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어제 꿈이 영 안 좋았단 말이지. 그래서 출근하고 별 생각 없이 접속해봤다가 주원주의 레스를 본 것으로 보아 주원이의 마니또가 나에게 그런 꿈을 꾸게 한 모양이야. 그러니까 주원주는 감사를 자신의 마니또에게 하면 되는거야. 물론 그게 나인지 아니면 다른 이인진 나도 모르겠지만!
오늘도 역시나 학생회실 부회장 자리에 선물이 놓여있었다. 작년 마니또 때는 이렇게까지 많이 받은 것 같지는 않은데. 미리 와 있던 인원들이 좋겠다는 말을 하는 것을 뒤로하고 자리에 앉아서 사진과 함께 붉은색 포장지로 싸여있는 어떤 상자 같은 것을 들어서 가볍게 흔들어본다. 무게감이 있지는 않은데. 사진에는 시커멓게 타버린 무언가가 찍혀있었는데, 쓰여있는 글을 보아하니 저번에 굽다 실패한 버터쿠키인 것 같았다. 이어서 포장을 풀자 고급스러워 보이는 만년필이 눈에 들어왔다.
" 이거 비싼거 아니야? " " 그러게! "
주변에서도 그걸 보고 몰려들어서 한마디씩 하는데, 나는 잘 모르니까 아, 그냥 비싼가보다. 하는 생각으로 만년필을 꺼내서 손에 쥐었다. 쥐는 촉감이 좋았는데, 예전에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만년필은 길을 잘 들여야한다고 하던데. 내가 잘 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기왕 받은 선물이니까 집에서라도 써보자는 생각에 다시 보관되어있던 상자에 잘 넣는다.
' 이런 비싼건 좀 부담되는데 말이야. '
태어나서 내 인생에서 가장 비싼걸 사본건 노트북이었으니까. 그것도 집에서 독립하면서 정말 필요해서 산거라 이런 물건 자체를 받는다는게 좀 떨떠름했다. 그래도 소중히 사용하자, 라는 생각과 함께 포스트잇을 하나 뜯어서 책상에 붙여두고 감사의 말을 전한다.
[저번에 사준 버터쿠키는 잘 먹었어요. 그리고 만년필이라니, 한번 잘 쓸 수 있도록 노력해볼께요.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많은 관심 감사합니다. >.ㅇ]
이 정도면 괜찮겠지. 포스트잇 정리하지 말 것! 이라는 글도 같이 적어두고서 나는 자리를 뜬다.
"으이구우우우!"하고 애증이 교차하는 목소리로 볼을 꼬집다가도 슬혜가 빼액 하고 비명을 지르며 속사포로 말을 쏟아내자 더 힘을 세게 주려다가도 그러지 못하고 그저 눈을 크게 꿈뻑이며 볼을 약하게 쥔 상태가 되었다.
그 말을 다 듣고 나서 의심하듯 엺게 뜬 눈으로 슬혜를 지이이- 뚫어져 보면서도 "내가 놀란 건 둘째치고, 그러다 떨어지다 다치기라도 하면 어쩔거야? 이불이 그나마 얼마 높지 않아서 다행이지. 다음부턴 그러면 안돼. 차라리 침대에 누워있어. 알았어?"
하고 말하곤 아직 양 볼을 엄지와 검지로 잡은채로 대답을 기다렸다.
그녀가 어떤 식이든 대답을 하고 나자 주원은 그제서야 양 볼에서 손을 떼곤 일어나 카레쪽으로 향한다. "밥먹자. 준비할테니까 소파에 앉아있어."라고 무심하게 말한 주원은 카레에 다시 약불을 올리고 찬장에서 햇반을 꺼내어 데우기 시작했다. ...사실 그다지 반응이 없어보이면서도
'방금 뭔데?! 이런 슬혜 모습 처음봐. 언제나처럼 차가운 모습이 아냐... 싫냐고? 아니.... 너무 귀엽잖아! 심장에 위험할 뻔 했어. 아니, 위험했다고! 끄으으으으 하, 하지만 이런 모습 보여줬다간 또 기세등등하게 놀리려고 할테니....'
