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로 도망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자신의 발을 끈질기게 붙잡고 끌어당기는 모래와, 반대로 그 모래를 미끄러지듯 타고 움직이는 저 괴물을 본 그는 도망칠 수 없으리라고 생각하고 말았다. 순간 의지가 꺾이려고 하고 있었다, 붙잡힐 수밖에 없어 보이는 지금 상황과 그 뒤에 일어날 일에 대한 불쾌한 상상은 달려 도망치고자 하는 의지를 거세게 흔들고 있었다. 그러던 그의 시야에 담긴 괴이한 인물의 모습은 그에게 불합리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어째서 저렇게 태연할 수 있지? 내가 먼저 움직였다고는 해도 거리는 저 쪽이 훨씬 가까운데 어째서 아무런 영향도 없고? 우박처럼 쏟아지던 저 괴물에게서 그를 지켜주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더욱 감정에는 불이 붙었다. 그 때는 날 보호했으면서 지금은 어째서 저렇게 방관하고 있을 수 있는 거지? 마치 난 처음부터 안중에도 없었던 것처럼?
그의 발이 모래에 깊이 빨려들어가며 몸이 균형을 잃었다. 모래가 흩어지는 소리와 함께 모래 위에 엎드렸던 그는 모래를 딛고 일어나고자 발버둥치면서 소리쳤다.
미드 나잇의 말에 따르는 게 정답인지 지금의 당신은 알 길이 없다 . 자신의 신의가 가르키는 대로 - 지키지 않아도 될 약속에 매여 발을 떼는 당신에게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한 책임을 벌써부터 따지는 것은 잔혹한 일이겠지
미드 나잇이 감추는 것 . 바스티유가 숨기는 것 . 그것들이 당신의 여정에 어떤 식으로 작용하게 될 지는 신만이 알 것이다 . 인간인 당신이 눈치챘을 때 파도는 이미 머리 위로 그늘을 드리우고 있겠지
걸음을 재촉하던 미드 나잇은 다리의 나사가 빠지기라도 했는지 갓 태어난 새끼 임팔라 마냥 한동안 제자리서 일어나지 못했다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리던 녀석이 마침내 똑바로 사막 위에 섰을 때 - 미드 나잇은 모래 먼지가 일도록 안도의 한숨을 바닥에 쏟았다 . 본의 아니게 중단되었던 여정을 재개할 마음을 굳힌 미드 나잇은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될 텐데 무리하여 앞장을 섰다 . 가는 길이 같아도 그것이 당신을 끌어들인 최소한의 책임이라는 듯이 말이다
미드 나잇이라는 소년은 어쩌면 성실한 녀석일지도 모르겠다
하긴 흑백으로 알맞게 딱딱 나뉘는 세상이 아니니 현재 주어진 일면만 보고서 옳고 그름을 가릴 수는 없겠지
" 글쎄 . 정말로 그런 비결이 있다면 자신만 알고 남에게는 알려주지 않을 거야 . 나 같으면 말이지 . 그리고 론멕 . 나를 추켜세우는 건 적당히 하렴 . 내가 대단히 아름답고 특별한 사람이라는 거야 일부러 상기시켜 주지 않더라도 날 때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야
네 노력은 가상하지만 다이아는 다이아라서 빛날 뿐이니까 . 평생 질리도록 들어온 말을 새삼스럽게 몇 번 더 듣는다고 해서 내 입이 가벼워지는 일은 없을 거란다
