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평소, 무뚝뚝 하다던가 건조하다는 말은 들어도 차갑다는 말은 듣지 않았다. 제대로 주변과 소통하고 교류했다. 그것이 그녀가, 그녀로써 있을 수 있는 방법이라 배웠으니까. 하지만 그녀의 노력이 무색하게 만드는 상대에 한해서 그녀는 참지 않았다. 가식으로나마 띄고 있던 눈빛을 거둬 그 뒤에 숨겨진 냉기를 드러내며 제 앞의 상대를 응시했다. 그저, 시선을 그리 두었다.
"...사람이란 무릇 주제를 알아야 한다고 하죠. 자신의 도량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고 그에 맞게 언행을 사려야 한다, 라고."
절대영도를 닮은 목소리가 한음절 한음절 말을 내뱉을 때마다 공기가 얼어붙는 듯 하다. 긴 시간 깜빡임도 없는 금빛 눈은 줄곧 상대를 주시하고 있었다. 선을 넘은 상대가 두려움에 떠는 모습도, 그녀의 손으로 인해 바닥에 나자빠지는 모습도,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담아낸다. 마치 시선으로 옭아맨 듯. 감히 그 시선에서 도망칠 엄두도 못 내는 상대의 어깨를 구두의 굽으로 찍어 내리누르며, 그녀의 목소리가 선고한다.
"그 당연한 것을 알만한 분이 제게 그런 말을 하셨으니, 제게 어떤 답례를 받으신들 불만은 없으신 걸로 알지요. 대답은, 필요 없습니다."
다음으로 무엇이 걸리든, 몸이 형광으로 빛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강정을 꼭꼭 씹어 삼키고서 눈을 감은 채 변화를 기다린다. 그래도 제발 더 이상한 것이 걸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기도하며 천천히 눈을 떠내어 제 몸을 살피면, 아무런 변화 없이 피부색만 원래로 돌아왔을까. 그래도 의심이 들어 제 손과 팔, 몸을 이리저리 살펴보아도 변한 부분이 없어 안도의 숨을 길게 내쉰다.
이 얼마나 다행인지. 다시는 저 다과들에 손을 대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다른 효과엔 무엇이 있을지 궁금해지는 것이라. 스베타는 스니치처럼 날던 옥춘당이 잠깐 테이블에 내려앉아 방심하고 있을 때. 빠르게 손을 뻗어 잡아내고서, 입으로 가져가 이로 깨트려 아작아작 씹어낸다.
아니었으면 했는데. 스트레스 때문이군요. 음. 하나마나 한 말뿐이지만.. 어떻게 추석이니 조금이나마 여유를 가지고 잠시 쉬어가는 건 어떨까 해요. 번아웃이 오면 버티기보다는, 잠깐이라도 머릿속에서 내려놓는 게 좋으니까.. 그리고 이번에는 주무실 수 있으실 거예요. 그러길 기도할게요. 잘 자요. 푹 주무시고 나중에 해 뜨면 그때 보아요. 응.
대체 뭘 적어둔 걸까. 그는 양피지에 적힌 내용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기숙사 점수. 이건 나머지가 뭐라고 써있는지 모르겠고, 각시, 진통제. 그는 진통제가 든 약통을 향해 시선을 옮기고는 생각에 잠겼다. 백정은 당황한 것 같았고, 이내 결론을 내린다. 저번엔 몸도 정신도 10살 어려졌으니 이번에는 정신까지 10살 많아졌을 수도 있다. 자세하게 쓰여진 내용은 단 하나였다.
머리에 지팡이를 꽂아 봄바르다를 쓸 것. 조만간 지팡이와 맞지 않는 일이 벌어질 것이니, 드라이어드 가게에서 만들되 지팡이 심의 제공과 세공은 오랜 떼쟁이에게 맡길 것. 녀석은 내 요구를 누구보다 잘 안다. 추가사항. 감초사탕을 한가득 가져갈 것. 무작정 찾아가면 맨입으로 요구한다며 드러눕는다.
"..미래의 나는 제법 대가리가 잘 돌아가는 군. 조언까지 해줄 정도니."
그는 감초사탕이나 사러 나갈까 생각하더니, 창틀로 둥실둥실 날아와 내려앉는 한과를 빤히 본다. 먹지 않을 것이다. 먹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감초사탕을 살 것이다. 감초..사탕...을..한과가 그를 향해 날아와 유혹한다. 그는 먹지 않으려 했다. 단내가 훅 끼치자 그는 결국 손으로 집어들었다.
한과는 맛있었다. 지금까지 다 맛있었다고 서술하긴 했지만, 그의 입맛에 딱 맞았기에 어쩔 수 없다. 홍차에 각설탕을 4개 이상 넣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다보니 더욱 그랬다. 다과는 모두 달았고, 그를 만족시켰다. 목숨을 위협하거나 서로 번식활동을 하지만 않는다면 완벽했을 것이다. 그는 표창처럼 날아드는 유밀과를 피하고, 한과와 다식의 뜨거운 애정공세에 발길을 돌렸다. 찰보리빵은 윙크를 하며 날아갔고, 양갱은 떼지어 뭉게뭉게 돌아다닌다. 그는 여러 다과를 피하다 이전번 만났던 1학년 학생이 수줍게 다가오자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이제 이 학생은 제법 괜찮아졌는지 안색이 새파랗지 않다. 오히려 그를 마주치고는 얼굴이 새빨개졌다.
