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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 크게 웃어버린다면 달아오른 뺨 정도는 가릴수 있으려나? 그를 보면 그럴만도 싶었지만, 자신의 경우엔 확실치 않다는 느낌뿐이었다. 그저 시선을 피한 그를 살피며 그의 감정선을 대략적으로 유추할뿐, 기류에 따라 변하는 그녀의 성격이긴 하나 그렇다고 해서 남들과 다르게 억지로 어긋나고 싶은것까진 아니었다.
"음~ 뭐, 선배님 말씀도 일리는 있으니까요~"
그녀 스스로도 그의 음식이 더 맛있다 생각했으니, 어쩌면 정말로 상대적인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렴, 아무리 맛좋은 음식이라도 그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한둘쯤 꼭 있지 않을까?
"물론 진짜는 선배님께서 직접 찾으셔야 하는 거지만요~ "
하지만, 이라고 운을 떼려다 그냥 줄여버린 그의 말에는 꽤 여러 의미가 함축된듯 싶었다. 그 이유를 그녀가 알 턱은 없었지만 아마 이때까지의 그의 행동을 보면 자신과의 연관도 없잖아 있었겠지.
"후후후... 다행이네요 그건..."
같이 있으면 질리지 않는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관계의 지속성은 충분히 있었다. 그녀 또한 그리 생각하고 있었으니, 단지 서로의 감정을 부딪히는게 어려울 뿐이었다. 당연하겠지만, 그녀는 본인의 감정에게조차 눈길을 주지 못하는 사람이니까,
"......"
어디선가 살짝 앓는 소리가 난것 같은데, 기분탓일까? 스스로 밥을 떠먹을수 있는 나이인 사람이 둘인 이 상황이 조금은 우스꽝스러운 해프닝을 벌이는데엔 아마 그렇게까지 거창한 이유가 있는건 아닐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아무리 그녀라고 해도 얼굴을 제대로 들기 힘들테니까,
"역시 이거..."
...이미 들기 힘들어진 모양이다. 눈까지 초승달처럼 호를 그리고, 기쁜 마음에 이까지 드러난 그와는 달리 그녀는 거의 부끄러워 죽어가기 직전이었다. 아무렴, 평정심을 찾은 성격의 경우면 몰라도 지금의 성격인 그녀에겐 감당하기 힘든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냥 제가 먹을테니까요...!!"
홍당무까진 되지 않았지만 이미 귓가에까지 발갛게 물들은 모양새는 누가봐도 필사적인 만류일까, 고작 몇숟가락 떠먹여진 것만으로도 패닉상태가 된 모양이다. 사지 멀쩡한 사람이 별 이유도 없이 이런 행동을 한다면 부끄러운건 당연하겠지만 말이다.
방과후를 마친 지구는 친구와 가볍게 농구를 뛰고 남은 시간은 학상회실에 바칠 생각이다. 별관에 있는 학생회실로 돌아가니 소수의 아이들이 익숙하게 남아있고, 지구는 자신의 자리로 향하니 웬 반짝한 선물이 제 자리에 놓여있었다. 지구는 눈을 한번 꿈뻑하고 주변 아이들을 살펴보았으나 지구에겐 그 누구도 눈길 주지 않고 있으니 학생회 아이들 중엔 아닌듯했다. 짐작가는 인물은 없고.. 선물에 붙어 있는 포스트잇을 떼어 내용을 읽으니
<~....P.S. 담배 말고 이거 물어! ٩(๑`^´๑)۶>
혼난 걸까? 뒷머리를 긁적였다. 자리에 앉아 흰 리본을 풀고 조심스럽게 포장을 뜯으니 그 안엔 우주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지구도 함께였고. 이런 선물은 언제든 익숙치 않아서 그 자리에서 한참을 뚫어져라 보기만했다. 이거..먹는 건가? 그제서야 결론에 도달한 지구는 12개의 행성 중 당연하게도 푸른별 지구가 담긴 막대 사탕을 골라 들고 물끄러미 안을 들여다본다. 덤덤한 표정은 여전했지만 지구의 칙칙한 눈동자 안에 그 푸른별이 담겨 있었을까. 알록달록한 행성계가 모여 우주가 되는 거니까, 먹기 아깝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파랗고 빨갛기만 하던 지구 젤리보단 훨씬 낫다는 생각도. 그 지구 젤리는 놀림받듯 선물 받아 이때까지 몇 개나 먹었는지 모르겠다. 