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날 게이트를 공략하기 위해 대구에 들린 적 있어. 그곳의 게이트는 언데드가 컨셉이었던 모양인데 파티에 위관급 가디언 셋이 포함되어선 생각 이상으로 게이트를 빠르게 공략해나갔지. 그러다가 게이트의 보스를 마주하게 되었는데 보스가 좀비였던 거 있지? 좀비가 왕관을 쓴 채로 근엄하게 왕좌에 앉아있는 거야. 그 장면을 보곤 웃음이 나와서 경배하듯 손을 들어올리고 말했지.
"그래. 내일 보자. 그리고, 항상 기억해. 나처럼 할 자신 없으면, 그냥 증시추종 펀드에 넣어."
친구의 전화를 끊고, 빈센트는 10층 계단에 첫 발을 내딛었다. 첫번째 발은 두번째 발의 기초가, 두번째 발은 세번째 발의 기초가 되어, 중력을 거스르고 빈센트의 위치를 차츰차츰 높였다. 평범한 사람들의 등허리에는 그들도 모르는 사이에 땀이 식으며 몸과 속옷을 적시고, 계단참이 쉬라고 유혹하며 그들을 붙잡는다. 하지만 그건 평범한 사람의 이야기이고, 빈센트는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평범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으니. 의념으로 강화된 두 다리는, 계단을 걷는 정도로 부하를 느끼는 것은 더 이상 불가하게 되었고, 빈센트의 폐도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평범한 호흡 패턴을 유지했다.
하지만 빈센트는, 옛날을 생각하며 걸었다. 계단 한 층, 한 층이, 마치 외계의 거성인 것처럼, 절대 올라갈 수 없는 저 대기권까지 뻗은 산처럼 느껴졌던 시절을 생각하며. 그 때의 빈센트는, 의념을 각성했기는커녕, 남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다 하고 있는 그런 것들을 하지 못했으니까. 그 발에 자신의 체중을 10초도 실을 수 없었고, 심박 보조 임플란트의 도움이 없이는 심장이 스스로 100번도 뛸 수 없었고. 그 때. 그 때 보았던 계단을, 지금은 사뿐사뿐 밟았다. 그러면, 쓸데없이 생생한 유년기의 악몽도 잠깐이나마 잊을 수 있었으니까.
"..."
띠릭, 띠리디릭. 의념으로 작동하는 도어락의 벨소리가 빈센트를 환영하고, 문을 열고 들어가면, 빈센트가 없는 동안 이곳에 도사리고 있었던 어둠이 빈센트를 반긴다. 후우! 빈센트가 바람을 불자, 빈센트의 눈 앞에 있던 모든 전등들과 횃대가 일제히 빛을 발하고, 어둠은 빛의 틈새에 가려 물러날 틈도 없이 순식간에 추방당했다. 추방당한 자리에는, 그간 어둠이 꽁꽁 싸매고 보여주려 하지 않았던 모든 것들이 보였다. 100인치 TV, 불곰의 털을 깐 가죽 소파, 우윳빛이 감도는 매끈한 대리석 바닥, 하이엔드 컴퓨터, 완벽하게 작동하는 최첨단 패시브 하우스 시스템, 수천 권의 책을 품은 채 주인을 기다리는 가구. 빈센트는 그것을 보고 웃었다. 하지만 웃다가 보니 외로웠다. 다섯 살, 부모님을 잃은 다섯 살 이래, 그는 영원히 혼자였다.
유일하게 뜨였던 머리로, 세상 물정을 최대한 빨리 파악해서 어떻게든 살아남았기에 망정이지, 빈센트는 자신이 앞으로도 이렇게 산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 재미있는 대로만 살다 보니 이런 결과가 찾아오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면서 혼잣말을 했다.
"앞으로도 계속 혼자려나."
'나랑 같이 살아요.'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여자의 목소리에, 빈센트가 뒤를 돌아보았다. 빈센트가 생각했던 더러운 집은 없었다. 그 대신 빈센트는, 마치 다른 차원의 자기 집처럼, 너무나도 깨끗한 안방과 마주했다.
