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만의 확신을 가지고 타인을 몰아가는 것만큼 멍청한 것은 없다. 나는 남들과는 다르다. 나는 옳은 일을 했다. 그 사람은 원래부터 나쁜 사람이다. 그러니 내가 하는 일은 괜찮다. 결국 그런 대답들은 비열한 자기 만족일 뿐이다. 자신이 옳다는 생각은 때때로 평소라면 못할 용기를 주지만, 그 용기가 비방받는 순간 사람은 간단히 도망갈 마음을 가져버리곤 한다. 용기가 꺼지고 나면, 비난을 감당할 마음따윈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들은 그런 용기조차 가지지 않는다. 단지 우리들이 잘못되지 않았다고, 행동할 뿐.
늦은 밤. 이제 막 자정을 넘겼을 때, 체력단련을 끝낸 에이론은 교회에서 나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수많은 별이 마치 보석이 박힌 듯 반짝였으며, 그것들이 잘 보일 정도로 구름이나 안개 하나 없이 맑았다.
이런 날씨도 간만인가.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다 무심코 중얼거렸다. 들은 사람은 없겠지. 주위를 가볍게 둘러보았다. 평소 무표정해보이는 그는 사실 꽤나 감정이 다채로운 편이었으며, 야외에서 별을 구경하다가 혼잣말하는 것을 들키는 것 만큼 부끄러운 것도 없었으니까. 다행이도 근처에는 아무도 없어보였지만... 음. 아닌가.
" 여기서 뭐해? "
무미건조한, 하지만 어딘가 걱정하는 듯한 목소리가 화엔의 뒤에서 들려왔을 것이다. 화엔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잘 모르겠지만, 그녀의 모습이 보여 그저 말을 걸었을 뿐이었다.
늦은 밤의 어둠속, 미동 하나 없이 서있는 키큰 소녀의 실루엣은, 솔직히 사람보다는 나무나 조형물중 하나 같았다. 그럼에도 쉬이 지나치기 힘든 것은, 분명 그런 밤에도 별빛을 미미하게 반사하는 밝은 색의 머리겠지. 시선을 저 멀리 하늘로 던지는 소녀는, 그 어느 때만큼 공허한 표정이었다.
그런 '화엔'이라는 이름의 소녀가, 등뒤의 목소리에 크게 어깨를 들썩인다.
고개를 돌려 그 출처를 확인하는 화엔의 표정은 평소와 같이 잠잠하였으나, 함께 시간을 오래 보낸 에이론은 화엔이 꽤나 놀랐다는 것을 알수 있을 것이다.
"...에이론."
빳빳하게 굳어있던 몸이 그를 확인하고선 조금이나마 허물어진다. 화엔과 비슷한, 아니, 화엔보다도 밝을 백발이 어둠속에서도 빛을 받아 뚜렷했다.
눈가가 접히고, 입가가 부드러히 곡선을 그린다. 화엔 치고는 뚜렷히 모습을 보이는 미소. 이 미소의 존재이유 자체가 에이론의 시간과 노력의 덕이었으리라. 비록 몸에 베인 버릇은 남은 듯, 딱딱한 정자세에서 벗어나지는 않았지만, 새까만 두 눈은 명백히 호의와 반가움을 내비친다.
"...음, 잘 모르겠군..."
두 눈을 내리깔며 반사적인 답을 내놓다가, 말을 번복하듯 고개를 흔든다.
"아니, 아니다. 잠이 오질 않아 걷고 있다가, 가까이 와본 것이다. 아마도 너를 볼수 있을까 생각한거겠지."
자신의 생각인데도 추측성으로 설명하는 게 워낙 이상하게 보일수도 있다. 그마나 수수께끼의 실마리를 잡듯이 뛰엄뛰엄 말하는 화엔이었지만, 끝내 말투는 다시 부드러운 어투를 띈다. 그리고 정말로 에이론을 보게 되었으니, 운이 좋지않나? 하고 담백히 덧붙히며.
꽤나 놀란 듯한 모습. 뒤에서 갑자기 접근해서 놀란 걸까. 피식 웃음을 터트리고는 천천히 화엔을 향해 다가갔다. 어둠 속 그녀의 모습은 조형물에 가깝다고도 볼 수 있었으나, 반짝이는 머리카락 덕분에 어디 있는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 안녕. 아까도 보긴 했지만, 오랜만이다. "
장난스레 형식적인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한 인사를 건넨다. 허물어진 몸을 보니 나 역시 편하게 있어도 되는 걸까. 같은 생각을 한다.
