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지구는 평범히 책상 서랍 속 교과서를 꺼내기 위해 손을 넣고 뒤적였다. 그런데 뭔가 뾰족한 게 손끝에 닿는 거 같기도. 아침 조례 전의 소란스러운 시간이었고, 지구는 종이라도 구겨졌나 싶어 상체를 숙이고 안에 든 물건을 꺼내보니.. 분홍색 바람개비. 가. 뭐지? 당황스러움에 바람개비를 재빨리 다시 서랍 안에 넣고 주위를 둘러 보았다. 바람개비를 꺼내던 지구를 눈치 챈 인물은 없어 보였고. 또, 지구를 주의 깊게 살펴보는 인물도 없어 보였다. 지구는 침착하고 자연스럽게 아무렇지 않다는 얼굴로 서랍 속에 숨어있는 분홍색 바람개비 하나와, 파란색의 바람개비 하나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이건, 뭘까. 누군가 동아리 시간에 바람개비를 만들고 넣어 둘 데가 없어 지구의 서랍 안에 넣은 게 아닐까. 지구는 의아함에 볼을 긁적이다 일단 교과서를 마저 꺼내고자 교과서를 서랍 속에서 집어드니 조그만 쪽지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바람개비를 맡겨 달라는 쪽지가 아닐까 하고 주워들어 펼쳐 읽어보니.
<~..옥상에 올라가서 연기만 보고 있으면 되겠어요? 양손에 들고 바람을 만끽해보세요.>
지구는 제가 양 손에 각각 바람개비 하나씩을 쥐어들고 바람에 맞춰 빙글거리는...까지 상상하고 관뒀다. 뭐가 뭔진 잘 모르겠지만 지구의 마니또는 그를 꽤 잘 알고 있는 인물인 듯했다. 아마도. 흡연이나 하는 불량스러운 모습이 아닌 지구의 그런 천진한 모습이 진짜 보고 싶었던 걸까 그녀는. 나도 벌써 19살인데. 내년이면 성인인데.. 뒷머리를 긁적이다 우선 바람개비를 하복 상의 앞주머니에 넣어두었다. 주머니에 넣으면 바람개비가 부서질 테니까. 앞주머니에 알록달록한 바람개비가 나란히 들어있으니 칙칙한 그도 꽤 귀여워 보이는 것도 같고.. 친구들이 놀린다면 마니또에게 이를 것이라고 할 생각이었다. 선생님이 들어오실 때까지 지구는 가만 멍을 때리다, 쪽지에 적힌 마지막 줄이 생각 나 대충 이면지를 꺼내어 반듯하고 정갈한 글씨를 끄적였다.
<한 손에 하나씩 드는 걸로 하자. 너랑 나.> -🌎
지구 그림까지 대충 그려놓고 이면지를 작게 찢은 뒤 쪽지 모양으로 접은 지구는 잠깐 고민하다 서랍 속에 넣어두었다. 전해질 수 있으려나. 잘 모르겠다. 답변이 안 올 수도 있는 거고. 그리 큰 기대는 하지말자고 생각하며 지구는 손에 턱을 괴고 하품했다. 1교시가 끝나면 옥상에 올라가야겠다.
진지한 얼굴로 추리를 이야기하고 나서, 이제는 연호 선배의 미친 계획에 찬동하기 시작했다. "오오! 혹시 천재에요? 저도 아직 교내를 다 돌아보지는 않아서 언제 한 번 높은 데서 내려다봐야지 하고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그러다가, 잠깐 고개를 갸웃 기울이고 별관이 생긴 모습에 대해 떠올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생겼더라? 창문을 타고 갈 수 있을까? 아니, 역시 그건 어렵지. 퇴근하는 선생님들한테 걸리면 저번보다 크게 혼난다. 뭔가 매점이 급식실 근처에 있었던 기억은 나는데. 그러다가 손바닥에 주먹을 통 내리치면서 무언가 깨달았다는 얼굴을 했다.
