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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빨간 덩어리가 느릿느릿하게 흔들리며 어깨 위를 스쳐 귀를 문지르고 지나간다. 권투글러브의 코팅된 표면이 엄청난 속도로 피부를 얕게 문지르며 귓바퀴의 살결이 쓸리고 찢어지는 그 짧은 순간순간이 모두 느껴진다. 따가워온다. 뜨거워온다. 자세를 조금만 더 수그렸으면 귓바퀴에도 스치지 않았을 주먹이었고, 실제로 조금 더 수그릴 수 있었다.
그러나 수그리지 않았다. 귓바퀴에 주먹이 스칠 정도로 회피동작을 최소화할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지금 이 순간. 라이트 스트레이트가 머리 옆으로 스쳐지나가는 이 순간, 라이트 스트레이트가 빗나갔다는 것도 자각하지 못한 이 아주 짧은 자각의 틈...
지금의 자신에게는 1초 정도로 느껴지지만 상대에게는 0.1초도 되지 않을 아주 찰나의 이 순간.
권투 선수의 주먹은 일반적으로 인간이 반응할 수 없는 속도이며, 이것은 링 위에 올라온 권투선수들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권투선수들은 상대의 다음 동작을 미리 예측하고 먼저 움직이도록 하는 연습을 한다. 그 말은 이 순간을 놓쳐버리면, 상대방에게 다음 펀치에 대응할 시간... 가드를 올려 펀치를 막거나, 몸을 돌려 펀치를 피하거나 최소한 충격을 최소화시킬 시간을 주는 셈이다.
지금도, 상대는 자신의 라이트 스트레이트가 빗나갔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했는데도, 반격을 피하고 공격할 수 있는 위치로 이동하려고 벌써부터 펀치로 인해 앞으로 기울어진 무게중심을 다시 회수해서 옮기려고 하고 있지 않은가.
꿈 속에서 날리는 것처럼 느릿느릿한 왼팔이 상대의 오른팔 아래로 미끄러지듯이 파고든다. 내뻗어진 팔이 상대의 몸통 쪽으로 반쯤 파고들 때쯤이 지나서야, 상대방의 얼굴근육이 무언가 표정을 지으며 움직이려 한다. 아마도 아차, 하는 당황이겠지. 그러나 개의치 않고, 문하의 왼팔은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고요히 허공을 가로질러 상대의 우측 옆구리에 꽂힌다. 권투글러브가 이지러지는 것과, 글러브가 전한 충격이 상대의 몸으로 파고들며 피부 위에 출렁이는 물결을 남기는 것이 느릿느릿하게 보인다.
복서들을 위한 교과서에 실어도 모자라지 않을 카운터 리버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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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아무리 우승 후보라고 해도, 방심하면 안 돼. 상대가 심상치 않은 놈이라고."
트레이너는 경고했지만, 딱히 그 경고가 와닿지는 않았다. 상대방의 전적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었다. 학생선수권 대회에 4차례 출전해 전승 우승. 세번째 우승 때에는 32강에 걸친 토너먼트 경기에서 단 한 대도 유효타를 맞지 않았다고 했던가. 해볼 만한 수준이라고 생각했다. 상대가 갖고 있는 그 경력이라고는 고작해야 학생선수권 대회 우승일 뿐이다. 그는 단 한 번도 정식 경기를 뛰어본 적이 없는, 말 그대로 초짜였다. 그에 반해 자신은 정식 격투기단체인 KBF의 아마추어 매치에 등록되어 있는 어엿한 정식 권투선수였다. KBF 매치에서 실제로 선수로 뛰면서 만난 강자들과,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같은 무대를 뛰는 자신에게 그 정도 상대는 제법 해볼 만한 상대일 것이라고- 그렇지만 올림픽에 학생선수 대표로서 참전하는 것은 자신이라고, 그렇게 짐작했다.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 알아챈 것은 링 위에 올라 상대방과 눈이 마주친 순간이었다.
솔직히 처음에는 로프를 비집고 올라오는 그 녀석을 바라보며 내심 비웃었던 것도 같다. 링에 내리쬐는 환한 조명 아래에서도 탈색이라도 한 것처럼 창백한 피부는 살아생전에 햇볕이라고는 전혀 받아본 적 없는 것 같아서. 마찬가지로 허옇게 바래어 있는 머리카락은 무덤에서 파낸 시체 같았고. 잘 단련된 강인한 근육이 짜임새있게 들어찬 몸뚱아리도 그런 몰골에 싸여 있자니 말라빠진 삭정이요, 툭 치면 무너질 법한 음울한 폐허와도 같아서. 자기 자신에 자신감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 음산함에 흠칫할 법도 하겠건만, 18세의 학생들 중 누구보다도 치열한 실전경험과 단련을 거쳤다고 자부하는 자기 자신에게는 그저 싸구려 귀신의 집에 대충 엮어놓은 허수아비 유령 인형 정도로밖에 부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조명 아래에서 그 하얗게 늘어진 머리카락 아래에 놓여있는 그 눈을 보았을 때, 무언가가 잘못됐다는 것을 느꼈다.
거기 있는 것은 사람의 눈이 아니었다. 까맣게 패여, 별 한 점도 없는 공허, 달빛마저 들지 않는 지하실. 여태껏 닿아본 적 없던 깊은 어둠이 거기에 있었다. 다닥다닥 매달린 조명이 링 위에서 링을 향해 한껏 환한 조명을 비추어주고 있건만, 그 새까만 눈에는 빛무리 하나 점으로 맺히지도 않고 고요히 비어 공허했다. 뭔가, 사람이 아닌 것이 상대로 링에 올라왔다는 위기감이 본능적으로 등골을 스치고 지나간다.
