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할 수 있습니다. 다만 필수적인 것은 아니며 소화 속도도 매우 느립니다. 미각도 둔하며 공복도 느끼지 않기에 딱히 즐기지는 않습니다. 하는 경우는 평범한 사람인 척 해야할 경우, 직접 요리를 할 경우(그나마도 간을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곤 합니다), 같이 먹는 편이 분위기 상 적절한 경우 정도입니다.
티스아흐는 뺨에서 돌연 찬 기운을 느끼고 번뜩 눈을 떴다. 아침이다. 그녀는 크게 뜬 두 눈을 꿈벅꿈벅 가만히 두어 번 정도 떴다 감았다 하곤, 허리를 굽혀 상반신을 일으켰다. 전날 피곤하게 여기저기의 침략자들과 씨름한 끝이라 몸이 무겁다. 기지개를 쭉 키자 온몸에서 으드득 으드득 비명을 질러댄다.
"아흐윽...! 죽겄네, 정말."
이제 겨우 만 18세가 된 그녀의 몸은 여태껏 굴러보지 못한 수준으로 혹사당하고 있었다. 지금껏 크게 다치지 않고 버텨온 것도 나름 성공적이라 볼 수 있을 정도로. 그녀는 한 차례 하품을 크게 들이키고는, 가려운지 목이랑 옆구리 부분을 박박 긁곤 한숨을 푹 쉬었다. 오늘은 또 어디서 무슨 재난을 겪게 될지 모르는 일이니까, 그녀의 표정은 그리 밝을 수만도 없었다.
"보고싶다, 교수.... 안겨서 쓰다듬어지고 싶어."
조금 슬퍼보이는 눈동자가 기운 없이 땅바닥을 바라봤다. 동시에 귀와 꼬리도 힘 없이 축 바닥으로 늘어졌다. 허나 그렇게 툴툴거리며 불평스럽게 말하면서도 이젠 일어나야 할 때한 걸 알고 있는건지, 그녀는 숨을 훅 내뱉은 다음 자리를 탁 박차고 일어섰다. 그녀가 싫든 좋든, 결국 또 이세계에서의 하루가 시작된 것이다.
눈을 떴으니 밥부터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머리가 아닌 몸이 이미 그녀를 근처 마을의 가게로 이끌었다. 배가 고프면 어차피 제대로 싸우지도 못해, 라고 그녀의 머릿 속에선 애써 그 발걸음을 정당한 것으로 포장해나간다. 그러다 음식점에 먼저 앉아있는 사람을 발견한다. 누구였더라.... 살짝 곱슬기가 있는 금색 머리칼에, 마치 청옥처럼 빛나는 눈. 그녀는 그것을 어디에서 들었나 곰곰히 생각해보지만, 그 생각을 가게 점원이 잠시 가로채가며 말을 걸었다.
"주문하시겠어요?"
뭐, 아무렴 어떤가. 뭐든 일단 밥이 먼저다. 그녀는 보통 알시온인 기준 성인 남자 3명이서 달라붙어도 도저히 먹지 못할 양을 고민 없이 탁탁 주문해버리곤 영수증을 챙겼다. 점원은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 양까지는 좀 이상하다 싶었는지 "괜찮으시겠어요?"라며 추가 확인까지 요구해왔지만, 거기에 그녀는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답했다.
"뭐..., 다이어트 중이라 괜찮은데."
떡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는 점원이 곧 음식을 한 가득 들고 와 그녀의 앞에 놓아두며 쓴 웃음을 지었으나, 그녀는 그런 점원의 반응을 의아하게 여기며 곧 신경끄고 포크를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에 "아."하는 탄성이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당신, 카리아! 맞지...!"
그제서야 기억난듯이 그녀는 탁상에서 확 일어나 맞은 편의 테이블에 앉아있는 카리아를 향해 삿대질하며, 소리쳤다.
아침이었다. 하루를 시작하는 근면한 소란이 거리를 물들였다. 가게의 문이 열리고 사람들의 걸음이 땅을 밟는다. 하늘에서 내리는 햇볕이 맑다. 아주 잠시간은 이 세계의 내일이 당연하다는 착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지 않다는 건 알았다. 얼마 전에 떨어져 나갔다가 다시 붙은 팔을 움직이며 햇볕 아래의 길을 걸었다. 저 멀리서 보이는 벽은 하얗고, 건물들은 아직도 익숙해지지 못했다. 새벽이 지나 갓 눈을 떴을 때, 고요한 방 안에서 성서를 읽거나 엘레이스의 정비를 할 때. 바이올린의 조율을 할 때는 아직 내가 사는 세계가 내가 사랑하는 그곳처럼 느껴진다. 허나 아니다. 그건 몇 걸음만 걸어도 알 수 있는 일이다.
