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당이 떨어졌다고 저런 표정이 나올 수 있을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사람은 과거에 짓눌리고 살 때가 있고, 눈앞의 친구도 그럴 것이라 추측했다. 덕분에 멀미가 심해졌다. 그는 다시는 이 일을 하고 살지 않을거라 다짐했다. 두번 다시는 누군가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싶지 않았고, 뭐든 사건으로 접근하고 심하면 이입까지 하는 등, 일 때문에 다져졌던 나쁜 버릇도 잊으려 애썼다. 근 1년간은 사람의 마음까지 마주치면 무조건 읽고 봤는데 이젠 그렇지도 않았다. 드디어 버릇 고쳤나 싶었는데.
"자기야. 어디 가서 나 이런 일 했다고 말하지 마. 귀찮아지니까." 두려운 건 아니고? 그녀의 표정이 그를 집요하게 찔렀다. 이런 일은 무시해버리면 되는 일이다! 늘 했던 일이라 자신도 있었다. 눈만 마주치지 않았다면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동질감이 들었다. 대체 뭐길래 그녀를 이렇게 절박하게 만들었을까? 각자의 사정이 있다지만 이렇게 불확실한 것에 매달리는 건 피해자나 유가족을 제외하면 본 적도 없다. 아니길 바랐지만 세상은 요지경이다.
"그렇지. 정확히 이전의 두 사건은 우리를 견제하고, 본인들은 그 틈에 섞여 목적의 계단을 밟고 있을 확률이 크다고 봐야겠지."
킹메이커는 사람을 주름잡을 수 있다. 많은 범죄자가 그렇다. 사람들은 범죄자에 열광할 때가 있다. 가령 영화 조커와 같은 악역에게 주어지는 무한한 찬사나, 사람을 연속으로 살해했음에도 그 잘생긴 외모에 옥중에서 팬과 결혼까지 한 시어도어 로버트 번디의 사례처럼. 아마 조직을 완강하게 붙잡을 매력이 있을 것이다. 익스퍼라면 능력의 강도일 가능성도 높다. 파면 팔수록 헛소리만 늘어갔다. 그는 이 복잡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담배가 필요했다. 담뱃갑을 계속 손 위에서 규칙적으로 굴렸다. 담뱃갑의 모서리는 얼추 2초정도 되는 간격마다 한번씩 다이아몬드 부분에 걸렸다 떨어지듯 툭 소리를 냈다.
"그렇지. 아마 자기 말대로 킹메이커가 움직이기 시작할 때는, B급 익스퍼가 아니라 A급 익스퍼를 섭외할 가능성도 있어. 완전 이 상황을 즐기는 사이코패스가 아닌 이상 사람은 아무리 차분하다고 해도 쫓길수록 조급해지거든. 어떻게든 눌러버릴지도 모르지. 그래서 이 사건이 복잡한 거야."
누가 범죄자가 될 지 모르니까. 이대로라면 모든 사람이 잠재적 범죄자가 된다며 그는 손 위에서 담뱃갑을 굴리길 멈췄다. 데이터가 부족하고 광범위하다. 범죄를 저지를 준비가 된 사람이 과연 누구일지 찾아내기도 어렵다. 사람마다 불만은 다 있는 법이니까. 그는 케이시를 가만히 마주보고는 기댔던 몸을 더 편하게 기댔다. 푹신한 의자에 아예 몸이 파묻힐 것 같았다.
"자기야. 맙소사. 난 그런 나쁜 버릇 안 가졌어." 수많은 위선에 지쳐 현기증을 느끼고 그만뒀다. 그는 눈썹을 찡그리다 다시 폈다. 미간에 주름이 푹 패이다 사라지는 걸 보니 그도 장난을 치는게 분명했다. 팔을 뻗어 담배를 테이블 위로 올려두려다, 의자에 파묻혔기 때문인지 닿지 않자 잠시 몇번 팔을 휘적이더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완벽하게 장갑을 끼면서도 "나야 모르지." 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잠시 생각이 교차하는 눈빛 뒤로 그가 눈을 흘끔 굴려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자기가 아니라고 생각하는게 마음 편할 테니까. 밤잠 설치면 나처럼 예성 씨한테 근무태도 안 좋다고 한 소리 듣는다구."
