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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멍멍이보단 구렁이에 가깝지 않을까, 자신이 괴롭히는만큼 그 역시 은근슬쩍 한방 먹이곤 했으니. 아니, 반대의 경우가 더 크려나? 어찌되었건 마냥 지는 것만도, 마냥 이기는 것만도 아닌 상황은 썩 나쁘지 않았다. 적어도 그녀에게 있어선 그런 적당한 밀고 당김이 하나의 즐거움이었으니까. 마냥 우위에 서는 것도, 항상 깔리는 것도 그녀의 성미엔 맞지 않았다.
"흐음... 이거 끝나지 않는 싸움이 될거 같은데요...?"
10을 강조해서 어떻게든 100을 표현하려는 그의 제스처에 영 탐탁찮은 표정을 보이다가도 이내 웃어버리는 그녀였다. 어찌되었건 그가 재미를 느끼면 되었고, 자신도 그리 나쁜 기분은 들지 않았기 때문일까?
"네~ 잘먹었습니다~"
밝게 웃으며 그의 말대로 정말 편하게-그 자리에 뻗어서- 쉬고 있던 그녀는 내심 도와줄만도 하건만, 즐거운지 콧노래까지 부르며 설거지를 하는 그의 분위기를 딱히 깨고 싶진 않았는지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여느 고양이들이 그렇듯,
"......"
설거지를 끝내자마자 상까지 제대로 닦아내면서 정리하던 그가 다 끝마친듯 자기 근처, 그리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 앉아 무언가 고민하는듯 하자 그 미묘한 기류에 그녀 역시 머뭇거리면서도 이내 빙글거리는 미소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뭔가요 선배님~? 설마, 후식이라도 필요하신 건가요~?"
'식탐꾸러기'라는 말을 덧붙이며 야살스레 웃던 그녀는 누워있던 몸을 일으켜 나른한 표정으로 그를 지켜보았다.
"밖에서 먹어도 되는걸 굳이 이렇게 직접 만드시면서까지 저녁초청을 하신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던 것이겠죠~?"
여느 고등학교의 기숙사생들은 주말에는 집으로 거의 돌아가는 편이지만 그날따라 산들고의 기숙사에는 공부하려 남아있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중간고사가 임박했기 때문에 백가예도 예외는 아니었고 주말 오후에도 잔류 인원에 포함되어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날도 마찬가지로 6시간 넘게 공부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있는 복장 중 가장 편한 체육복을 입고 빠르게 복도를 지나고 있었다. 주말이고 시험기간인 만큼 복도 또한 한산했기에 맞은편에 누가 오는지 신경을 쓰지 않고 본인과 같이 기숙사생인 친구와 답을 맞춰보기로 한 상태라 문제집에 신경을 거의 집중한 채였다.
방 사이가 가깝지 않아 시간 절약을 위해 경보로 걸어가고 있었는데 앗, 하고 짧은 단말마가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와 몸이 부딪쳤다. 상황 파악이 끝나기도 전에 상대의 소지품으로 보이는 물체가 떨어졌고, 작은 구슬같은 부피감을 가진 딱딱한 것들이 바닥재 위로 잔뜩 떨어지는 소리가 따랐다.
"미안, 내가 주울게. 괜찮니?"
다리를 굽혀 들고 있던 책을 내려두고 내용물을 하나씩 집어 다른 손에 담으며 보니 알약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생김새와 색깔이 비슷한 것도 있었지만 분류를 해놓지 않은 채였다.
"약...?"
작게 중얼거린다. 양이 복용하는 억제제와 비슷한 것도 섞여 있는 것 같아서. 뭐 워낙 흔한 디자인이긴 하지만. 고개를 젓고 상대의 눈치를 살피며 마저 줍는데 열중한다. 방금 떨어뜨려서 약의 종류가 섞인 게 아니길 속으로 간절히 바라며.
/억제제와 영양제가 섞였다는 설정이 있어서 사용해봤는데 꺼려지시면 억제제는 아니었다고 편하게 해주세용!
시간은 마치 마구 풀어둔 실타래처럼 늘어져 흐르는지, 흐르지 않는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느긋하고, 태양은 저 멀리서, 그러나 확실하게 둘이 함께 있는 방을 따뜻하게 감싸고 있었다. 초침만이 흐르는 조용한 방엔 둘이서 만들어낸 은은하게 간지럽고, 단내나는 분위기가 흘렀다. 적어도 주원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후식? 글쎄. 냉장고에 뭐가 있던가?"
과자나 마실건 많은데. 하고 생각하던 그는 잠시 뒤 그녀가 말하던 후식이 그 후식이 아니란것을 깨닫곤 감전된 것 마냥 몸을 떨곤 퐁 하고 머리 위로 달아오른 수증기를 뿜어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얼굴을 붉혔다.