“..하아.”
그러면 아주 조금, 한숨이 나온다. 새벽에서 온 공기를 삼키며 들어간 곳은 한 식당이었다. 식사는 좋아하지 않는다. 미각은 둔하고 삼켜봤자 만족스럽지 않다. 배가 부르다는 느낌이 아니다. 그냥 복부에 뭔가 쌓였다는 느낌이 들 뿐이다. 그건 배부름과 달랐지만, 사실 이제는 그게 무슨 감각이었더라 잘 기억나지 않아서 구분하기 힘들었다. 그럼에도 들어온 것은 가게의 간판이 크로울리의 단골 가게와 닮아있어서였다. 버릇처럼 들고나온 바이올린 케이스를 꾹 쥐고 물 한 잔과 가능한 매운 음식을 주문했다. 열셋 나이의 아이가 혼자 와서 주문하긴 이상한 메뉴인지라 점원이 당황했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매운 음식은 스프였다. 특수한 뭔가가 들어갔다지만 이 곳의 식문화를 모르는지라 이해하진 못 했다. 의자에 앉아 다리를 달랑거리며 스푼으로 슬쩍, 스프를 떠넘길 뿐이다. 그다지 맵지는 않았다. 내 기준으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이 들어왔다. 건강하게 탄 것처럼 보이는 갈색 피부의 여인이었다. 기시감이 들어 잠시 바라보다가 곧 눈을 돌렸다. 예상가는 게 있었다. 자신과 같은 처지의 표류자. 혹은 희생자? 피해자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한 명이 먹기에는 누가 봐도 많은 양의 음식이 그녀의 테이블에 놓이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점원이 당황한 모습이 신경쓰였지만 알아서 하겠거니 싶어 스푼을 다시 들어올렸지만, 곧 놓쳤다.
“...맞지만.”
자신을 아는 듯 외치는 모습에 한숨을 내쉬었다. 바닥에 떨어진 스푼에 인상을 쓰고, 의자에서 내렸다.
“죄송하지만 새 스푼을 좀.”
바닥에 나뒹구는 스푼을 주워서 종업원에게 건네며 부탁했다. 슬그머니 지은 미소는 곧 지워지고 나는 이름모를 용사를 보았다. 하얀 머리카락에 대비되는 구릿빛 피부에, 문양이 그녀의 개성을 치켜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팔에 흘러가던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저한테 볼 일이 있나요?”
초면인 만큼 예의를 차렸다. 상대는 그럴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이런 류의 반응은 내게 있어 퍽 익숙한 반응이었다. 삿대질 같은 것.
카리아가 스푼을 떨어트리자 마자, 그녀의 허리는 반사적으로 굽혀져 그것을 주우려 했다. 그건 직업병보다도 더 무섭다는 본능병이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튀어나온 신음과도 같은 음성은, 아마 스푼을 주우려고 수구렸으나, 결국 스푼을 다시 주운 건 카리아였기에 피어난 민망함의 감정으로부터 비롯된 것일테다. 하얀 털의 복실복실해 보이는 꼬리가 잔뜩 부풀어 있는 것을 보면, 분명 그러할 것이다. 그렇게 민망함에 젖어 잠시간 카리아와 점원간의 이야기에 끼지 못하고 서서 얼굴을 붉히던 그녀는 곧 카리아가 다시 말을 걸어주자, 배터리가 넣어져 급하게 전원이 들어온 로보트처럼 반응한다.
스푼을 다시 받고나서 바라보자 상태가 이상했다. 전원이 들어온 아동용 기계장치를 보는 느낌이 순간 들었다. 신체 일부가 그런 느낌이어서 그럴까. 그녀는 어색한 기색으로 자신에게 말을 걸었다.
“그냥 카리아면 됩니다.”
장송곡. 원래 세계에서도 붙었던 이명 같은 게 여기서도 붙는다는 건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것도 하필 장송곡이라니. 장송곡을 연주해본 경험은 많았다. 수많은 사령들을 올바른 죽음으로 인도하고 저 높은 하늘로 올라가는 이들을 보며, 바이올린을 켜는 건 일상이었다. 여기서도 전투가 끝날 때 마다 죽어간 생명들을 위해 연주를 하긴 했지만.. 그게 그리 눈에 띄는 일인지는 몰랐다. 일단 교회의 성가대원으로써 안할 수도 없었으니까 후회는 없지만.