쉬엄쉬엄... 사실은 누구보다도 쉬엄쉬엄인 유우카다. 일단 일이 일어나면 바쁘게 움직여야 했지만 일이 없을 때에는 일이 없기 그지없는 팀이다. 원래도 변두리에서 일하던 시골경찰이었지만, 청해시가 한국에서 어떤 입지를 가지고 있는지는 몰라도 거의 그 때와 비슷한 급으로 평소 한적한 분위기를 하고 있다고 할까. 그리하여 유우카는, 보고서는 쓸 것이다. 받은 계란빵도 먹고 커피도 곁들이면서 천천히 써내려 갈 것이다. 어느샌가는 사라져서 홀로 인형과 함께 잠들어 있겠지만.
위그드라실의 히어로라면 분명 휴가 협상을 성공할 것이라고 생각하던 때에, 그녀가 필요한 것이 없냐며 물어온다. 유우카는 이번에도 곰곰히 생각하더니 양손을 축 늘인 채 들어올리는 것이었다. 그 행색이 어쩐지 유령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사민 씨나 후배라든지, 사민이 바라는대로 불러주지 않겠다는 의지가 이렇게나 확고했다. 별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지금까지의 대화를 통해 알아낸 바, 사민이 놀려먹기에 재밌는 사람이라는 걸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저렇게나 강조해서 말하면 장난 치고 싶어지는데 어떡하냐. 그는 꽤 짓궂은 성질머리의 보유자였다.
"…그런데 말이야, 여기에서는 내가 신참이라는 알고는 있지? 내 쪽에서 대놓고 후배 취급하려니까 이상하긴 하네."
원래 이쪽 바닥이 급 낮아도 실무 경력을 우대해주기야 한다지만 이렇게 대놓고 하대해도 반발이 없는 건 좀 낯설다. 그렇게 생각한 것치곤 시작부터 너 너 거리면서 반말했지만 말이다……. 그런 자기성찰도 "와, 뭔진 모르겠는데 되게 넷플릭스 같다."라는 분위기 깨지는 말로 끝나버렸다. 그럴싸한 추리를 거쳐서 나온 말은 아니었다. 워낙에 농담 같지도 않은 소리를 잘해서 아무렇게나 말했는데 그게 우연하게도 귀신같이 들어맞은 상황이었을 뿐이다.
한편 그는 마시려다 만 커피를 다시 들이켰다. 몇 초 지나지도 않았는데 컵이 바닥을 드러냈다. 마시기보다는 목구멍에 들이붓는 것 같은 속도라, 사민이 과자를 내밀었을 시점에는 이미 잔이 비어버린 후였다. 텅 빈 컵을 들고선 영문을 몰랐지만 그는 우선은 과자를 받아들었다. 사민이 생각한대로 아이리쉬에게 영국 신사 컨셉의 최첨단 스파이 같다고 하는 건 800년 전통의 고대 코리안 닌자와 사무라이 군단 같은 소리긴 했다……. 하지만 체슬리는 별 생각이 없었고 그는 웃는 표정이 원래부터 찌푸리듯 하다는 걸 사민이 알 방법은 없었다. 아무튼간에 간식거리가 생겼다면 먹어둬야 인지상정이다. 커피 없이 생 과자를 씹어먹어도 맛은 제법 괜찮았다.
"아니? 사복도 많이 입긴 하는데 영화 같은 정장은 너무 눈에 띄어. 007보단 경찰특공대 비슷하다고 보면 될걸."
규모나 편성 같은 부분에서 차이점이야 있겠지만 대분류로 따지면 같은 곳에 들어가긴 한다. "'그런 쪽'도 아예 안 하는 건 아닌데… 난 그거 전문은 아니고." 기껏 목소리 낮춘 게 무색하게 난 모른단 식으로 어깨를 으쓱하는 폼이 영 맥빠졌다. 하지만 최첨단 무기 이야기를 하자 이번에는 역으로 그가 몸을 조금 앞으로 숙여왔다.
"그냥 회사에서 사서 쓰는 게 다야. 그것보다는 난 지금까지 본 것중에 큐브웨폰이 제일 신기하던데. 그거 써보니까 어때? 쓸만해?"
양손을 천천히 들어올리는 모습이 마치 유령을 흉내내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소라는 슬쩍 달력을 보았다. 그러고 보니 조만간에 할로윈이로구나. 뒤이어 소라의 고개가 위쪽으로 향했다. 무엇을 떠올리는지 오른팔을 들어올려 선을 긋는 것처럼 여기저기 움직이다가 소라는 팔을 아래로 내렸다. 그러다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소라는 다시 고개를 내려 유우카를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핫팩이요? 알겠어요. 나중에 예성이에게 이야기해서 좀 더 많이 구비하라고 이야기할게요. 사실 개인적으로는 발열조끼를 구입하려고 생각 중이거든요. 개인당 한 명씩 해서 말이에요. 어쩌면 올해 겨울은 정말로 추울지도 모르니까요."
