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지 부리기는. 어쩜 이리 자존심이 강한지 모르겠다 생각하며 이 한참 어린 맹랑한 아이를 가만히 쳐다본다. 아무리 나이차 신경쓰지 않는다 하더라도 8살 차이면 달라지기 마련인데도 이 아이는 자존심 하나 굽히지 않겠다 이리 나오는 것이니. 산전수전 다 겪고 살아왔던 그가 재밌다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다.
"나 잡아가면 안 되는데."
나 잡아가면 슬플 거야, 그렇지? 입술 벙긋거리고 눈 접더니 입꼬리 살풋 올리자 새하얀 치열 드러난다. 우리 알데가 아저씨 잡아가면 면회도 안 와줄 것 같은데. 그런 시덥잖은 소리 한번 지껄이곤 굳는 표정 가만히 쳐다본다. 음, 어쩔까. 고민하듯 쳐다보곤 벽에 기댄 등 더 눌러내며 히죽 웃는다.
"음."
그리고 침묵. 어른의 장난도 이쯤 해둬야겠거니 싶어 그는 손가락으로 연초 툭툭 쳐 재 털어내고 필터까지 얼마 남지 못한 것 입가에 가져다댔다. Du bist stur. 짧게 중얼거리곤 마지막 연기를 뱉는다.
"좋아, 아저씨가 졌어요."
패배를 선언한 뒤로는 손가락 사이로 엄지 밀어넣어 연초 바닥에 툭 떨구고 즈려밟았다. 다시금 알데바란 쳐다보니, 이정도면 됐죠? 라는 눈치였다.
간만의 휴가는 꿈결 같다. 그동안 눈여겨보던 카페도 가보고, 바닷가를 산책하다 집에 들어와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웠다. 그야말로 천국이었다. 노트북을 펼쳐 간만에 자판을 두드렸다. 이것저것 작성하다 보니 일정한 간격으로 핸드폰이 진동한다. 이 꿈과 같은 시간을 산산조각 내듯 전화가 왔다. 누굴까? 일 관련된 전화만 아니었으면 싶었는데 익숙한 번호다. 그는 능숙하게 저장 버튼을 누르고 노트북을 덮어버린다. "hello?" "hello는 무슨." 핸드폰 너머로 툴툴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노트북을 한 손으로 조심스럽게 들어 몸을 일크기더니 팔을 쭉 뻗어 테이블 위로 올려두고 그대로 다시 누워버렸다. 짧은 시간동안 답이 없자 수화기 너머로 "나 리리가 말 안 하는거 다 알아요." 하고 협박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는 그제야 툭 뱉었다. "Sir라고 불러야 할 사람에게 말이 제법 심해." "뭐래. 마녀라고 안 부르는 걸 다행으로 여겨요." 너머로 툴툴대는 목소리가 토라져있다. 예전에 한번 장난 쳤을 때도 이랬던 것 같은데, 무슨 일일까? 그는 눈을 내리감고 달래듯 물었다.
"그래, 우리 딸. 안식년이라고 해도 경찰인 건 같은데 존경심은 어디에 팔아먹었담?" "나- 존경심이고 뭐고 지금 진지해요." "뭐 때문에 그럴까? 조언 구할게 필요하니? 숙제 때문에?" "아-니야!! 나 이제 어른이야!" "어쩜 어른이 이렇게 말한다니." "나빴어 진짜. 어떻게 바로 전 페이지까지 살아있던 사람이 다음장 넘기자마자 죽을 수 있어요?" "맙소사!"
불만 섞인 아우성에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 맹랑한 것. 고작 이것 때문에 전화를 걸었다 이 말이지? 그는 천장을 바라보다 몸을 굴려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게 범죄 소설의 매력이지. 슬슬 받아들여야 하지 않아?"