빈센트가 현실이라고 생각하면서 눈을 돌린 곳에는, 빈센트가 생각한 현실 따위는 없었다. 흰 접시들이 잔뜩 처박혀 있어야 할 싱크대는 완벽하게 텅 비어있고, 물기 하나 없이 완벽하게 말라있다. 그 옆의 가스 레인지에는 아무것도 올라가있지 않고, 몇 년을 방치했는지 모를 누런 기름때가 벗겨지자, 흰색의 매끈한 타일이 해방의 기쁨을 그 반짝반짝거리는 자태로 외치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면, 바닥에는 바퀴가, 천장에는 거미가... 없었다. 아무 것도 없었다. 단 한 마리도 없었다. 마치 그곳에, 빈센트 외에는 그 누구도 살아있을 자격이 없다는 건지 완벽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빈센트의 눈길이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빨래통이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빈센트는 자신이 남긴 삶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수많은 빨래가 쌓여있어야 할 빨래통은 텅텅 비었고, 세탁을 마친 옷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서 옷장 안에 다 들어가 있었다.
빈센트는 기억을 되돌려본다. 빈센트 그가 과소비에 빠졌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과소비는 어디가지나 물품에 그쳤을 뿐, 누군가에게 청소를 부탁하는 "용역"까지 구입한 적은 없었다. 다시 말해, 가정부를 고용한 적은 옛날에도, 지금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거라는 이야기다. 그런데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빈센트는 손에 불꽃을 만들어내고, 풀려있던 오감을 날카롭게 연마했다. 분명 뭔가 있다. 기척을 죽였지만, 빈센트를 피해갈 수는 없으리라. 그리고 방 안을 돌아다니던 빈센트는, 식탁에 차려진 음식을 발견한다.
인간의 손길을 완전히 지워버린 모델하우스 같은 이곳에서, 유일하게 사람의 냄새가 나는 음식이었다. 딱 두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양이었고, 딱 두 사람이 먹으라는 건지 수저와 포크도 두 사람 분량으로 준비되어 있었다. 빈센트는 그 모습을 보고 표정을 찌푸렸다. 누가 이런 짓을 한 걸까. 빈센트를 죽일 의도라면, 기다리고 있다가 덮치면 되었을 텐데. 굳이 이런 짓을 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누구랑 같이 먹는다고 이런 짓을..."
"저랑 같이 드셔야죠."
이번에는, 어깨에 양 손이 닿고, 귓가에 여자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빈센트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리면, 역시 아무것도 없었다. 빈센트는 자신이 미친 게 분명하다고 생각하면서, 약을 찾았다.
"드디어 내가 미쳤나보군. 빨리 정신병원을 가봐야겠어. 일단은..."
"빈센트, 당신은 미치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 목소리는, 빈센트에게 정신병이라는 도망칠 구멍 하나 주지 않았다. 빈센트는 다시 고개를 돌리고, 이번에는 그 여자가 피하지 않고 빈센트 앞에 나타났다.
"하지만 전 당신에게 미쳤답니다."
"...베로니카."
빈센트의 눈동자가 떨렸다. 눈 앞에 서 있는 여자는 베로니카였다. 빈센트가 보는 앞에서, 빈센트에게 총질한 병사를 산 채로 발골해버리고, 빈센트를 껴안은 채 좋다고 사랑을 속삭이던 여자. 가디언 후보생을 살해하고 재판 대기중이던 그 여자. 그 의념범죄자가 빈센트를 보고, 너무 행복하다는 듯 웃고 있었다. 빈센트가 뒷걸음질치려 했지만, 창문은 어떻게 된 영문인지 잠겨있었다. 빈센트는 침을 삼키고 그 여자를 바라보았다. 여자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빈센트 앞에 어떤 스위치와 편지를 내밀며 이야기했다.
"소개가 늦었지만... 당신만의 베로니카랍니다."
마치 심연의 괴물이 준 물건을 받듯, 빈센트는 편지를 조심히 받아서 뜯어보았다. 편지에는 UGN과 UHN의 소인이 함께 찍혀있었고, 그 안에는 '통지서'라는 제목의 계고장이 붙어있었다.
로젠탈-프레이저 복종 실험 결과: 매우 불안정. 도플러 대인관계 검사 결과: 빈센트 반 윌러에 대한 신앙 수준의 애정. 연인이 곧 윤리의 기준임. 빈센트 반 윌러 신뢰성: 사적제재를 남발하고, 화재를 좋아하는 등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나, 레벨 38의 베로니카를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
"이건 꿈이야..."
