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손을 잡아오자, 경아의 미소는 짙어진다. 이미 답을 알고 있던 사람처럼 빙긋이 웃는다. 그리곤 다시 손을 고쳐 잡는다. 당신이 풀려 한다면 충분히 풀 수 있을 정도로 허술함을 남겨 놓으면서도, 손가락을 문질러 틈이 없도록 맞붙는다.
"다행이네."
경아는 눈을 휘며 웃는다. 그 모습은 왜인지 흐드러지게 핀 복사꽃을 연상시키는 구석이 있다. 혹은 푸르게 빛나는 여름날의 숲과도 닮아있다.
"나도 좋아해."
비밀스런 이야기를 하듯 목소리를 낮춰 속살거린다. 웃음소리가 푸스스 흩어진다. 얼핏 장난스레 느껴지기도 하는 말이다. 그러나 당신을 바라보는 눈동자를 보자면 온화하고도 진심어린 호의가 서려있다.
케이스도 사 보관하고 있다는 말에 경아는 그 둥그런 눈을 조금 더 크게 떴다. 버렸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 정도로 소중히 보관할 줄도 몰랐다. 어린 시절의 친구란 흔히 잊혀지기 쉬운 것이라, 당신이 나를 잊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무척 기뻤더랬다. 지금도 그러하다.
"솔직히, 버려도 할 말 없다고 생각했어. 기껏해야 천 원도 안되는 싸구려 팔찌니까...정말로, 해인아, 정말로 기뻐. 소중하게 여겨줘서 고마워."
볼가를 옅은 붉은색으로 물들이곤 말하는 경아는 실로 행복해 보인다. 감동으로 들떠 보인다. 녹빛 눈동자가 얼핏 일렁이는 것도 같다.
"응, 그러네."
경아는 딱히 신을 믿는 부류는 아니었다. 그래도, 나를 기억하는 당신을 다시 만난 것은 그런 신에게 감사를 전하고 싶을 정도로 행운이라 생각한다. 이렇게 마주보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사실로만도 충분히 기뻤다.
"으응, 알잖아. 나 별로 하는 일 없는 거."
고개를 살짝 저으며 이야기한다. 그러나 경아가 일하는 모습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반박할 말이다. 경아는 책과 글에 관해서는 그 누구보다도 열정적이었고 도서부 활동도 예외는 아니었으니.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해도 말이다.
볕 좋은 어느 날. 네잎클로버와 토끼풀ㅡ그 외에도 이름 모를 들꽃 따위가 즐비한 들판에서 밝은 머리칼의 소녀가 주저앉아 꾸물거리고 있었다. 간혹 옆을 스쳐지나가는 학생들의 시선이 날아와 꽂혔지만, 아랑곳하지 않는 듯 들판 여기저기를 뒤적이는 것이다.
따스한 햇빛에 은근하게 달궈진 머리카락에서 희미한 햇살냄새가 나는 것만 같다. 식빵 굽는 고양이마냥 데워진 몸에 졸음이 몰려와서, 간혹 새슬은 하아암, 하고 느릿한 하품을 길게 뱉어냈다. 그러나 새슬은 잠자코 졸린 눈을 비빌 뿐, 결코 평소처럼 들판에 아무렇게나 드러누울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코 앞에 있는 작은 클로버 수풀을 뒤적거리는 손길은 무언가를 잃어버렸다기엔 영 느릿한 손길이었지만, 어쨌든 새슬은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그래, 그것도 오늘의 행운을 책임질 네잎 클로버를!
“아ㅡ”
별안간 들려오는 음성에 네잎클로버 틈새를 누비던 시선이 들려 올라가 틀어졌다. 분명 무채색 투성이인데도 묘하게 화려한 것 같다고, 머릿 속에 어렴풋하게 남는 인상. 새슬이 잠시 소녀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나른하게 웃었다. 안녀엉ㅡ.
“찾고 있는 거야ㅡ 네잎 클로버를.”
찾으면 어쩐지 기분 좋을 것 같아서. 그렇게 이야기하며 다시 클로버로 시선을 떨어트린다. 너는 찾아본 적 있어? 힘이 빠져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을 걸면서.
그녀의 웃음은 흐드러지게 핀 꽃과도 같아서 보고 있으면 내 기분까지 맑아지는듯 했다. 저렇게 맑게 웃을 수 있는 아이가 몇이나 있을까. 그녀를 따라 마주 웃다가 그녀가 속삭이는 말에 이번엔 살짝 뜨거워지는 얼굴을 주체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인다. 이래서야 영 당해내기 힘들 것 같은데. 그러면서도 좋은건 어쩔 수 없는지 입꼬리가 올라가서 내려올 생각은 없는 것 같다.
" 조금 부끄럽지만 ... 기분은 좋네. "
다시 표정을 조금 무마하면서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빛을 살짝 마주보았다가 이내 시선을 돌리면서 두어번 헛기침을 한 나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버려도 상관 없다니. 한동안은 끊어질까봐 얼마나 조심해서 다녔는데. 지금은 아예 케이스에서 꺼내지도 않고서 그냥 한번 보기만 하고 집어넣는다.
" 나야말로 그런 선물을 줘서 고마워. "
들떠보이는 경아의 모습에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역시나 버리지 않는게 좋았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러다 다시 들려온 그녀의 말에 나는 또 한번 고개를 저을 수 밖에는 없었다. 지금 이 말을 다른 도서부원들이 듣는다면 다들 나서서 아니라고 할텐데. 그리고 나도 봐온게 있으니 적어도 그녀가 하는 말보단 더 많은 일을 하고 있다고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었다.
" 그래도 나중에 필요한게 생기면 언제든 말해. "
내가 어떻게든 가져다 줄테니까. 너무 비싸거나 어이없는 것들은 안되겠지만 나는 경아가 그런 것들을 요구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있게 알 수 있었다. 내가 아는 경아는 그런 아이가 아니니까. 그러다 시계를 바라보니 슬슬 일어나야할 시간이었다.
" 이제 아르바이트 가야겠다. 혹시 편의점에서 먹고싶은거 있으면 이야기해. 가져다줄께. "
반 정도 먹은 케이크를 두고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잡고 있던 손은 가장 마지막에 풀었지만 손에 느껴지는 감촉이 없어지자 다시 허전해지는 기분이다. 나는 마지막으로 그녀의 머리를 한번 어루만지고서는 손을 흔들며 얘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