러니까, 그..이상한 또라이들이 사이비 종교는 아니고 우상화겠죠?" "그럴 가능성이 크지. 아마 힘 때문일 가능성도 높을 거고." 애쉬는 적당히 식은 커피를 한모금 마셨다. "다음 사건은 누구로 고르고 행동해야 할지 대가리 굴리는 소리 여기까지 나네. 아! 머리 쓰는 건 싫은데." "어차피 쓸 일도 없을 거란다. 가만히 있으면 팀원들이 알아서 해줄 테니." "그거 다행이네." 퍼디난드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봤다.
신은 종종 번화가 한복판에 있는 것을 즐겼다. 자본을 대변하는 드높고 세련된 빼곡하게 들어찬 건물들. 낮의 분주도 좋지만 밤의 혼란도 나쁘지 않다. 눈을 아리게 하는 색감이 예쁘게 들어차서는 말이다. 구석이란 구석 전부가 유해한 연기고 한껏 멋을 준 꾸밈새고 공기가 조금 어둡다고 저조차 감춰지는 줄로 착각하고 거침없이 본색을 드러내는 향연이다. 이토록 아찔하도록 밝아 별조차 물러나고 오야를 넘어선 하늘은 아침에 비할 만큼 희어졌는데도 말이다. 신은 필터를 향해 질주하는 불씨를 매단 궐련을 손가락에 끼운 채로 뚫어져라 하늘을 노리던 시선을 느릿느릿 수평으로 내렸다. 감디감은 피로한 눈이다. 평소 본업의 의무를 뒤 구린 일 손톱만치도 없게끔 성실히 하느냐면 진솔하게는 아니나 금시로 말할 것 같으면 본업이 존재하지도 않는다. 신은 너절해져 고작 한두 넓이 종이테이프에 의존해 뺨에 간신히 매달린 거즈를 잡아채 겉옷 주머니에 쑤셨다. 휴가가 시작할 때즈음엔 부기가 가라앉은 뺨이 어쩐지 새로운 부종과 함께 상처를 여럿 단 성싶었다. 신은 무릎 굽혀 앉은 자세 그대로 태연히 턱을 괴었다. 아무것도 없이 새까만 눈은 어떤 신호도 비치지 않지만 신이란 사람 전체가 시사하는 공기는 이른바 '무의의'였다. 어떤 일에도 가볍고, 초탈한 인품이었다. 지금도 보아라, 실눈에 가깝게 반눈을 떠선 알 수 없는 가락을 더듬더듬 흥얼거리다가 담배 연기를 삼키고 뱉고 잿덩이를 튕기며 말이다.
"으-음, 배고파 죽겠다..." 지금껏 뒷사람이 간만의 일상에 신나하며 주절거리던 모든 묘사를 단 한순간에 무색케 하는 깨는 한마디나 웅얼거리는 것이었다. 이곳은 가맣되 새하얀 번화가요, 그중 깊숙하다 가히 이르는 곳이요, 어느 얼뜨기가 모종의 연유로 몇 대간 얼굴에 맞은 상을 하여 구석에 쭈그려 앉아 부질없는 담타를 때리는 머저리의 공간이기도 하다. 그 어느 얼뜨기가 담배를 지져 끄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턱을 짚고 사뭇 진지하게 곰곰한 고민의 시간을 가지는 듯싶던 다음의 일이었다. 최후의 양심인지 꽁초는 얌전히 빈자리 많은 담뱃갑에 던져 넣고 저벅저벅 길거리 한가운데 전진했다. 여기서부터 이미 얌전히가 아니다. 기꺼이 한술 더 떠주랴?
"얼굴 한번 죽여주는 낯선 사람 술과 안주 사줄 사람-!!"
한 손 입가에 외치려는 듯 가져다 대고 실제로 번잡한 길거리 한복판서 그리 외친다. "술과 안주만 사주면 잘생긴 얼굴이 공짜~~~!" 엎친 데 스스로 덮쳐 버리며 누군가 미친 사람 보듯 하면 뭐가 문제냔 듯 초연한 무표정으로 응수한다.
//접때 활용하려던 일상 상황...다시 쓰기만 해서 고스란히 들고 왔음.......(생각보다도 늦은 사실에 얌전히 머리박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