"맞아요. 빈센트. 저도 너무 꿈 같답니다... 자아, 그래서... 빈센트. 무엇을 원하나요? 일단 식사부터 하실래요? 아니면... 빈센트? 빈센트?!"
빈센트는 '베로니카를 통제해서, 게이트 공략에 잘 이용하라'는 내용의 고지서를 보고는 기절해버렸다.
베로니카는 빈센트와 여러 알콩달콩한 연애를 기대했지만(사실 될 리가 없었다.), 그녀가 빈센트의 목줄을 차고 나서 처음으로 한 일은, 다름이 아니라 기절한 빈센트를 안정시키는 일이었다.
새빨갛게, 선홍빛으로 흘러내리는 핏방울이 바닥을 향해 뚝, 뚝 떨어집니다. 베로니카는 두 손에 단검을 쥔 채로 바닥을 향해 한없이 낙하하고 있는 핏방울을 바라봅니다. 붉게 물든 눈동자가 더욱 붉게 물들어가고, 두 손이 알 수 없는 고양감에 떨리기 시작합니다. 베로니카는 웃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웃음은 행복만을 가정하진 않았습니다. 잠시 공기가 일그러지는 듯한 소리가 들립니다. 베로니카는 보이지 않습니다. 단지 웃지 않는 눈으로, 웃는 입술을 만들기 위해 한없이 끌어올리고 있습니다. 왼손과 오른손의 손등으로 입술을 가득 끌어올립니다. 그리고, 빈센트를 바라봅니다.
" 헤, 헤헤, 헤헤.. "
베로니카의 입에서 먼저 나온 것은 웃음소리입니다. 그 웃음소리는 처음에는 부드럽게, 점점 높은 음으로, 마지막에는 찢어지는 듯한 음색으로 소릴 지릅니다.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을 털어내려는 듯한 그 목소리를 들었을 때, 빈센트는 한숨을 쉬고 맙니다. 고기방패, 아니면 그녀가 죽을 법한 범죄. 빈센트는 적어도 이번 일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레벨을 한참이나 상회하는 레벨 43의 각성자를 상대로, 베로니카는 빈센트에게 휘둘러진 바람의 칼날을 막기 위해 팔을 뻗었고 선명히 그어진 상처로부터 흐르는 피를 바라봅니다.
" 보여요? 나, 여기. 피가 나.요. "
베로니카의 목소리는 이상합니다. 마치 아이를 연기하기라도 하듯 몸을 떨면서, 두 단검을 끌어안습니다. 칼날이 자신의 몸을 찌르고 있음에도, 그걸로 상처가 조금은 더 벌어졌음에도 베로니카는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바람의 칼날이 다시금 날아와 베로니카의 육체를 덮치고, 수많은 자상들을 그어냄에도 베로니카는 입을 끌어올리려 합니다. 미소를, 더 미소를 피워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 보였습니다. 다시금 날아오는 바람의 칼날. 불과 화염. 그런 것들을 바라보며 빈센트는 급히 마도를 운용하려 하지만, 베로니카는 빈센트를 바라보며 웃습니다.
히죽
단검을 쥐고,
히죽
의념을 끌어올리며
히죽
순식간에 한 사람의 울대에 단검을 박아넣습니다.
피투성이 무도회
말했잖아. 말했잖아. 싫다고 했잖아. 싫다고 했잖아. 아픈 건 싫다고, 붉은 거는 싫다고, 흐르는 거는 싫다고, 근데, 근데 참겠다고 했잖아.
가래 끓는 소리와 함께 천천히 기울어지는 시체로 손을 뻗어 단검을 뽑아낸 베로니카는 그대로 시체를 쥐어 던집니다. 몸을 기울여 피하기 위해 몸을 기울였을 때, 허공을 가르고 한 개의 단검이 빠르게 쏘아집니다. 쏘아진 단검으로부터 붉은 선이 피어오르고, 베로니카는 그 선을 쥐고 움직입니다. 단검이, 마구 춤을 추기 시작합니다.
다치게 하지 마. 날 죽여. 차라리 날 죽이라고. 목을 졸라. 전기로 지지던지. 단숨에 죽일 수 없다면 닥치란 말야. 어지러워. 어지러워. 어지럽다고.