그래 ... 언니는 그렇게 헤픈 사람이 아니야 "
오만하지만 어딘지 한 편으로는 자조적인 말이었다 . 하지만 그것도 잠시에 지나지 않고 오필리아는 금방 평소의 새침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 하기야 그럴 수밖에 . 감상의 못에 깊이 잠기기에 이 사막은 적당한 장소가 아니다 . 말하지 않아도 오필리아는 사막에 시달리고 있었다 . 그럼에도 그녀가 자신의 고됨을 함부로 토로하지 않는 이유란 론멕이라는 보는 눈이 있기 때문이겠지 . 오필리아는 자신 안의 야성의 충고에 따라 누구에게도 자신의 약한 모습을 보이려 하지 않았다
감정이 새지 않게 밀봉하는 오필리아의 포커 페이스는 - 어쩌면 이드보다도 위험한 무기일지도 몰랐다
저 놈에게 당신의 위기는 앞서 말한 대로 남의 일이었다 . 안중에도 없었다 . 무신경했다 . 시큰둥했다 . 그럼에도 어째서인지 녀석은 당신의 부름에 움직였다 . 아니 ─ 움직였다는 말은 다소 어폐가 있으리라
놈이 한 일이라 해봤자 당신을 향해 손을 뻗은 것 뿐이니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족했다 . 질식할 것만 같은 질량으로 당신을 짓누르려는 지네의 덮침으로부터 당신을 구해내기에는 . 당신이 이해하는 것보다도 먼저 몸이 뒤로 당겨졌고 눈치챘을 때는 보이지 않는 힘에 붙잡혀 호선을 그리며 날아가고 있었다 . 라이트 형제가 보았더라면 자신들의 업적을 부정했을 지도 모를 비행 아닌 비행
한 때 뼈가 빈 것들의 세상이었던 하늘을 이제는 당신이 날고 있다 . 아니 ─ 추락하고 있다
저것들에게 보다 보편적인 형태의 입과 귀가 존재했다면 정곡을 찌르는 샤를로테의 말에 관심을 보였을 지도 모른다 . 그러지 못한 것이 유감이라 누군가는 생각하겠지 . 따라서 샤를로테의 위기는 현재 진행형으로 계속되고 있었다 . 삼각형의 포위망을 완성한 놈들은 서두르는 법 없이 샤를로테가 불만을 입에 담건 말건 누에가 제 풀에 지치기를 기다렸다
이제와서 누에가 공세로 돌아가려 해도 한 놈이 당하면 나머지 두 놈이 샤를로테를 덮칠 것이니 ─ 샤를로테의 안전을 무엇보다도 우선시하는 누에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굴렀다
비할 데 없이 강력한 힘을 지닌 데에 대한 대가와 같이 ─ 누에에게 있어 샤를로테는 밖으로 드러난 약점이었다
돌아오는 대답이 없을 때 샤를로테의 불만은 더욱 커져갔다. 하지만 불만을 표출할 대상이 별달리 없으니 꼭 한움큼만큼의 한숨만 뱉어보는 것이다.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서 샤를로테는 현재 상황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다른 방안을 강구할 수밖엔 없었다. 파리 머리에 늑대의 몸을 한 그것들을 살펴보던 샤를로테에게 떠오른 것이 있었다. 한장한장 넘겨보았던 늑대에 관한 어린이용 생태 책이었다.
"너희들 중 <알파>가 누구니?"
샤를로테는 대답을 기대하지 않으면서도 화두를 던져보았다. 꼬리를 세울 수 있는 개체는 오직 우두머리뿐이며 나머지는 복종의 의미로 알파의 주변에서 꼬리를 내리고 - 그것들 중에도 홀로 꼬리를 세운 개체가 있는가? 혹은 가장 몸집이 큰 개체가 있는가?