"무슨 일이지?" "저, 그게, 그..그게요. ㅂ, 받아주세요!"
1학년 학생은 눈을 질끈 감고 리본에 잘 포장된 상자를 내밀었다. 받을 생각은 없었다. 누군가에게 선물을 받아본 기억은 손에 꼽고, 더군다나 고작 그런 일로 감사인사나 선물을 받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가 거절하려던 찰나 학생은 상자를 떠안기듯 넘겨주고는 저멀리 도망쳐버렸다. 따라가기엔 그의 체력이 적었다. 그것도 절망적으로 적었다. 상자를 슬쩍 열어본 그는 [제가 선배님 덕분에 사냥한 다과예요! 선배님을 따라 저도 멋있는 마법사가 되고 싶어요.] 라고 써있는 편지와 함께 옥춘당이 가득 들어차있자 한참을 고민하다 하나 집어든다. 약간의 민트향이 났다.
약과를 물고 바닥에 내려서는 순간, 시야가 달라졌다. 원래대로 돌아온건가 싶었지만 제대로 일어나보니 원래보다 시야가 높다. 약과를 우물대며 주변에 모습을 비출만한 걸 찾아 그 앞으로 가보았다. 반질하게 닦인 거울에 비춘 모습은 그녀가 아니라 '그'였다.
"?"
순간 그녀는 델피가 여기 있는 줄 알았다. 끝이 올라간 금빛 눈이나 꽁지머리가 딱 닮아있어서였다. 하지만 델피는 은발이 아니라 밀크초콜릿을 닮은 갈색머리다. 그러니 지금 거울에 비춘 건 다름아닌 그녀라는 의미였지.
"오..."
그녀, 아니 그는 이 상황을 신기하게 여기며 몸을 살폈다. 키는 파이나 브리에 견줄만큼 크고, 남매들이 그렇듯 남자가 되어도 상당한 미형이다. 키에 비해 근육도 제법 있어보인다. 지금이라면 3층 정도는 파쿠르로 올라갈 수 있을지도. 지금 뿐이겠지만 의식이나 옷도 맞춤으로 바뀌었는지 위화감이 없어서 편했다. 어려지는 것보다 백배는 낫다고 생각하며 한동안 그 모습으로 기숙사나 원내를 활보했다.
물론 그냥 다니지는 않았다. 이왕 변한거 어디까지 통하나 궁금해져서,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해보긴 했다. 마주친 학생에게 싱긋 웃어준다거나 다과에 쫓기는 학생을 도와준다거나 등등. 남녀 가리지 않고 그러다보니 반응도 천차만별이었다. 개중에는 남학생인데도 얼굴을 붉히는 학생도 있었다. 특히 신입생일수록 더 재밌는 반응이 나와서, 원래대로 돌아가지 않고 이대로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하지만 단순 변심으로 성별을 바꾸기엔 그 몸에 쌓인 것이 더 많았으니.
이쯤 놀았으면 됐다 싶어 아무거나 먹고 돌아가려다가 마지막으로 윤에게 찾아가보기로 했다. 이래도 좋다고 해줄까, 안기면 안아줄까, 키스하자고 하면 할까, 가는 동안 온갖 생각들이 다 났다. 그녀, 아니, 그는 기대와 즐거움으로 가득찬 표정을 하고 걸음을 빠르게 놀렸다. 그렇게 찾아가서 무슨 말, 무슨 대답이 오갔을지는- 그들만 알겠지.
충분히 현 상태를 만끽한 그녀-그는 밖으로 나와 적당히 손을 휘둘러 잡히는 걸 아무거나 잡았다. 동글납작한 감촉에 이번에도 약과인가 싶었지만 가져와보니 엷은 박하향이 나는 옥춘당이라, 입가심으로 좋겠다고 생각하며 입에 넣고 깨물었다. 와그작.
몇번 눈을 깜빡이던 단태는 펼쳐져 있는 풍경을 보며 꽤 정상적인 반응을 보였다. 앓는 소리를 내면서 머리를 쓸어올렸던 것이다. 이 학원은 하루가 멀다하고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말이지. 가령, 눈앞에서 교배를 통해 새로운 희귀종을 만들어내려는 다식과 약과의 사랑의 댄스라던가.
물론 약과와 다식이 교배를 한다면 무슨 종이 탄생하는지 궁금하기는 했으나 단태는 눈앞의 풍경과 간밤에 제대로 숙면을 취하지 못한 것 때문에 당분이 필요했다. 가장 좋아하는 것이 보이지 않으니 어쩔 수 없었다. 막 다식과의 즐거운 시간을 보내려던 약과에게 좋지 않은 일이 발생한 것은 그로부터 몇분 지나지 않아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