라며 어떻게든 귀여워하는 반응을 참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다가도 속마음이 새어나와 "으흐흐."하고 음흉하게 슬혜에게 들릴듯 말듯 웃곤 "크흠흠!"하고 괜히 헛기침으로 그것을 날려버리려 하고 있었다.
"아, 미안. 상좀 펴줄래?"
애써 마음을 가다듬으며 먹을 준비를 하던 주원은 고개를 돌려 슬혜를 보곤 상을 펴달라 부탁했다. 둥그렇고 흰색의 상은 다리가 접힌채로 주방의 싱크대쪽에 눕혀져 있었다. 주원은 흰색의 둥근 접시에 데운 햇반을 깔끔하게 반으로 놓고, 남은 반쪽에 카레를 적당량 붓는다. 그렇게 두 접시를 슬혜가 편 상으로 들고가 조심히 내려두었다.
지루하다. 선하는 그렇게 생각했다. 수영 연습은 일찍이 끝이 났다. 오후 시간에 예약이 있어서 수영장 사용이 불가능하다나 뭐라나. 별로 중요치 않은 정보라 한 귀로 흘렸던 것 같다. 문제는 시간이 붕 떠버렸다는 점에 있다. 아무도 없을 집에 가고픈 마음은 없었으니 체육관 근처나 어슬렁거리며 시간이나 죽이고 있는 차였다.
투명한 체육관 문 너머로 홀로 달리기 연습을 하는 학생이 보였다. 비이상적으로 눈이 좋은 탓에 먼 거리에서도 이목구비가 훤했다. 미인이다. 노골적으로 성의없던 선하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른다. 설렁설렁 가벼운 걸음걸이로 체육관 내부로 들어선다. 운동화가 체육관 바닥에 미끌어지며 나는 고무 소리가 퍽 듣기 좋았다.
"안녕? 혼자서 연습하고 있는 거야? 대단하다."
유들유들한 미소와 함께 선하가 슬금 다가왔다. 선하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본다면 뒤에 꼬리 살랑거린다 욕했을지도 모를 모습이었다. 가방에서 물병을 꺼낸다. 스포츠용으로 입 닿는 부분이 툭 튀어나온 형식이었다.
비랑은 신기한 듯이 이웃집 토토로 열쇠고리를 만지작거리네요. 오래전의 명작 애니메이션이라 어떤 캐릭터인지 알고는 있지만 비랑이 본 적은 없습니다. 그런 우연도 있는 거겠죠? 열쇠고리라면 열쇠에 달아 주어야 마땅하겠지만 비랑은 열쇠고리를 달진 않고, 그저 옷 안주머니에 소중히 집어넣을 뿐입니다. 열쇠를 잃어버렸다가 같이 잃어버리고 싶지도 않고, 그러면 마니또인 누군가를 볼 낯도 없으니까요. 그나저나, 뭔가 오해가 있는 게 아니려나요... 비랑은 장난기 있는 눈으로 포스트잇에 뭔가를 쓰기 시작합니다.
비와 관련된 동요의 가사 두 줄이네요. 어릴 때 한두 번쯤은 들어봤을 것 같은 노래입니다. 그리고 마니또를 위한 이번 답례는 생수 한 통입니다. 새벽이슬이라는 이 생수는 인지도가 적은 편입니다. 목넘김이 좋고 물맛이 깔끔해서 미즈와리(水割り)용으로 들여놓는 바도 몇몇 있지만, 청소년들에겐 여전히 먼 이야기네요. 다만, 몇 년 전 <네가 제일 좋아하는 시간이 되고 싶어>라는 광고 카피라이트가 반짝 떴을 때라면 이름을 들어봤을지도 모릅니다. 새벽이슬을 아는 사람은 다 이 카피라이트를 알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지요. 비랑은 생수에 포스트잇을 붙이고 책상 위에 올려놓습니다. 어떤 반응을 보일지 기대되네요.
시아는 홀로 거친 숨을 내쉬며 체육관 안을 달리고 있었다. 평소에는 늘어트리고 다닐 머리카락도 힘을 주어 포니테일로 묶고 몸에 핏 좋게 입은 검정색 트레이닝복 차림의 시아는 누가 보아도 진지한 얼굴로 열심히 다리를 움직이고 있었다. 영락없는 운동선수의 모습이었지만, 그와 별개로 꽤나 느릿느릿한 달리기였다는게 문제였다.