마치 꽃이 피어오르듯, 핏줄기들이 피어나는 기괴한 모습. 베로니카를 보며 빈센트는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려 합니다. 죽는 시체들은 모두 정확히 약점이라고 할 법한 곳을 꿰뚫고 있었고 약점을 보호하려 하면 교묘히 움직이는 베로니카가 그의 목이나 손, 발을 노려 방어를 부수곤 마침내 목에 칼을 꽂아넣습니다. 오직 사람을 죽이기 위한, 살인 기계라 보아도 무방할 움직임. 베로니카는 실을 쥐어 단검을 늘인 채, 하늘을 바라봅니다.
"준혁 씨가 그렇게 대하는 걸 말릴 생각은 없지만 저는 딱히 으르렁댈 생각은 없어서요" 현재석씨의 제자인 걸 어떻게 알겠습니까. 지한은 아마 제대로 소개받지 않았으면 현성현이랑 현준혁이 사실 친척인가.. 사실 오촌당숙이라서 큰아버지뻘인가.. 라는 말에도 납득할 만하군. 했을 텐데.(?)
"작동하긴 하겠죠." 웬만해서 최신식에 가까울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제일 잘하는 거라고 해봐야.. 라는 생각을 합니다 특기라고 해야하나요. 지금 가장 강한 건.. 무기술을 다루는 것이나. 돌파창인데.
"그럼 해보도록 하지요." 고개를 끄덕이며 기술을 써서 창을 꽉 쥐고는 기술을 사용해 멀리에서부터 박차고 달려가 허수아비를 꿰뚫으려 합니다. 쾅. 하는 소리를 내며 허수아비가 두동강 났을까..
투덜거리며 지한의 창술을 살펴본다,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창술이 쾅 하고 박히자 허수아비가 두동강 나며 쓰러졌다. 방어쪽인 부분은 보이지 않았기에 전위에 바로 설 순 없다, 하지만 중위에 세워두고 방금 보여준 돌격을 응용한 갑작스러운 전위 합류와 이후에 이어지는 창의 압도적인 사거리와 휘두름을 통한 일대다수의 교환비를 응용한다면 좋은 패가 될 것 같았다. 체스의 말로 따지자면 룩이겠지.
"나쁘지 않아, 아니 ...좋네, 칭찬할건 칭찬해야지. 무미건조한 너와는 정 반대인 창술이라 순수하게 감탄했어"
박수를 드릴게요 짝짝
"그럼 이번엔 아까와 똑같은걸 보여줘, 단 이번엔"
품에서 권총을 뽑아든 나는, 천천히 팔을 내려 지한이를 겨누었다. 그리고 나의 의념을 불태워, 머릿속에 하나의 키워드를 연상하였다. 명령 : 허수아비를 공격할 것 이런 단순한 명령이 지금의 한계지만, 이것 만으로도 독재의 의념은 충분히 능력을 보여줄 수 있다. 아마도 공격력 증가의 버프 따위가 걸리겠지
"하지만 아까 전의 모습은 으르렁이 가장 잘 어울리지 않았습니까?" 고개를 갸웃하지만 꼬치꼬치 캐묻지는 않는 듯합니다. 체스의 말로 따지면 룩이라는 생각을 알지는 못하지만. 체스로 따지자면.. 룩이긴 하지만.. 언젠가는 퀸이 될 수 있을까요?
"무미건조하다는 것은 조금 오해가 있어보이지만..." "창을 꽤 오래 수련했으니까요" 창에 붙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며 휘두르는 것보다는 찌르는 게 좀 더 익숙하다고 합니다. 물론 언젠가는 휘두르고 찌르고 그런 것들을 자유자재로 해나가야 하겠지만 그건 지한주가 고민해야 하는 거고(당면 과제: 진동으로 의사표현하기.)
"음.." 공격력 증가의 버프가 걸린 것은 몸은 가볍지만 창의 무게는 어히려 더 묵직해지는 것으로 느껴지며, 새로 생성된 허수아비에게 돌파하듯이 창으로 꿰뚫자. 아까보다도 더 큰 소음과. 두동강을 넘어 여러 갈래로 찢어진 것이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브레스 이터를 적용시킨 지한이 창을 내지르는 순간, 충격파가 퍼지면서 허수아비의 중앙에 커다란 구멍이 뚤려버렸다. 충격을 일점에 집중해서 내지르는 것이 정말 가능하구나 하고 감탄하며 지켜보았고 지한이의 창술은 찌르기에 특화되어있는 것으로 보였다. 휘두르기, 내려찍기, 창대를 이용한 무술은 보이지 않았다. 돌진과 찌르기에 능함..이라고 헌팅 네트워크에 있는 메모장앱에 적어두고 다시 지한이를 살펴본다.