이어지는 그녀의 미소를 보며 그는 꽤나 생경한 느낌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그 미소가 온전히 자신 덕분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노력으로 일구어낸 결실이라고 보았다. 허나 그 호의와 반가움이, 그 미소가, 자신이 했던 일들을 보답해주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걸로 충분했을까.
" 처음 봤을 땐 딱딱했는데, 지금은 많이 능청스러워졌구나. 아니, 천성인가? "
부드러운 어투로 말하는 화엔을 빤히 보다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저런 부끄러운 말을 담백하게 뱉어낼 수 있다니. 의도한 것 보다는 천성에 가까우려나. 그는 한숨을 한번 내쉬고 표정 속에 감춰진 부끄러움의 감정을 억눌렀다.
" 나도 만났으니 목적은 달성한 것 같고, 이젠 뭘 할 거지? "
고개를 살짝 기울임으로서 호기심을 표했다. 사실, 그것은 호기심이 아니었다. 그는 잠시 기다리다가, "할 일이 없으면 조금 같이 걷는 건 어때." 라고 덧붙이며 화엔의 반응을 기다리기로 한다. 기왕 만나게 된 거, 대화나 하고 싶었으니까.
가만히 서서 에이론의 접근을 기다리던 화엔, 이내 앞에 다다르자 그의 눈을 마주 바라보게된다. 비슷한 키라 그런지, 딱히 고개를 들거나 내리는 수고는 없었다. 에이론의 장난스런 인사에 갸웃, 잠시 해석하듯 고개를 기울이지만, 이내 똑같이 가벼운 미소를 내걸수 있게 된다.
"그래, 오랜만이군. 아까도 보긴 했지만."
나름의 맞장난이라는 걸까? 에이론의 말을 그대로 똑같이 되돌리는 모습이 또 에이론에게 첫 만남과 다른 점을 강조한다.
"그런가? ...흠, 천성일지도 모르지."
밥먹는 작고 사소한 행동조차 '명령입니까?'하고 되묻는 기계같은 인형은 흐려져가고, 그나마 본인의 의지를 마주보게 된 소녀가 이 자리에 서있다. 에이론의 말과 반응에 의외라는 듯이 두 눈을 깜박이다, 이내 그 두 눈을 자신의 의지로 휘는 소녀말이다. "에이론, 내가 보는 너는 처음 봤을때와도 한결같지만 말이지," 하고 자신의 생각도 가벼히 말하는.
실제로도 그리 생각했다. 처음 보았을때 부터 똑같이 그녀를 주의깊게 보아주고, 말을 걸어주는 모습은 여전히 화엔에게 안정감을 선사했다. 그녀가 정말로 필요한 안정감 말이다.
아이론의 질문에 대해 진심을 다해 진중히 생각하듯, 시선을 내리깔며 미간을 살포시 모은다. 그렇다. '걷는다'와 '만난다'의 임무를 완성했으니, 이제 어쩌지...? 곰곰히 생각에 빠져있던 화엔은, 이어지는 에이론에 말에 두눈을 깜박인다.
"그거야, 나야 좋다."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는 화엔. 어느새 곁에서 에이론이 첫 걸음을 떼기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다.
가벼운 미소를 보고 에이론은 아무말 없이 작게 미소를 지을 뿐이었겠지. 이젠 그녀 스스로가 판단하고, 행동하고 있었으니까.
" 아까도 봤지만, 네 그 모습은 언제 봐도 좋네. "
화엔의 스스로가 스스로의 행동을 선택하는, 인간적이게 된 모습. 그것이 좋았기에 농담 반 진담 반을 섞어 받아친다.
" 만약 그게 타고난 천성이라면, 나중에 큰일날지도 모르겠는데. "
사람에게 스스럼없이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라면 나중에 죄가 많아질 것 같다 생각했나? 너무 비약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차피 어느정도 농담을 섞은 말이었으니 상관 없을 것이다. 두 눈이 곱게 휘는 모습에, 에이론은 반쯤 눈을 감으며 마치 회상하듯 느릿하게 입을 연다. "나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여전히 네 친구니까. 친구임이 바뀌어서는 안 되겠지." 라고 받아쳤다.
그는 그녀를 동정했다. 그래, 화엔이 화낼지도 모르겠지만, 동정 말이다. 그랬기에 더욱 신경을 썼을지도 모르겠다. 화엔 속에서 자신을 봤기에 더더욱. 에이론은 예전부터 화엔의 친구가 되기를 원했꼬, 현재까지 친구인 채로 있어왔다.
내가 만약 변한다면 그것은 친구임을 포기한 것이겠지. 속으로 생각했지만, 이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치부한다. 그런 일은 없을 테니까. 자신은 언제까지고 화엔의 친구이자 버팀목으로 있고자 했다.