" 헉...헉... "
열심히 다리를 움직여 달려보지만 오히려 속도는 더 느려질 뿐이었고, 땀만 비오듯 쏟아질 뿐이었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뺨에 달라붙는 것이 느껴지지만 그런 것은 아랑곳 하지않고 무식하게 앞으로 달려나갈 뿐이었다.나름대로 신경을 써서 산 운동화는 꽤나 좋았지만, 역시 그녀의 달리기를 빠르게 만들어주진 않았다.
" 어... "
시아는 몇바퀴, 몇분이나 뛰었을지 모르지만 한참을 달리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자 거친숨을 몰아쉬며 멈춰선다. 땀에 젖은 셔츠를 걸친 시아의 가슴팍이 빠르게 오르락 내리락하며, 그녀의 호흡이 꽤나 흐트러진 상태라는 것을 보여주고 잇었다. 모르는 얼굴, 적어도 동급생은 아니었다. 하지만 저 여유는 분명 후배도 아닐 것이 분명했다.
" 선배...이신가요..?감사합니다.. 헉..헉.. 아얏.. "
타는듯한 갈증이 밀려왔기에 조심스럽게 인사를 건내며 손을 내밀던 시아는 다리가 풀려버린 듯 뒤로 주저 앉아버린다.
" ...에..그.... 그게.. "
시아의 얼굴이 붉은 빛을 머금어가기 시작했다. 땀에 젖은 새하얀 피부 위에 홍조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분명 부끄러움의 감정이었다.
그녀는 무언가 짐작가는 것이 있는지 주변을 둘러보다가 열려있던 커튼들을 다시 다 닫고서 불을 꺼도 되냐고 물어본 뒤에 부실의 불을 꺼버렸다. 그러자 한 비커에서 야광 빛이 나고 있었는데, 뭔가 동화에 나오는 마녀가 만드는 시약과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흐음, 옛날 사람들은 저런걸 보고 마녀라고 생각한걸까.
" 신기하네. "
아무래도 약학부의 불빛은 형광등 같은 것이 아닌 저렇게 은은하게 나오는 야광의 빛이라 보는 사람을 더 섬뜩하게 했던 것 같다. 진짜로 귀신이라고 의심할 수도 있을테니까. 다행히도 위험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 그럼 다음부턴 보관에 유의해줘. "
개인적으로 이런 일로 부실에 들락날락하는걸 별로 안좋아한다. 괜히 쓴소리 했다가 싸움 날뻔한 적도 있고, 듣는 사람이나 말하는 사람이나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꾸준히 접수되는 불평불만을 해결해야하는게 학생회니까.
" 음 ... 그럼 이건 해결이 됐고. 기왕 여기에 온거 건의사항이나 좀 들어볼까. 추가로 놓고 싶은거나 요구사항 같은거 있어? "
점심시간이었다. 문하는 어제 귀갓길에 여기저기 들러 사두었던 물건들이 든 봉투를 쥐고 교실로 올랐다. 평소에 다른 학생들과는 다르게 계획된 운동특기생 일정을 따라가느라 교실에 얼굴 비추는 게 드문 문하로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 스스로도 그 자신이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방과후에 확인해도 될걸 왜 굳이? 왜 굳이 지금 확인하고 싶어지는 걸까?
스스로를 향해 스스로가 던진 의문에 뭐라 반론을 제기할 틈도 없이, 문하의 발은 어느새 그를 그의 교실 앞에 데려다놓고 있었다. 문하는 뒷문을 드르륵 열었다. 역시나 점심시간의 교실은 거의 대부분의 아이들이 삼삼오오 자기 볼일을 보러 가거나 교내의 다른 어딘가로 놀러가 있기에 반이 한산했다. 그나마 아직 반에 남아 있던 너더덧 명의 아이도 뜬금없이 교실에 얼굴을 비춘 문하를 신기하다는 듯이 한번씩 힐끔힐끔 돌아보는 게 전부였다.