담배 대신이라고 하니 먹긴 먹어야 할 텐데 먹기가 아깝다. 그냥 집에 장식해둬도 될 것 같은데. 그렇게 둔다면 여동생들이 하나씩 훔쳐 먹겠지만. 남이 먹을 바엔 제가 먹는 게 낫지. 또 맛이 궁금하기도 해서 투명한 포장지를 부스럭거라며 벗겨내고 지구는 지구 사탕을 입에 물었다. 그냥 투명한 설탕 맛 이겠거니 했는데 지구에선 딸기맛이 났다. 달고, 베이직한 맛이다. 사탕이 담겨 있는 상자를 자세히 읽어보니 각 행성의 이름 밑에는 영어로 맛이 적혀 있었다. 지구는 strawberry. 그 옆의 태양은 cherry. 상당히 잘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데 먹고 있긴 하지만 아무래도 먹기가 아깝다. 사실 먹는 용이 아닌 거 아닌가. 메모지에 담배를 대신 하라는 말이 없었더라면 지구는 절대 먹지 않았을 것이다. 사탕 치고는 지나치게 예쁘지 않나. 아깝다. 이미 지구의 입에 물려 있지만. 지구는 지구가 먹어 버렸으니 한 칸의 빈 자리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보내준 사람은 먹으라고 보낸 것 같은데.. 남은 사탕들이 다 사라지기 까진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 아깝잖아. 그나저나 어떻게 사탕에 지구를 넣은 걸까, 반으로 쪼개도 지구는 지구일까. 그런 생각으로 멍을 때리고 있으니 저편에서 다른 아이가 '선배, 저도 주세요' 한다. 지구는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으며 말없이 포장을 덮었다. 그러고보니 선물해 준 아이와 나눠먹으면 좋을 텐데, 그 아이가 또 이 곳에 와줄까. 애초에 이것을 보고 제 생각을 해주었다니 받은 이의 입장에서 기분이 좋지 않을 수가 없다. 옆에 있었다면 머리라도 쓰다듬어 주었을 텐데- 적힌 거라곤 스펠링이 다고. 뒷목을 만지작거리다 붙혀져 있었던 노란 포스트잇에 책상위 제 볼펜을 들고 그 아래에 작게 끄적거렸다.
<넌 뭐 좋아해? 지구는 내가 먹어버렸어. 미안>
걱정 고마..까지 반듯하게 적다가 낯간지러운지 슥슥 줄을 그어버렸다. 그 아이가 다시 돌아와 보지 않는다 해도 이렇게 써 놓으면 남들이 손대진 않겠지 싶었다. 기지개를 쭉 키고 담긴 상자를 자리에 보기 좋게 세워두었다. 그것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지구는 여전히 입에 지구를 물고 그렇듯이 정리할 서류를 꺼낸다.
주원은 눈을 감은 슬혜를 향해 한 숟가락 더 먹이고 나서 주체할 수 없는 가슴 속 간지러움과 몽글몽글한 감정에 환하게 미소짓는다. 그러자 슬혜는 어지간히도 부끄러웠는지 "역시 이거..."하고 입을 떼더니 그냥 자기가 먹겠다며 얼굴을 잔뜩 붉히곤 말한다.
"푸흡..."
원래대로라면 흐름에 맡겨 슬혜의 카레와 밥이 전부 사라질 때까지 먹여줄 생각이었지만 저렇게까지 부끄러워하는 슬혜를 보니 미안함과 귀여움을 참을 수 없어, 순순히 숟가락을 슬혜의 접시 위에 올려두곤 손을 거두어 쿡쿡대며 어떻게든 웃음을 참으려 했다.
"미안, 미안. 푸흐흡... 잠깐. 푸흡... 푸하하하핫!"
주원은 배를 부여잡고 고개를 숙여 끅끅대다, 그 다음엔 고개를 홱 쳐들고 웃음을 크게 터트린다. 먹여준 별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렇게 하고 싶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 별 의미 없는, 하지만 마음에 따른 그 행동에 저리도 부끄러워하고 -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 올곧게 반응하는 것이 그의 마음을 얼마나 간지럽혔는지 크게 웃음을 터트리곤 두 눈에 찔끔 나온 눈물을 닦아내었다.
"미안해. 웃긴게 아니라, 그..."
도저히 '귀엽다.'라는 단어를 입에 담지 못한 주원은 그저 컵의 물을 벌컥벌컥 마신다. "커흑, 크흠." 빠르게 마신 탓에 살짝 사래가 들린 그는 어색한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조심히 그녀와 시선을 다시 맞춰본다.
"아, 배부르다."