"그럼 의뢰가자..물론 ..의뢰는 아직 결정하진 않았찌만, 네 말대로 채집이나 간단한걸 찾아볼게"
그런게 있으면 말이야, 아무튼 테스트는 끝났다, 내 식 대로 말하자면, 눈 앞에 있는 지한이의 쓸모를 찾기 좋은 시간이었다고 해둘 수 있겠지 창수는 언제나 중위와 전위 둘 중 하나를 고정하는 식이었지만, 지한이와 같은 케이스면, 중위와 전위의 위치를 스위칭 시켜서 응용하는 것 역시 가능할 것 같다. 물론 전투라는게 언제나 순항하는것은 아니지만.
헌터 생활을 하면서 일찍 죽길 바라는 녀석은 없다. 대부분의 목표는 큰 돈이었고, 돈이 기반이 되면 안정적인 삶을 바란다. 그리고 안정적인 삶이 마련되고 나면 명예를 추구하게 되고 명예마저 얻게 되면 권력으로 눈을 돌린다. 결국 손에 하나가 쥐여쥐면 더 큰 것에 욕심을 부리니 의념 각성자 사이에서도 헌터를 들개라고 부르는 것이다. 단지 조금 큰 길드라는 족보가 있으면 품종을 쳐줘 그럴싸한 취급을 해줬고 그런 이름마저 없으면 품종 없는 잡종. 결국 족보 없는 천것이 되어 어디서 죽었는지도 모를 사람이 되는 것이다. 성현은 둥근 얼음이 담긴 잔을 들어 얼음을 천천히 회전시켰다. 원을 그리며 얼음과 잔이 부딪쳐 청아한 소리를 내는 것을 한참을 듣고 있었다. 아까까지는 이 잔에 독한 게이트산 명주들이 가득 차있었는데 지금은 얼음만이 살짝 녹아 잔 아래 남은 술들과 뒤섞였고 남은 물기를 삼키며 바깥을 바라보았다. 서울이라는 지역은 한때는 구 대한민국의 수도로써, 현재는 신 한국의 수도로써 그 가치를 달리 했다. 과거에는 모든 유행과 편의가 서울에 집약되어서, 현재는 게이트라는 폭탄에서 누구보다 안전한 유찬영이라는 이름 때문에 여전히 서울의 집은 비쌌다. 그런 서울에 집을 마련했다는 것은 곧 성공했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운이 좋았다지만 그만한 재능도 있었다. 일성의 제 2공략팀장. 그것이 성현의 직함이었다. 아무리 헌터가 가디언보다 떨어진다 하더라도 그중에서도 일부. 가려지고 가려져 뽑히는 것이 일성 길드의 헌터였다. 그리고 그런 이들을 모아 게이트를 공략하는 2팀의 팀장. 누가 보더라도 성현의 인생은 성공을 말하고 있었다. 괜한 감정에 바깥 풍경을 바라보던 성현은 창가에 비치는 그림자를 보곤 몸을 돌렸다. 단정한 검은 슈트에 어울리지 않는 트레이닝 팬츠를 입은 독특한 패션 센스의 소유자가 보였기 때문이다. 술병을 들고 비척거리다가 소파에 그대로 쓰러지면서도 한손에는 '필마운'에서 구한 최고급 포도주를 주스처럼 벌컥거렸다. 그 모습에는 교양이라곤 조금도 없었지만 성현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아무렴. 일성 길드의 헌터는 기본적으로 예절과 예의, 규칙 같은 것들을 따져가며 교육을 받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대외적인 것이지 그들의 실제 모습마저 다를 거라곤 기대하기 힘들거다. 그러니 최고급 와인을 포도주스처럼 벌컥거리는 부팀장에게 성현은 걱정스런 말을 건넸다.