문하는 머릿속에 떠오른 쓸데없는 의문을 접어두고, 사물함을 툭 열었다. 오늘은 어떤 모양 장식을 넣어놓았을 것인가. 육해공에서 해는 해마, 공은 알바트로스였지. 둘 다 바닷가와 관련이 있는 짐승들인데, 육에는 바다사자 같은 것이라도 넣어놓았을까?
그러나 문하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물건이 사물함에 들어있는 것을 보고 문하는 잠깐 할 말을 잃었다. 조금 고급스런 젤리들로 가득차있는, 크리스탈 장식 3개를 한꺼번에 보관할 만한 아크릴 케이스가 거기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문하는 그걸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다가, 봉지를 뒤적여 뭔가를 꺼냈다. 알바트로스와, 원래 같았으면 오늘 마니또가 놓고 갔어야 할 세번째 크리스탈 장식품을 위한 전시용 케이스 2개였다. 문하는 그것을 허탈한 손길로 그 큰 케이스 옆에 늘어놓아 보았다. 전시용 작은 케이스 3개가 졸지에 쓸모없는 것이 되었다.
문하는 푸흐흐흐흐, 하고, 실소를 소리내어 푸들푸들 흘려버리고 말았다. 자기들끼리 이야기나누고 있던 반 아이들이 자기가 방금 뭘 들은 것인가, 하고 뜨악한 표정으로 문하를 돌아보건 말건.
'이런 안 도와주는 마니또를 봤나...' 누가 들을 사람도 없는 한탄을 마음속으로 한가득 실소 담아 뇌까린 문하는, 마니또가 두고 간 3개의 전시용 케이스에 들어있던 젤리 봉지를 가볍게 툭툭 빼냈다.
그리고 자신이 산 케이스 안에 들어있던 해마와 양철 보관함 안에 들어있던 알바트로스를, 마니또가 두고 간 새로운 전시용 케이스에 테마별로 옮겨담아 전시해두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 빈 전시 케이스 3개를 주르르 줄지어세워놓고, 문하는 다시 봉지를 뒤적여서는 어떤 카페의 멋들어진 로고와 약도, QR코드가 적혀있는 티켓 같은 것을 케이스 앞에 놓아두었다. 마니또를 위한 선물이었다.
역 앞에 있는, 어떤 카페의 카푸치노 쉐이크 교환권이었다. 문하의 피부로도 최근의 기온이 조금씩 올라가는 게 와닿고 있었기에, 이 이상한 컬렉션을 제공해주기 시작한 이 별난 마니또에게 이 정도면 꽤 괜찮은 보답이 되지 않을까 하는 계산이었다. 마니또가 그것을 가져갈 수 있도록, 문하는 포스트잇에 간략하게 글자를 휘갈겨적어 교환권 위에 붙여놓았다.
1. 케이스 내가 산다니깐. 2. 이거 괜찮더라. 한 잔 마셔봐.
그걸 붙여놓고, 문하는 다시 한 번 나직이 소리내어 실소했다. 나 원 참, 내가 무슨 바보짓을 하고 있는 거지.
시아가 달리기에 탁월하지 못하다는 사실은 진즉에 알았다. 운동을 하는 선하 입장에서는 달리기에 서투르구나,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선하는 내색 않고 있었다. 애초에 상대도 저도 전문가가 아닌지라 함부로 평가하지 못한다. 선하가 집중하고 언급해야할 부분은 시아의 노력이지 실력이 아니었다. 슬쩍 시아의 옷차림과 운동화를 캐치해낸다. 신경쓴 티가 났다. 어렴풋이 작년 자신이 이맘때즘 치룬 시험을 떠올린다. 그때 자신도 달리기를 했었다.
"아마 맞지 않을까? 난 3학년이거든. 친구는 몇학년이야?"
선하의 시선이 떨어지는 땀방울에 머문다. 그 다음에는 그 물자국이 머문 볼, 발갛게 달아오른 볼을 잠시 지켜보았다. 이런 작은 것들에 집중하는 것이 자신을 피곤하게 만드는 걸 알면서도 멈추지를 못한다. 퍽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나갔기 때문에 부자연스럽지는 않았다.
"이런, 내가 널 놀라게 했나보네. 어떡하지, 내가 네게 부담을 준걸까? 그게 아니고, 내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 네 곁에 있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