늑대의 몸을 가졌어도 파리였다 . 파리의 머리를 달았어도 늑대였다 . 샤를로테의 발상은 참신했지만 생물 분류 단계에서 신의 실수로 탄생한 듯한 저 무리에게 종래의 상식은 통하지 않았다 . 이게 무슨 말이냐면 ─ 한 배를 타고난 쌍둥이처럼 서로 닮아 각 개체를 구별할 만한 특징이 눈에 띄지 않았다는 소리다 . 한 번 눈에 새기면 두 번 다시 잊지 못할 것처럼 생겨서 공장에서 찍어내기라도 한 듯이 천편일률적인 외모를 보이니 제아무리 샤를로테라도 겉모습만으로는 우두머리를 판별하지 못할 것이다
" ... 이미 충분히 도와주고 계세요 . 따지고 보면 선생님의 이드가 제 이드를 망가뜨려서 생긴 일이지만 "
비수로 가슴을 찔러도 저것보다는 덜 예리하겠지 . 미드 나잇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료했다 . 본의 아니게 일어난 사고를 갖고서 필요 이상의 책임을 물을 생각은 없다 . 자신의 호위를 맡아주는 것만으로도 삯은 충분히 치뤘다고 . 벌써 자신의 목숨을 두 번이나 구해준 상대에게 주산을 두들겨 만든 박정한 소리를 내뱉을 만큼 냉정한 인물은 못 됐던 모양이다 . 한편으로는 서로 간의 거리감을 유지하자는 스탠스를 취한 것이기도 했다 . 더 이상 당신에게 신세를 져서 부채 의식을 늘리고 싶지는 않다 . 뭐 그런 것 아닐까
뭐가 됐건 미드 나잇은 일방적으로 남은 여정의 형태를 결정지었다 . 이것만은 양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말이다
허망한 듯이 뱉은 목소리가 허공에 흩어졌다. 샤를로테는 아랫입술을 뜯으면서 생각에 잠겼다. 그나마 소녀의 선택은 앞으로 해야 할 일을 궁리하는 시간 정도는 벌어준 모양이었다. 이윽고 소녀는 움직일 수 있는 상체를 구부정하게 굽혀 오목한 양손에 모래를 담기 시작했다. 소녀의 치맛자락에 모래가 그득히 쌓였다.
"누에. 저 아이가 우리를 따라오지 못하게 만들어 줘. 그리고..... 빨리 돌아와 줘야 해. 알겠지?"
괴물들 중 가까이에 있는 하나를 가리키고서, 담담하달지 당당하달지 겁먹었다는 태가 유난히 나지는 않았지만 마지막엔 소녀의 목소리는 조금 떨렸을까? 샤를로테는 치맛자락에 모인 모래를 쥐었다. 가장 먼저 자신에게 달려드는 괴물에게 그것을 뿌릴 준비를 했다. 곧바로 숨을 들이마시고 크게 외친다.
망설임을 버린다는 것은 어른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다 . 자신의 선택이 어떤 리스크를 수반한다는 사실을 알면 더더욱 그렇다 . 이를 각오로 덮고 한 발 자국 앞으로 걸음을 내딛다니 . 자신 안의 저울에 샤를로테의 목숨을 감히 달 수가 없어 결단을 망설이던 누에를 샤를로테의 결연한 의지가 움직였다 . 등을 떠민 것에 지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
한 놈만이라도 확실하게 다리를 끊어놓으려면 대체 얼만큼의 시간이 필요할까 . 샤를로테가 숨 한 번 쉬는 동안에 일을 마치지 못한다면 실패한 것이나 마찬가지겠지 . 이는 누에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 Ruuuuuuuuu 」
하지만 가만 있어도 뾰족한 수는 나오지 않으니까 . 누에도 곧 결심을 굳혔다 . 기포를 터뜨리며 끓어오르는 검은 늪이 누에의 유동을 예고했다 . 심상치 않은 누에의 모습에 자세를 고쳐 잡는 파리 머리들 . 샤를로테의 외침에 한 경희가 달려와준다면 누에의 부담도 확실히 줄어들 텐데 . 그 여자가 아직 근처에 있을까
샤를로테를 미끼 삼아 진작에 도망쳤을 수도 있었다 . 이기적이지만 그만큼 합리적인 선택이니 비겁함에 익숙한 어른이라면 ...
이러는 동안에도 모래는 흘러 누에가 가장 피하고 싶었던 순간이 도래했다 . 신체를 새롭게 가공할 준비를 마친 누에는 저 자신만 알 이유로 샤를로테의 배후에 위치한 파리 머리를 노렸다
넓게 그리고 널리 퍼져 있던 누에의 늪이 한 점에 모이며 마름모 모양의 칼로 변했다
아래서 위로 베는 섬찟한 검격에 피 아닌 액체를 뿌리며 허공을 나는 파리 머리의 앞 다리 . 네 개의 다리 중 하나를 잃어버린 녀석은 생물이라면 응당 보여야 할 상실의 아픔을 호소하는 것보다도 먼저 ─ 나머지 다리로 누에를 짓눌러 억류했다
이 이후로 론멕은 여전히 그녀에게 말을 걸어왔다. 하지만 이 이후의 대화주제는 대부분 사막의 풍경이나 오필리아의 분위기 같은 소일거리들 뿐이었다. 그 이유는, 론멕이 생각에 빠졌기 때문이었다. 앞으로 만말 이라거나, 본인이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 마지막으로 오필리아에 대한 것들. 하나같이 오필리아가 대답 안해줄만하거나, 론멕의 기준으로 대단히 실례되는 내용들이었기에, 다만 생각하면서 소소한 대화주제를 꺼낼 뿐이었다. 물론, 연애와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그것도 소설로 연애를 배운 소녀가 먼저 꺼낸 것을 오필리아가 소소하게 받아들일지는 오필리아에게 달린 거지만.