"아, 아하. 그건, 일단, 그, 슬혜도 만들어 줬으니까 나도 요리를 대접하는게 맞지 않을까 하고오..."
주원은 눈을 맞추지 못한 채로 이리저리 도망가는 생쥐같은 변명을 해보지만 고양이 앞에서 그것이 통할리가 없겠지. 아마 스스로도 그것을 알고 있을터이다.
어쩌면 주원은 무의식 속에서 이러한 것을 바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패치로 억누르고, 이성적으로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늑대의 외로움. 밑빠진 독마냥 채워도 채워도 부족한 항아리와 같은 외로움을, 그 채울 때 만큼은 느껴지는 만족감을 느끼는 것.
설령 그것을 바라고 있다고 해도, 주원에게는 확인해야만 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이 다른 양과 늑대에게 어떻던, 주원에게는 그만의 가치관과 생각이 있었으니까.
"저어... 일단, 그, 말이다... 며칠 전의... 그... 만월..."
제대로 이어지지 않는 말의 꼬리를 몇 번이나 흘리며 한마디로 이어진다고 판단하기도 어려울 단어들을 나열나간다. 아마 만월이라는 단어 하나만으로도 그녀에겐 전달될 터.
"일단... 응... 그, 고맙... 다고 해야하나, 미안하다고 해야하나..."
여전히 눈을 마주치지 않은채로 어쩔줄 몰라하며 두 손을 깍지껴 잡았다가 풀고, 무릎을 만지작거렸다가, 볼을 긁적인다.
"...그게 아니라! 그... 물어보고 싶은게 있어서..."
인사치레같은 말 뒤에 드디어 본론을 꺼낼 맘이 들었나보다.
"그 때 했던 말..."
'그대야, 원한다면 언제든지 속삭여줘요. 지금이 아니어도, 정말 나중의 이야기라 해도... 원한다면 언제든지, 저는 준비가 되어있답니다?'
주원은 그 날에 들었던, 그리고 지금까지 몇 번이나 머릿속으로 되뇌인 그 말을 떠올렸다.
" ...무슨, 의미야? 그리고..."
혹여나 주원이 생각했던 의미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겠지. 그것은 스스로도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오늘 슬혜를 부른 것 또한 그것을 확인하기 위함이었고. 주원은 가슴 깊숙한 곳으로부터 지금까지 낸 적 없는 용기를 끌어내어 혼자 술을 몇 병이나 들이킨 사람처럼 붉어진 얼굴로 슬혜의 얼굴을 응시했다. 올곧은 눈을 하고 슬혜를 바라보고 있지만, 그 속엔 두려움과 불안이 가득했다.
"...내가 아니어도, 그렇게 말 했을거야?"
그가 말하려는 것은 과연 슬혜에게 닿았을까. 그리고, 그녀가 입으로 말하는 대답은 과연, 어떤 대답일까. 몇날며칠을 고민하고 생각해도 알 수 없었던 대답을 들을 수 있을까. 그것은 주원 혼자만의 착각인 것일까. 아니면, 자신과 같은. 혹은 비슷한 마음일까. 그저 슬혜의 입 밖에서 나오는 대답을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홍현에게 주말이란 이랬다. 집으로 가서 쉴 때도 있지만 영양제 조합을 하루 종일 찾거나 약학 관련 공부를 하는 게 좀 더 자주 겪는 일상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운 좋게도 동아리실이 비어있는데다가 심지어 실습을 해도 괜찮다는 허가까지 받아냈던 것이다. 물론 실습하러 모이긴 했지만 중간고사로 다른 부원들은 1시간도 안되어 돌아갔고 홍현은 지난번에 해보려다 말았던 억제제를 이용한 실험을 하기 위해 자신의 방을 잠시 들르게 되었다. 물론 자신이 먹던 영양제와 함께 뒤섞여 어떤 게 억제제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었기에 좀 많이 챙겨 가기로 했다. 중간 정도 사이즈의 플라스틱 통 안에 약을 적당히 채우고 빨리 동아리실로 가기 위해 정신없이 빠른 걸음으로 가던 홍현은 문제집을 들고 자신과 똑같이 빠르게 걷던 밝은 갈색 머리의 여자와 부딪히게 되었다.
"아.. 괜.. 괜찮으세요..?"
충격에 잠시 뒤로 조금 물러난 홍현은 자신의 약들이 든 통이 부딪히면서 쏟아졌다는 걸 깨달았다. 홍현은 급하게 약들을 주워 플라스틱 통으로 넣었다. 미안하다고 말하며 약을 주워 담는 걸 도와주는 여자에게 홍현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