그래, 링 위에는 환한 조명이 내리쬐고 있고, 관중석은 어둡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선수들의 눈에 관중은 잘 들어오지 않기 마련이다. 애초에 선수가 상대 선수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도록 그런 환경을 조성하기도 하는 것이고. 그렇지만, 경기 준비 자세를 취하고 그의 눈을 마주볼 때 느껴지는 감각은 그런 정도의 것이 아니었다. 링 밖의 모든 것이 퇴색되어 황량히 바스러져버리고, 회색의 거대한 폐허 가운데 링 위에 자신과 상대 선수와 심판 세 명만이 남아 있는 것만 같은 먹먹한 고립감. 그나마도 복스, 하는 구령과 함께 공이 울리자, 심판마저 사라지고 어두운 폐허에는 두 사람만이 남았다.
툭 치면 무너질 법한 음울한 폐허는, 이 세상 어디에도 닿지 못할 거대한 머설리엄이었다. 출구 없이 어둠만이 있는 묘실에, 절대로 이기지 못할 망령과 단 둘이 남아버리고 말았다. 그는 지금 이 순간, 그를 상대로 무엇을 하더라도- 그 모든 행동이 그저 조금이라도 더 생명을 연장하기 위한 필사적인 발버둥에 지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권투선수가 되고 나서, 처음으로 두려움이라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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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는 2라운드 TKO로 끝났다.
카운터 리버블로 이후 몸을 돌려 파고들면서 얼굴 옆면을 강타한 라이트 훅이 치명타가 되어, 상대 선수는 그 크루저급 중에서도 독보적으로 잘 발달된 피지컬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쉽게 무너져내렸다.
문하는 거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며칠 내내 로테이션 경기를 치르느라, '감안할 수 있는 부상' 이 얼굴에 누적되어 있었다. 물론 올림픽 복싱 국가대표를 선발하는 로테이션이었기에 일반적인 12라운드 경기가 아니라 3라운드로 진행하는 올림픽 룰로 진행된 데다, 문하는 다른 선수들보다 상태가 아주 양호한 편이었지만, 턱의 멍자국이나 눈썹 위와 귀, 뺨 등 여기저기 나 있는 컷팅 자국은 실제로는 그렇게 심각하지 않았음에도 다른 누군가 봤더라면 헉, 하고 입을 틀어막을 정도로 비주얼적으로 흉측한 몰골이었다.
반창고를 붙여봤자 마찬가지로 누덕누덕 상처투성이 문제아 몰골이 될 것 같아서, 문하는 딱히 상처에 뭔가를 바르거나 붙이거나 하지 않았다. 잠깐 지혈하고, 흐른 피를 닦아내는 것으로 그만이었다. 물론 트레이너며 닥터가 경기 중에 입은 부상을 치료해주려고 한사코 무언가 해주려 했지만, 문하는 항상 나직한 말로 그것을 거부했다.
오늘의 경기로, 문하는 국가대표팀에 합류하기 위한 승점을 확보했다.
그렇지만 이런 것들이 이제 와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문하는 문득 아직 밴드를 풀지 않은 손을 들어올려 가슴에 얹어보았다.
거기 있는 것은 사람의 눈이 아니었다. 까맣게 패여, 별 한 점도 없는 공허, 달빛마저 들지 않는 지하실. 여태껏 닿아본 적 없던 깊은 어둠이 거기에 있었다. < 으악 문하야
문하를 사람 아닌 걸로 보이게 하는 그 무언가가 뭘까요 궁금한걸... 저번에 문하가 원래 성격 되찾으면 알파늑대라는 티엠아이가 생각나는데 이렇게 변해버린 심경도 자세히 듣고 싶고요 지금은 찌금 늑대라기보다는.. 하이에나..? 그런데 이제 무리에서 떨어진..? :3... 민규주는 그런 게 더 생각나유(적폐면어카지난두려워)
지나간 일은 어쩔수 없다. 애초에 그녀는 그것을 돌이킬수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후회와 미련은 계속 남는다 해도 담담해지는건 특기였으니 그저 누락된 감정을 덮어쓰면 그만이었다. 그러면 어느때부턴가 평소에 그래왔던 것처럼 점점 무뎌질 것이다. 가끔 생각나거나 뜬금없이 꿈에서 나타나는 것은 어쩔수 없지만 어차피 미신같은 것도 믿지 않았기에 기억은 빨리 잊혀졌다. 물론 머릿속을 쉽게 떠나진 않지만... 그것 또한 언젠간 익숙해지고 무덤덤해질 것이다. 항상 그래왔듯이.
"아무리 선배님이라도, 너무 쓰다듬진 말아주세요~ 갑자기 무슨 행동을 할진 저도 모르니까요?"
그것은 정말 그녀 스스로도 모르는 무의식의 영역이었다. 갑자기 뭔가 행동을 취하고 싶어졌다. 라는 것은 생각도 전에 실천으로 옮기는 것이니, 애초에 무의식을 의식한다는 자체가 말이 안되지 않을까?
서로 잠시 떨어져서 어색한 시간을 보내다가도 다시 평소처럼 그랬듯 웃으며 서로를 대할 뿐이었다. 한가지 다른점이 있다면, 전보다는 더 홀가분해진 느낌이었을까? 당신의 생각하는 바를 알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그녀는 무언가에서 약간이라도 놓여났음을 느끼고 있었다.
"뭐어, 숨어있다가 언제 또 잠들지 모르니... 다음번엔 좀 더 기발한 방법을 채택해야겠네요."
다만 그것이 어떤 방법일지는 굳이 입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미리 패턴을 보인다면 당신이 선수를 치거나 할수도 있으니까, 그래도 내심 신경쓰였는지 그녀는 한마디를 더 보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