생각을 해서 힘드니까. 부팀장의 나발은 계속됐다. 마침내 1리터 가까이 차있었던 병이 완전히 비어버리자 그는 기분 좋은 딸꾹질을 했다. 불그스름한 얼굴로 병을 적당히 던져버리자 각성자의 힘을 버티지 못한 술병이 산산히 부서졌지만 여기 조각에 다칠 사람이 없기도 했고 건물에 각인된 마도문자에서 힘이 흘러나와 깨진 유리병을 집어삼켰다. 조각이 있던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병에서 튀어버린 와인방울조차도 말이다. 대신 부팀장은 성현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같이 풍경을 바라봤다. 인천의 옥탑방에서부터 시작됐던 인연은 서울의 고층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그때와 다르지 않은, 그러나 많이 다른 풍경을 둘은 눈에 담았다.
" 예쁘네. 빌어먹게도. " " 그러게. 이 풍경이 이리 예뻤었나. "
평범한 밤하늘인데도 두 사람은 괜히 얼굴이 뜨거워지는 기분을 느꼈다. 잠깐의 의념을 끌어올리면 오른 취기마저도 사라지겠지만 그러면 이때의 풍경이 사라질까, 두 사람은 가만히 바깥을 지켜보았다.
" .. 우리 성공했지? " " 어. " " 하.. 시X.. 왜 행복한데, 이리 빈 것 같냐. " " 취했냐? " " 어. 맞아. 취한거야. " " 중화제 있어. " " 그게 아냐. 그냥.. 이 취기가 가시면, 이 풍경들이 사라질까봐. 그냥 우리는 뭣도 아닌 헌터지망생이고 너는 검 F랭크, 나는 분석 F랭크일까봐. 그게 존나 무서워서 의념을 못 올리겠어.. 이 풍경이 다 날아갈까봐.. "
성현은 슬쩍 눈을 돌려 그를 바라봤다. 과거와 달라지지 않은 외모에는 노화의 흔적이 조금도 없었지만 그때의 그와는 다른 느낌이 났다. 과거의 그가 순수하고도 순박한 시골 학자의 느낌이 났다면 지금의 그는 노회한 정치인의 느낌이 있었다. 성현도 갓 검을 잡고 휘둘러 행복해하던 그는 없었고 이제는 바디워시의 향보다 각종 피냄새로 찌든 역거운 비린내가 더 익숙해졌으니 그에게 변했다고 할 수는 없었다. 단지 의념을 끌어올려 자신의 취기를 잊게 하고 친구의 어깨에 손을 올려 실없는 말을 할 뿐이었다.
" 새끼야. 그때로 돌아가면 이득이지. 너 말고 유명한 헌터들 데려다가 가르치면 되겠네. 신지한이나 한태호, 태명진. 이런 애들로 말야. " " 걔네가 일성이 눈에 차기나 하겠냐? 신지한만 해도 서산 신가가 자기 거에 한태호는 명예 가디언, 태명진은 UHN 의원이잖냐. 애초에 그런 원석들이 모여있던 특별반이 존나 돌아버린 공간이었다니까? " " 특별반.. " " 그래. 누가 알았겠냐고. 쟤네들이 ------------ 할 줄은. "
부팀장의 얼굴에는 결연한 표정이 남아있었다. 우리와, 쟤네는 확연히 다르다는 차별점. 그 차별점이 얼굴에 쓰여 있었다. 애초에 처음부터 재능이 넘쳤다던 특별반과, 각성 몇년동안 F등급 기술 얻었다고 좋아하던 성현의 격차는 한참이나 벌어져 있었다.
" 새꺄. 과거로 돌아가면 다른 거 다 필요없어. 너 특별반에나 들어가. 지금 실력의 반의 반만 있어도 그땐 먹혔을 거 아냐. 특별반도 처음에 뜬소문 존나 많았다며? 가디언 수준이니 어쩌니. "
결국 걔네들도 다 X밥 시절이 있었을테니까. 그때 확! 그물을 던지듯 손모양을 하던 부팀장이 시원하게 웃었다.
" 낚아버리는거지. 야. 걔네들을 다 모으면 그것도 불가능이 아니겠지? " " 야. 설마.. " " 일루니티. "
전설도 꿈이 아니잖아? 하고 시원한 웃음을 터트리는 부팀장에게, 성현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래. 불가능은 아닌 것이다. 그들을 모으고, 하나가 되게 한다. 저 과거. 전설이라 불리던 일루니티처럼. 그러나 불가능하기에 꿈은 아니라고, 둘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