“.....이곳에 불려왔다는 건, 당신도 누군가에게는 영웅이라는 뜻일테죠. 그러니 좀 더 가슴을 펴고 당당해지는 게 좋을 거야. 어떤 일이든, 어떤 이유에서든 넌 누군가에게는, 아주 소중한 존재란 뜻이잖아.”
저 쪽에서도 편하게 말을 하니 이 쪽에서도 그럴 생각으로 중간부터 말을 놨다. 어딘가 사람을 대하는 데에 불편해 보이고 자신감도 없는 모습이 눈에 걸렸다. 그래서 그렇게 말을 하고 다시 의자에 앉았다.
“짐작 가는 사람이 있다면 돌아갔을 때 말해 주지 그래.‘너의 영웅이 세계를 구하고 왔다’고 하면, 부끄럽긴 해도 꽤 멋질 거 같지 않아? 그리고 음식 식는다.”
짐작 가는 게 있구나. 카리아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대신 대충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테이블이 쾅 하고 소리를 내도 흠칫하는 기색도 없었다. 12년의 여행과 전투 경험은 우습게 볼 일이 전혀 아니었다. 카리아는 자고 일어나니까 눈 앞에 주온을 닮은 사령이 있던 적도 있었다.
"그래. 그래."
카리아는 낯부끄러운 소리가 익숙했다. 정확히는 이게 딱히 부끄러운 이야기라는 자각도 없었다. 성서에는 이보다 더한 이야기들이 많았으며 교회의 성가대로 활동하며 들은 미사의 말씀 덕분에 이에 대한 감각도 둔해진 것이었다. 그냥 저냥 평범하게 말한 거다 싶은 느낌이다. 하지만 티스아흐의 반응은 카리아의 생각을 넘어섰다. 그러나 카리아는 당황하는 모습도 없이 흐응 하고, 티스아흐를 바라보다 아직 쌓여있는 음식들에 눈길을 줄 뿐이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음식 식는다."
날카로운 이가 보여도 감흥 없이 빤히 바라본다. 흠, 숲길을 지나다 마주친 짐승이 떠오르네. 정도의 감흥을 받은 카리아는 여유롭게도 몸을 돌려 새로 받은 스푼으로 스프를 떠 먹기 시작했다. 그다지 자극적이지 않지만 그나마 괜찮았다. 카리아에게 이 곳의 음식은 대부분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튼, 뭐, 좀 더 당당해지라고. 온갖 녀석들이 모인 판국이니까 허세 정도는 필요할 수도 있잖아. 경험담이라 그래."
뭐, 믿어주지 않는다고 한들 목을 잡아 비틀 수도 없는 노릇이니 포기하고 고개를 뺐다. 그리고 실제로 음식이 식고 있다는 것 역시 사실, 그걸 외면하는 건 음식이 아직 따뜻할 때에 배불리 먹어야 한다는 그녀의 지론에 배율되는 행위인 것이다. 그녀는 터덜터덜 자리에 앉아 알레프 신께 엄숙한 기도를 올린 다음, 식전 빵을 크게 한 입 베어물고 과즙 한 잔을 통째로 부었다. 물론 대충 보아도 3인분은 넘어 보이는 그 빵 무더기가 '식전' 빵이라는 것에 동의하는 사람은 그다지 없겠지만 말이다.
"...알았다고."
나보다 어려 보이는 핏덩이에게 훈계를 받는다는 건, 딱히 유쾌하지 않은 경험이다. 물론 그곳으로부터 느껴지는 묘하게 '어른스러운' 분위기 때문에, 태클까진 걸지 않았다. 그래도 분한 마음에 한 마디 해주지 않곤 버티기 어려웠는지, 그녀는 입을 열었다. 물론, 왜 그런 마음이 든 건지는 스스로도 알기 어려웠다.
"...(웅얼웅얼). 컥."
이런, 아직 씹던 음식이 잔뜩 남아 말을 하기 어렵다는 것을 입을 벌리고 나서야 깨닫는다. 낭패다. 급히 목에 걸린 그것들을 뒤로 넘겨내기 위해 탁자에 놓인 과즙을 남김 없이 입으로 쏟아 넣는다.
