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난장판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그는 때를 놓칠세라 사민의 앞에 떡 버티고 서서는 협상을 제시했다. 말하기 전에 축축해진 얼굴을 옷소매로 슥 닦아내고선 의기양양한 낯짝이 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지금까지 한 행동이 여간 유치한 게 아니라 설득력은 다소 떨어지지만, 그는 제 나름대로 직장에서의 평판과 대인관계를 신경 쓰고 있었다. 어떤 사이가 되든 상관은 없지만 적어도 척을 지지는 말자는 주의다. 본인이 실컷 놀려먹은 사람 굳이 붙잡아 세운 데에도 이유가 있었다.
"먼저 제시하는 거 듣고?"
그러면서도 뺀질거리기는 여전했지만 말이다… 다행스럽게도 사민이 그를 피해 곧장 자리를 옮겨버리지 않는 점이나 대화에 응하는 걸 봐선 응어리가 오래 남진 않을 것 같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보이지 않는 서술의 향연이 둘 사이를 가로질렀다. 한 번의 깝침을 모면하려는 29살과 그를 적법하게 등쳐먹고픈 20살의 두뇌가 맞물려 격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선제는 사민이다. 상대의 눈빛이 진지하게 빛나는 순간까지도 실없이 웃던 얼굴이, 우뚝 솟은 다섯 손가락을 눈에 담자 그 표정 그대로 슬쩍 기울어졌다. 곤란하다는 듯 눈썹만 시무룩이 내려간다. 능청스러운 표정은 그대로라 과장하는 티가 났다.
"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무 솔직한 거 아니야? 마음 넓게 아량의 미덕을 베풀어보는 거 어떨까?"
'소원권'이라는 이름에서부터 김두한도 울고 갈 부당조약이다. 단호한 대답에서 어떻게 해봐도 그것만은 죽어도 안 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그렇다면 어쩐다, 그럴싸한 협상안을 찾기 위해 태만한 머릿속이 빙글빙글 돌았다. 이대로 상대가 안 봐주더라도 손해는 없을 듯하지만 기왕이면 좋게좋게 끝내는 쪽이 좋은데, 즉시 본론을 꺼내기엔 아직 이르다. 그렇다면 정말로 합의하고자 하는 조건은 우선 미루고, 그 역시 임시로 아무 조건을 던져보기로 했다.
아량을 베풀라는 체슬리의 말에 사민의 태도는 완강했으나... 이어지는 말에 막 켜진 전등처럼 얼굴이 밝아진다. 체슬리에 비해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능력이 현저히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사민이 확실히 비열하고 유치하게 구는 구석이 있기는 했지만 막상 그렇게 약은 사람은 아니었다. 사실 사민은 소원권이니 뭐니 거창하게 이름 지었어도 끽해봤자 대신 커피타주기, 편의점에서 초콜릿 사주기따위의 사소한 것들을 사용하는데에 쓸 생각이었다. 그 중 수면위로 떠오른 커피나 밥 5회는 사민 입장에서 이득이었다. 구질구질하게 8000원짜리 김치볶음밥과 8500원짜리 날치알 김치볶음밥 사이에서 고민할 시간이 덜었다는 것만으로도 사민은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으음..."
그렇지만 이런거에 기쁨을 표시해서는 훌륭한 협상가가 될 수 없다. 사민이 현재 발 디딘 곳은 각종 이해관계가 얽히고 섥힌 직장으로 만만히 보여서는 안된다. 냉엄한 표정과 날카로운 눈빛을 기본으로 깔고 고민하는 척을 한 번 해야... 그렇게 생각하는 사민은 확실히 아까보다 밝은 얼굴이었다. 삐질 올라간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내리기 위해 갖은 애를 쓰고 있다만 안타깝게도 표정 관리를 위한 노력은 처참한 실패로 돌아갔다.
"...한 번은 아이스크림으로 대체해요. 저 옆에 새로 생긴 젤라또 집으로."
항상 출근하며 제 눈을 사로잡는 가게가 있었다. 오픈 기념 할인으로 3600원 할때야 가끔 먹었지 할인 이벤트가 끝나자 사먹기에 애매한 가격이 되어버렸다. 딱히 돈이 궁한 건 아니지만 굳이 먹어야하나 싶은 정도. 가끔 기분 나쁠때(예를 들면... 괴물이라 불렸을 때) 사먹어야겠다고 마음 먹은 터라 커피보다는 젤라또가 더 희소성이 있었다.
"이만 올라가볼까요?"
사민은 손을 내밀며 악수를 요청했다. 그러면서 속으로 체슬리에 대한 입지를 조금 높여주었다. 통 크고 털털한 직장 동료...정도로 말이다. 아까 깝죽거리던 모습도 손에 카드가 들린 한 유머러스한 모습으로 변한지 오래이다. 무슨 소리냐. 일단 체슬리에 대한 인식의 추가 아슬하게 중립에서 좋은쪽을 향해 기울었다는 소리다. 축하한다. 체슬리는 이제 막 사민의 따봉을 받을 자격을 갖췄다. 우디르급 태세전환이 아닐 수가 없다. 그렇지만 각박하고 삭막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런 명랑하고 유연한 사고방식은 사민을 스트레스로부터 자유롭게 만들어주고는 했다. 사민 나름의 생존 전략이었다.
역시 세상엔 쉬운 일 하나 없다. 그리고 그때 지하철에서 상대가 보였던 반응은 그녀 역시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게 무리가 가서야 쉽게 생각을 읽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리라. 결국 또다시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는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앞에 놓인 라즈베리 무스케이크가 더는 맛있어 보이지 않았다.
"그럼 비스킷 조달은 내가 맡을 테니까 그쪽은 부탁할게, 자기!"
침술을 가지고 정확히 어디를 어떻게 구슬린다는 건지는 굳이 묻지 않았다. 원래 세상에는 모르는 게 나은 일도 있는 법이다. 셀린에 관해서는, 어차피 조만간 1층의 카페를 털어서라도 간식을 선물해 주려고 마음먹은 참이었다. 소집 첫날 비스킷을 외면했다가 간식을 줄 기회를 놓친 기억은 아직까지도 뼈저린 아픔으로 남아 있었다.
"설마 다 알고 스카웃한 건 아니겠지?"
그러게, 그 사이에 일어날 사건을 최대한 줄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한탄하듯 말하며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싱크홀과 지하철 하이잭이라는 두 사건만 놓고 봐도 결코 규모가 작지 않았다. 지금도 이미 충분한데 여기서 더 심각해지기라도 한다면... 더 큰 사건은 곧 더 많은 피해자를 뜻했다. 정말로 그저 손 놓고 지켜보는 방법밖에 없는 걸까? 이런 걸 위해서 경찰이 되기로 한 건 아니었는데.
"난 보고하는 걸 추천해. 솔직히 지금 상황만 봐서는 추측만으로도 감지덕지인 것 같으니까."
그리고 그 추측, 내가 보기에는 꽤 정확한 것 같으니까 자신감을 가져, 자기! 웃음을 터뜨리며 마지막 남은 케이크를 해치웠다. 비록 아직은 내놓을 수 있는게 불확실한 추측과 예상밖에 없다 하더라도, 일단 머리가 여럿 모이면 반드시 뭐라도 나오게 되어 있는 법이었다.
"그럼 슬슬 돌아가 볼까? 보고도 해야 하고, 땡땡이친 거 혼나러 가야지."
아까 말한 대로 비스킷은 내가 맡을 테니까 자기의 침술만 믿고 있을게! 라며 태평한 소리를 해대는 그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