그리곤 어색한 기류를 날려버리기 위해서인지 배부르다며 중얼거린다. 음식의 양은 평소의 주원에게라면 조금 적은 편에 속하긴 했지만 그가 배부르다고 하는 것은 절대 거짓이 아니었다. 아마 음식뿐만이 아닌, '다른 것'으로도 함께 포만감을 느끼게 된 것이겠지. 주원은 어색하고 따뜻한 기류 속에서 슬혜가 남은 카레를 전부 먹을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고양이 그림이 붙은 디퓨저라... 이 한눈에봐도 '고양이 친화적'인 선물은 그녀에게 있어선 '상당히 좋은 선물'임에 틀림없었다. 아마도 평범한 사람의 관점에서 보자면 기쁨 이상의 무언가려나? 단순히 고양이를 키울 사람처럼 보여서, 아니면 고양이를 키운다는 소문을 들어서, 그녀가 고양이 같아서, 아니면 그녀의 본질을 꿰뚫고 있어서 그러한 선물을 준것인지는 선물을 준 마니또 당사자가 아닌 이상 모르는 일이었다.
<커피가 아닌데 아메리카노라... 그럼 캡틴아메리카인가요? 🤭 아무튼 선물 감사드려요~ 제가 동물들이랑 산다는건 어떻게 아신 건진 모르겠지만... 모르셨대도 그런 부분까지 마음써주시는 것에 대한 보답은 언젠가 꼭 해드리고 싶네요~>
그렇게 적고나서 마니또의 선물 답례를 위해 놓아둔 것은 어떤 레스토랑의 VIP패스권이었을까?
<가족끼리도, 아니면 연인끼리도... 인원 따지지 않고 사용할수 있는 듯하네요~ 식사도 자유롭게 가능하구요~ 아무쪼록 좋은데 사용하시길 바랄게요!>
주원이 간질거리는 마음에 웃음을 터트리자 슬혜는 토라진 얼굴과 함께 화난 고양이와 같은 소리를 내었다. 이럴때 보면 그녀는 정말로 고양이의 환생이거나 고양이가 인간의 모습으로 변한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반대로 그녀는 주원을 보고 멍멍이 같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그래도 주원은 자신의 멍멍이 같음과, 슬혜의 고양이 같음을 생각하면 자신이 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진정하려고 마신 물 한 컵에 사래를 들린 주원을 보고 슬혜는 쌤통이라며 '베에'하곤 혀를 빼 내민다. 그 모습에 더 사래가 들려 "켈록, 켈록."하고 연달아 기침을 하다가도 가슴을 쿵쿵 두드리는 것으로 어떻게든 두근거림을 중화시키듯 물을 섞어 가라앉힌다.
"나는 그것보다 더 말했으니까 말이야? 갈비찜 먹을 때마다 맛있다고 외쳤으니까 100번은 될걸!"
서로 도대체 무엇으로 승부를 하는건지. 그럼에도 주원의 모습은 꽤나 진지했다. 그 진지한 얼굴로 양 손을 펴 10을 만들어 그녀에게 펼쳐보인다. 압도적으로 손가락이 부족해 보이지만, 그것으로 100개를 표현하려고 했던 것이겠지.
그녀가 식사를 끝내자 주원은 기다렸다는듯
"정리할게. 그릇 가져가도 돼?"
하고 물어본다. 아무래도 곧바로 먹은 사람의 그릇을 가져가는건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했나보다. 그것이 실제 매너기도 하고. 주원은 그녀의 대답을 듣곤 "편하게 쉬고있어. 침대든 소파든 어디를 써도 괜찮으니까." 하고 말한 뒤 슬혜와 자신의 그릇을 가져가 설거지를 하기 시작한다.
설거지를 하면서도 즐겁다는듯 정체불명의 콧노래를 부른다. 그릇이라고 해봐야 카레와 김치, 나물을 담은 작은 그릇이었기에 길게 걸리지 않았다. 설거지를 마친 주원은 곧바로 잘 빤 주방행주를 적셔 방금 식사를 마친 상을 깨끗하게 닦은 뒤 방금 사용한 주방행주를 잘 빨아 행주걸이에 걸어둔다.
뒷정리를 마친 주원은 슬혜가 쉬던 곳으로 걸어가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그녀의 옆에, 그렇다고 아주 가까운 거리는 아니지만, 그래도 멀지도 않은 거리에 조심스레 앉는다. 식사는 마쳤고, 이제 무얼 해야 하는지. 무슨 얘길 해야 하는지. 사실, 식사 다음에 뭘 할지는 마땅히 정해놓지 않았던 것이다.
다만 아무런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녀에게 '물어봐야만 하는 것.'이 있었기에. 다만 곧바로 그걸 묻기에는, 조금 뜬금 없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무슨 말을 해야할까.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꺼내야 할까 하고, 주원의 머릿속에선 이 다음의 스텝을 찾는 것으로 가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