"프후-."
다행히 급한 불은 꺼졌다. 한숨 건진 듯 그런 소리가 절로 났다. 그나저나, 저 녀석에게 뭐라고 말하려 했더라-? 생각해봐도 딱히 기억나지 않는 걸 보면, 분명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었을 것이다. 이어 산처럼 쌓인 채소와 콩, 고기 스튜를 먹기 시작했다. 그것들이 썩 맛있다는 걸, 그녀는 입에 넣은 순간 바로 알 수 있었다.
티스아흐가 식사를 시작했다. 혼자서 먹기보다는 파티에 쓰는 게 적절할 것 같은 음식 무더기를 무던하게 바라보던 카리아는, 깔끔하게 수프를 비웠다. 빈 그릇과 스푼을 보던 카리아는 천천히 과거를 떠올렸다. 이대로면 추기경도 문제 없으니 예법을 배워둬야 한다며 난리를 피우던 카일이나, 요셉이나, 다른 이들. 그건 싫다며 도망치던 나날에 잠시 시선이 아득해졌다.
눈을 감았다 뜬 카리아는 정신을 말끔히 정리했다. 그릇을 종업원에게 건네고 턱을 괸 채 물만 조금씩 마셨다. 꽤 복스럽게 먹는 게 보기 좋았다. 이런 생각이 드는 걸 보면 자신도 정신적으로 나이를 먹긴 먹었구나 싶어 웃어버리고 입을 벌렸다.
"자아 그럼. 엘레이스."
카리아의 그림자가 넓게 펴졌다. 천천히, 하지만 느리지 않게 그림자에서 웬만한 사람보다 커다란 관이 솟아오른다. 관의 뚜껑이 열리고 무언가가 나온다. 그건 기괴한 기계장치다. 쇠로 이루어진 날개를 지닌 천사다.
"피아노."
그것의 옆구리가 열린다. 물리적으로 가능하지 않을만한, 건반과 장치가 튀어나온다.
"베네딕트 가동."
그것의 척추 부근에서 작은 날개를 매단 작은 비행체가 날아들었다. 총 여섯. 그것은 미사 절차의 수.
"곡은...뭐, 자비송(키리에 엘레이손)으로 갈까. 아침이고."
처음이고. 그리하여 성가대가 연주를 시작한다. 작은 손에 피아노 건반이 눌리고 그 기괴한 외형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아름다운 음색이 퍼진다. 성가대의 입에서도 소리가 나온다. 일견 성스러운, 무척 성스러운 음이 고요한 음식점 내부를 밝힌다. 작은 비행체들이 양 옆을 지키며 음색을 더욱 확실하게 울리고, 더 깊이 울리게 만든다. 그 뿐이 아닌, 음에 따라 기계로 된 날개가 살랑이고 몸체가 움직인다. 동시에 음식점 내부에 있는 이들의 상처 고통 피로, 신체의 불협화음이 사라지려 한다. 천천히, 천천히. 없어진 것을 생기게 할 순 없지만 쌓인 피로 정도는 사그라뜨리고도 남을만한 성가였다.
그리 정신 없이 그릇을 하나 둘 비워나가던 중, 어디선가 노랫 소리가 들렸다. 노랫 소리 뿐만이 아니었다. 난생 처음 들어보는 여러 악기들의 소리들이 함께 귀를 간질였다. 이 아름다운 소리의 출처가 궁금해 음식을 찍던 포크를 잠시 놓고 고개를 돌리자, 아까 그 카리아가 기괴한 것들과 함께 연주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소리는 아름답게 울리고, 향기로운 고기 스튜의 냄새도 잠시간 나지 않게 되었다. 그녀는 왠지 방금까지만 해도 대단한 피로로 찌들어 있던 온 몸의 근육들이 나른하게 풀리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음악은 신의 은총.'이라고 주장하던 교수의 그 말도, 지금이라면 얼추 납득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이 연주에 비하면 교수의 연주는 다소 끔찍했었다.
곧 연주가 다 끝나자, 그녀는 자리에 앉아 박수를 쳤다.
"연주, 잘 들었다고. 뭐야..., 꼬멩이 주제에 꽤 하잖아-?"