"난 못 받아들여요, 리리!" "지금 항의하는 거야?" "응. 항의하고 있어요. 이건 말도 안 돼. 나는 엘리제를 사랑하고 있었다고요. 검은 머리를 가진 엘리제는 오늘 몸에 붙는 검은색 드레스를 입었다. 그녀는 윈터 포멀 파티의 여왕이었다. 푸른 눈동자가 가는 자리마다 잔상을 남기는 것 처럼 눈부셨다..여기서 얼마나 사랑을 느꼈는 지 알아요? 검은 머리에 푸른 눈동자라니! 거기다 검은색 드레스라니! 분명 백설공주처럼 눈부시게 예뻤겠죠?" "오, 어쩐담. 희생자를 사랑해버려서. 출간한지 5년도 넘어서 엔딩도 못 바꿔요, 딸." "진짜 짜증나! 이건- 꼭, 펜트하우스 같아요! 내가 다음장을 넘겨보면- 다 죽어있어!" "세상에, 딸. 그런 드라마는 어디서 챙겨봤니? 그런거 보면 못써." "나 어른이라니까! 올해로 스물 셋이야!" 수화기 너머로 빽 지르는 소리가 난다. 그는 귀를 틀어막고 소리내 웃었다. "한참 애구만!" "리리 진짜 나빠." "응, 우리 딸도 나빠. 딸 얼굴 보고싶은데 공항 마중도 안 와주고." "그때 WWE 경기가 있었단 말이에요! 나는 응원 꼭 가야 했단 말이야." "아빠 얼굴보다 중요해?" "진짜 아빠도 아니면서!" "그러니까 누가 딸 하래?" "리리가 먼저 했잖아! 그리고 딸도 아니야! 나는- 아들이라고, 아들! 리리 진짜 짜증나." "뉴욕은 어떠니?"
잠깐의 침묵. 머뭇거리다 수화기 너머의 청년이 웅얼거렸다. "여기는 늘 똑같아요. 그래서 토할 것 같아. 조금이라도 더 있다간 미쳐버리고 말 거야." "어쩔 수 없어, 언젠가는 익숙해져 있을 거야." "이런 일에 익숙해지긴 싫어요." "오늘도 사람을 쐈니?" "응." "힘들겠구나." "투항하라고 했는데 총기를 꺼내서 쏠 수밖에 없었어요. 왜 사람들은 우리 말을 안 들을까? 죽을 걸 뻔히 알면서도, 싫증 나." "그게 사람이란다. 인생이기도 하지." "구역질이 나. 토할 것 같아. 멀미가 나! 평생이고 잊을 수가 없을 거고, 사람들은 이해도 못 해줄 거야! 못 겪었으니까. 다들 우리를 너무 철옹성으로 알아! 우리도 사람인데. 리리도 이랬어요?" "물론이지. 사실 지금도 토할 것 같아." "..프리드도?"
그는 눈을 감고 남편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 사람은 늘 그랬지. 집에 돌아오면 늘 내 품에서 울었어." "리리, 리리는 만약에 그 사람을 다시 만나면 어떻게 할 거예요?"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에 그는 잠시 침묵했다. 만약 그 사람을 다시 만나면 어떻게 해야할까? 그는 침묵했지만 망설이지 않았다. 잠시 숨을 들이마시고 그가 속삭였다.
"쏴죽일거야." "역시 리리가 마녀라고 불리는 이유가 있어." "어쩌겠니. 다음 페이지에 엘리제를 죽여버릴 정도인 걸." "진짜 나빴어." "응, 딸도 나빴어." "아들이라고!" "그래, 딸. 아빠 끊는다." "짜증나!"
끊으려 했더니 전화가 먼저 끊겼다. 그는 나직하게 웃음 한번 뱉고는 그대로 핸드폰을 뒤집어 무음으로 둔다. 그 사람을 다시 만나면,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설령 나를 사랑한다 할지라도. 그에게 더이상 사랑은 필요가 없다. 아, 차라리 멀리멀리 도망쳐버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