미드 나잇이 수다를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었기에 당신들의 동행은 고요 속에 이어졌다 . 때때로 중압감에 못 이겨 쓰러질 때를 빼면 미드 나잇이 당신의 손을 빌리는 일은 없었다 . 소년은 고지식하게 당신 앞에서 한 말을 지키고자 했다 . 외곬 같으니라고 . 저대로 두면 제 명에 못 살겠다 싶은 소년이었다 . 짊어지지 않아도 될 책임을 짊어지느라 소년의 어깨는 무거워보였다 . 처음 열차에 내려서 당신에게 보인 내성적인 모습이 소년의 진심이라면 무리하게 격식을 갖춰 어른 흉내를 내는 지금의 모습은 무리를 하는 게 아닐까
소년을 생각한다면 여기서 한 번 설득을 하는 것도 좋아보였다
저러다 정말로 쓰러져서 못 일어나게 되면 영영 목적지까지 다다를 수 없게 될 테니까 . 그렇게 되면 당신도 곤란하던가 . 아니라면야 당신이 신경쓸 일은 없을 것이다
" ... 하시는 말씀에 일리는 있어요 . 있지만 ... 그렇다고해서 선생님에게 전부 맡겨버리고 편해질 수는 없어요 . 어리다고 - 약하다고 배려 받을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니까요 . ... 편해지려고 하면 ... 쉽게 마음을 터놓다가는 ... 분명 약해져버려 . 그러니까 ... "
미드 나잇은 제가 하려는 말조차 다 마치지 못하고 쓰러졌다 . 이걸로 몇 번째더라 . 열 손가락으로 다 세지 못할 정도는 아닐 거다 . 육체의 피로는 쌓이지 않을 텐데 정신의 피로는 다른 걸까 . 정신의 소모야말로 이 세계에서의 죽음인 걸까 ?
이것만은 시험해보지 않으면 모를 일이었다 . 인사불성으로 쓰러져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는 소년은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한 실험대인데 - 가만 내버려두면 자신으로써 결과를 보여주지 않을까
소년은 보이는 대로 가벼웠다 . 보이는 것보다도 가벼웠다 . 실제로 당신은 무게감을 거의 느끼지 못했다 . 피로를 모르는 불사신의 육체라도 감각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기에 두 팔과 등을 누르는 압력으로 소년의 무게를 짐작할 수 있어야만 했는데 - 당신은 소년 한 명을 등에 업고도 이렇다 할 변화를 느끼지 못했다
등을 데우는 열과 피부를 간지럽히는 옷의 질감으로 소년의 존재를 실감할 수는 있었으나 반대로 말하면 그것이 전부였다
편의주의적 전개였다 . 보란 듯이 수상한 등장이었다 . 이보다 더 작위적인 배치가 있을 수 있을까 . 멀리 눈에 띄인 그것은 당신의 기억에 있는 조형이었다 . 살풍경하게 삭막한 이 사막에 어울릴 듯 어울리지 않는 낡음 . 부분부분 칠이 벗겨진 외벽은 껍질 벗은 과일처럼 불길한 속알맹이를 당신에게 비추고 있었다
쉬운 듯 보이지만 어려울 것이다
정답으로 가장한 오답일 가능성이 컸다
차분히 더 살피면 달리 쉬어갈 장소를 찾을 수 있을 지도 몰랐다
사막을 배회하는 기형의 괴수들에 맞서 소년을 마지막까지 지켜낼 자신이 있다면 - 구태여 저 빌딩에 신세를 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