" 이러고 있으니 생각난다. 널 처음 만난 날... 그 모습이. "
"얼마 안 된 과거인데 엄청 옛날 같은 기분이다." 라고 나직히 말하며, 먼저 출발했다. 화엔이 자신과 키가 비슷했기에 발걸음을 맞출 필요가 없었지만 구태여 옆을 조금씩 보며 속도를 맞추려고 하는 것은 그의 성격 탓이었을까.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예전의 그 공허한 눈빛을 생각하다, 다시 화엔을 바라봤다. 이제는 그 기계같은 모습은 사라졌고, 그것이 그에게 안정감을 주었던가. 화엔이 안정감을 받아 만든 모습을 통해 에이론이 다시 안정감을 느낀다니, 참으로 재미있는 상황이었다.
'그' 모습? 에이론이 어떤 모습을 특정하는 지 이해가 가지 않아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지만, 쾌념치 않은 듯 그저 흘러보낸다. 에이론이 좋다면 좋은거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선. 에이론의 말에 하핫, 작은 웃음소리를 내다가 멈칫, 갑작스레 끊긴다. 그에 대한 대답은 늦게 들려온다. 이내 걱정스런 목소리로 조심스레 속삭이듯 물어보는 화엔.
".......큰일나는 건가?"
에이론의 말을 백프로 진담으로 받아들인 것도 모자라, 그 의중도 파악 못한 모습이다. 진심으로 불안해하는 모습으로 이리저리 눈을 굴리는 게 워낙 우스운 모습이다.
"그런가?"
화엔의 두뺨에 혈기가 돌아 한층 어두운 빛을 띈다. 그 누구든, 특히 화엔에게는 어쩔수 없이 기뻐지는 말이다. 그대 대화 도중에 이것저것 생각에 빠진 듯, 다음 화엔의 말은 늦게야 들려오지만, 그 목소리에는 절제된 기쁨과 진심된 마음이 묻어나온다.
"내일의 나는, 어제의 나와 많이 다르겠지... 그래도 나는, 에이론, 너의 친구인 것, 그 하나 만큼은 여전할것이다."
약속하듯, 단언하듯, 해는 동쪽에 뜬다는 당연한 사실을 말하듯이, 잔잔한 확신에 가득찬 말투다. 말을 끝내고 한두어번 고개를 끄덕이는 데, 그에 따라 그리 길지는 않는 속눈썹이 살포시 내려앉는다.
"그 날 말이지..."
에이론이 서두를 띄우자 똑같이 회상에 빠진다. 나는 어제 같은데 말이지, 라고 장난스레 얘기하지만, 그 말또한 진심이었다. 함께 지낸 시간이 오래되었다고 생각하면서도, 기억은 또렷해 금방 지나온 느낌이다. 제삼자의 시선으로 자기자신을 다시 바라보는 것은 묘한 기분일지도 모른다. 기억에 극도로 절제된 감상은 메말라 있었다. 눈앞에 아무도 없다가, 백발의 소년이 나타났었다. 그 뿐이었다. 그때는 말이다. 그런 흑백의 사진 같은 기억임에도 그에 따라 처음 본 에이론의 모습을 떠올리며, 동시에 고개를 틀어 바로 옆의 에이론의 모습에 빗대어본다.
그래, 그 부드러움은 역시 하나 달라진게 없었다.
공허하다 못해, 하나의 메마른 사막에서 시작하였다. 앞만 비추는 칠흑같이 새까만 두 눈. 여타 사람같은 바다는 못 될지 언정, 비가 내려 차오른 그 얕은 잔잔함에서 찾은 모습은, 분명 하나의 기쁨일테지. 서로 서로에게 얼마나 단단한 바위가 되는 지, 그것 만큼은 아마 둘 다 영원히 모를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에이론이 시선을 맞추자, 화엔 역시 시선을 맞추어 작은 미소를 지어보이는 거였다.
//수고하셨어요!! 답레는 언제든지 천천히 주셔도 괜찮아요! 관계가 너무 마음에 드는데, 늦게 까지 어울려주셔서 고마워요 😊 세세한 설정/과거 같은 건 언제든지 임의로 해도 괜찮고요!
진행소감이라고 하면 역시 초반에 휘몰아치는 이런저런 레스들이 신기했고, 또 의뢰 의뢰 가려했는데 다들 다양한 방식으로 의뢰에 접근하는게 재밌었어요. 역시 훈련이 제일 신기하긴 했지만! 마돌체 의뢰는 몇명이서 하는지 안적혀 있어서 혼자 들어가려 했는데 몇명 인원 제한이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