완벽하진 않더라도 적어도 등 뒤와 상반신은 따뜻하지 않을까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순찰의 대부분은 순찰차로 이어지긴 하나, 그렇다고 계속 차 안에서만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 최대한 따뜻하게 일을 하길 바라면서 소라는 예성의 자리를 잠시 바라봤다.
"그럼 저는 일단 예성이에게 이야기하고 이것저것 필요한 것들을 알아보고 구비할 수 있는 것은 구비할게요."
순찰 수고했어요. 미소를 지으며 소라는 발걸음을 옮겨 예성의 자리로 향했다. 뭔가 어이없는 이야기라도 했는지 소라를 바라보는 예성의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뒤이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지 소라의 입이 움직였고 예성의 고개가 천천히 위아래로 끄덕여졌다.
이후 소라는 유우카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오른쪽 눈을 감아 살짝 윙크를 하며 자신의 사무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고 문을 연 후에 그 안으로 들어섰다. 문을 닫은 이후, 자신의 책상에 놓여있는 계란빵 한 봉지를 연 후, 그 안에서 계란빵을 두 손으로 잡고 냠냠- 먹는 모습은 아무도 보지 못한 작은 비밀이었다.
"정히 공허하면 구름도 있고, 공기도 있고, 태양도 있고, 달도 있고, 별도 있으니 가득찼다고 반대로 생각하면 되지. 실제로 그게 사실이니까. 야아- 별 개수만 생각해도 적어도 지상 것보다는 훨 많어-!"
만날 밟는 땅만 죽어라 내려보는 것보다는 하늘을 보는 게 좀 더 숨길이 트이지 않나. 그런 주관적인 견해도 명백히 한몫 했다. 신의 눈길이 느릿하게 땅에 향했다. 바다 반대편 거리엔 무수히 차가 지나치고 오색 칙칙한 사람 발길이 통했다. 누군가 손차양을 하고 받아낼 기세로 파란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그래도 가끔은 거리도 재밌기는 하지?" 신이 지나치는 사람처럼 말하며 작게 킬킬거렸다.
"음, 그렇지. 그래서 해줄 거야?"
실실거림을 그치지 않으며 실없이 물었다. 담배를 공연히 잇새에 짧게 물었다 놓으며 짬밥 대우 해줄 것이냐고 유치한 어조로.
"딩동댕~ 정답. 골든벨을 울려야겠네. 그래서 내가 진지하게 궁예를 하건대는 말이지, 우리가 쉬고 놀려면 지금이야말로 아쉽지 않도록 가득 해둬야 한다는 거야. 앞으로는 뒤지게 더 복잡해질 테니까. 아, 혹시 사건 관련 추리일 줄 알았어? 유감. 난 땡땡이 치는 것밖에 관심이 없어서."
느긋하게 담배를 물어 빨고 이제는 가느다란 연기만 오르는 것을 옥상 재떨이에 그대로 내려뒀다 뒤늦게 '아' 하며 집어들어 주섬주섬 눌러 끄는 것이 경찰보다는 영락없는 백수며 한량이다. 신은 스트레치하듯 기지개를 켰다. ...묘하게 아재처럼.
"하기는- 그렇지. (이때 기지개를 풀고 후드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역시 목사를 할 걸 그랬어. 이래 봬도 신이니 뭐니 하는 것에도 일가견이 있는데."
윙크를 보고는 큭큭 웃었다. "얼씨구, 끼를 부려?" 장난스럽게 대꾸하며.
"...아, 갑자기 아쉬워지는데에~..."
말 놓으라 한 건 애당초 본인이었지만서도. 신은 시원찮은 얼굴을 하며 머리를 슬쩍 긁적였다. 고민하는 성싶다가... 무언가 생각난 듯, "아!" 손가락을 튕겼다.
"그래, 이쪽 업계엔 '짬밥'이란 게 있다면서. 대뜸 반말 까도 어색하니 그냥 오늘까지만 높여주는 걸로 하자, 어? 내일만 되면 짬이고 뭐고 보자마자 까도 오냐 귀여워 해줄 테니까. 그 정돈 괜찮지? 경위님이 자고로 자비가 있어야지~"
하며 오랜 친구라도 되는 것마냥 유진의 어깨에 팔을 걸치려 하며 가벼운 생각밖에 안 하고 다니는 사람처럼 웃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