꼬멩이라는 말에 힘을 주지만, 달리 악의가 담기진 않았다. 그저 '어린데도 대단하네'라는 표현을 하고 싶었던 것 뿐이리라. 그녀는 키득키득 소리내어 웃으며, 팔, 아니, 팔 부위의 스파크웨어를 빙글 돌렸다. 묘하게 몸이 가벼운 건 아무리 그래도 역시 기분 탓일 것이다. 마나나 스파크 같은 뭔가가 담기지 않은 노래로는 치유의 효과를 본다는 건 무리일테니까.
연주는 오래지 않았다. 길게 할 이유는 없었으니 적당한 수준에서 끊고, 그림자로 돌아가려는 엘레이스를 붙잡았다. 완력에서 비교할 수 없을만치 약한 나는 막지 못했고 엘레이스는 다시 스르르 그림자 속으로 들어갔다. 앞으로 자주 보게될 녀석일 수도 있는데. 나는 가만히 그림자를 바라보다 고개를 젓고 그녀를 보았다.
"나름 오래 했으니까 말이야. 몇 년이더라...그래. 8년 쯤 됐네."
미지근해진 물을 마시니 점원이 다가와서 새 물을 건네주었다. 볼이 상기된 것을 보니 내 연주가 여기서도 나쁘진 않은 모양이었다. 뭐, 천재라고 불렸던 몸이다. 당연했다. 성가대의 교사가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쇠하지 않는 목소리라니! 하고 감탄하면서 한 칭찬이었지만 말이다. 시원한 물로 목을 축이다가 테이블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굈다.
칭찬을 받는 카리아는 너무나도 어렸다. 또래보다 작은 여성인 티스아흐가 보기에도 작고 아담한 몸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저런 나이에 이 정도 성취를 이루기 쉽지 않다는 것, 그녀도 그 쯤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카리아가 막지 못한 이름 모를 기계를 보고 귀가 쫑긋 솟았다. 보아하니 딱히 스파크나 마나로 움직이는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그것들을 사용한다면 으레 '연두'나 '파랑'의 불빛을 내게 되어 있으니까.... 처음 보는 물건에 공학도로서의 작은 불씨가 잠시 티스아흐의 가슴 속에 지펴졌다. 그러니 더욱 그것이 모습을 감추게 되었을 때에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던 것이다. 감정에 솔직한 귀와 꼬리가 가장 먼저 아래로 쳐졌다.
"으응..., 8년...."
납득이 간다. 딱 봐도 10살 전후, 아니..., 동안이라고 생각하면 거기에 3살 정도 더해 13살 정도일까나 생각하고 있었다. 5살부터 쳤다면, 그야 달인이 될 수 밖에 없을테니까. 티스아흐 본인도 이제 스파크웨어를 사용한지 10년 남짓, 하지만 주위에서 그녀의 이해도를 따라올 사람은 아예 없을 정도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건 타당한 추론이었다. 그리고 다음 이어진 말엔, 역시 화들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예...? 머라구여?"
꺽-. 너무 놀라 방금 먹은 고기 스튜의 트림마저 올라왔다. 티스아흐는 순간 자기가 덧셈을 잘못한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15 + 8 =... 그건 명백히 23이다.
"...거짓말. 오빠라고?"
티스아흐는 멍하게 굳어 카리아를 쳐다보고 있었다. 당연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라는 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다시 생각하니 계산이 이상하다. 지금 나이는 스물여섯이니까, 열다섯부터 팔년이 나올 수가 없지. 엘레이스를 보던 익숙한 시선(정체불명의 기계를 보는 공학도의 흥미 깊은 눈빛)에 잠시 흘러갔던 생각을 바로 잡았다. 몇 년 부터였더라. 누가 묻지도 않았고 생각하지도 않았던 일이라 기억이 잘 안 났다. 다른 건 잘 났는데 말이다. 아무래도 죽고난지 십 년도 흐르지 않아서겠지.
"그 무렵엔 나이를 잘 못 세서 말이야. 몇 년이 지나도 열셋인 느낌이었지. 뭐 아무튼 그 무렵부터 지금까지였고.. 현재 나이는 스물다섯이네. 몸이 이러면 나이 세기가 곤란하단 말이야."
고개를 끄덕이고 정리했다.
"뭐 아마도 8년에서 10년 사이일 거야. 그 전부터 바이올린은 배웠지만.."
거기서 말을 멈추고 그녀를 보았다. 믿을 수 없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의 얼굴이었다. 저런 표정도 오랜만이었다. 최근 동안은 자신의 정체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처음에는 많이들 저렇게 놀라운 얼굴을 했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