"제가 생각해 봤는데요! 역시 옥상에 올라가면 매점 위치를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무언가를 깨달은 것과 논리가 조금이라도 발전하는 것은 전혀 관계가 없는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직 입학한 지 반 년도 안 된 내가 학교의 구조를 외우라니 너무 가혹한 처사다. 우리 집 화장실 위치도 겨우 외웠는데. 자고로 깨어 있는 대부분의 시간을 직감으로 때우며 불의의 위협은 대충 동체시력으로 피하는 내가 학습이라는 걸 했을 리가 없다. 그러니까 높은 곳에서 살펴본다는 발상 자체가 이례적으로 머리를 쓰는 일인 것이다.
85점도 나쁜건 아니지만, 이해했다고 생각한 단원에서 점수가 이따구로 나오니 씅 안내고 배기겠나, 뭐 그렇게까지 짜증난건 아니고 그냥 쪼끔 심기불편 한 것 뿐이다. 아주 조금, 정말로 조오금.
그는 팔짱을 끼고 게슴츠레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이걸로 종이비행기라도 만들어 날려버리면 좀 개운할까, 싶었지만 자신 이전에 어떤 놀 줄 아는 선배가 옥상에서 종이비행기를 날렸다 된통 깨졌단 소문을 기억하곤 볼 안쪽 살을 살짝 씹었다. 종이 비행기는 외국 문물이니 욕먹은 거고, 전통적인 걸 만들어 날리면 혼날리 없지- 의미없는 무의식의 흐름대로 손을 움직여 있는 재료로 연을 만들어 보았다. 뼈대를 대신할 것도 교실엔 없어서 그냥 모양만 연일 뿐인 종이장이지만. 턱을 괴곤 가오리 모양으로 장식한 야매 연을 살펴봤다. 실도 없고, 뼈대를 붙인다 해도, 날순 있으려나? 옆자리 짝궁한테 이거 어떠냐고 물어보자 돌아오는건 영혼없는 '오...' 뿐이였다.
"튕기긴, 멋있잖아?" 마음에 드는 답을 못 듣자, 그는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나선 옥상으로 설렁설렁 걸음을 옮겼다. 이왕 만든거 던져라도 보자는 별 의미 없는 마인드였다. 실내화를 끌며 계단을 올라 슬며시 옥상 문을 열어보니, 벌써 다른 누군가가 연을 날리고 있었다. 이런 건 상상도 못 했는데? 이때 주원이 옥상 출입구 쪽을 돌아봤다면 황당한 기색의 그를 볼수 있었을거다. 제멋대로 뇌내회로가 돌아가선, 그는 복도에서 몇번 봤을 뿐인 키 큰 금발의 선배에게 묘한 동료애가 느껴졌다. 저 선배도 분명 시험을 망쳤던 걸꺼야! (아님)
보아하니, 저쪽은 준비도 완전 제대로 했는지, 연이 제대로 날아다니고 있었다. 여기서 상식인이라면 잘 놀고 계신 선배를 건들이지 않고, 눈치 채시기 전에 빠른 후퇴를 했겠지만 그는 그딴 눈치보단 자기 자신이 즐거움이 더 중요한가보다. 조용히 발걸음을 주원이 있는 쪽으로 옮겼다.
"우와, 제것도 도와줘요 선배님-"
의미 모를 의성어도 넣어가며 기세 좋게 다가간것 치곤 주원과 조금 멀찍히 떨어져선 부탁하고 있다. 아무리 그래도 초면인 사람한테 완전히 친한척 하는건 너무 쑥스러운가 보다. 가오리 모양 연을 든 손을 살랑거렸다. 다른 한 손은 갈 곳을 잃어 어색하게 허공을 짚은채로...
저지를 벗자 드러나는 맨투맨과 셔츠 조합. 둘 다 사복을 입고 있으니 벌써 밖에서 만난 듯한 기분이 들어 웃음이 나왔다. 허락을 맡고 나왔다고 해도 너무 늦게 들어가면 안되는 신세지만. 슬쩍 웃으며 거부감이 없다는 것을 표현하고 인적이 드문 기숙사 뒤뜰로 손을 잡아 이끌었다. 선선한 날씨, 따뜻한 손. 이 손이 누구에겐 안정제일 수도 있을 터다. 궁금하다는 것처럼 손끝이 손바닥에 닿을 때부터 완전히 맞잡을 때까지 네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던 여자는 흔쾌한 수락과 함께 네 옆자리를 차지하고 이어지는 질문에 고개를 으쓱였다.
"아직 이렇게 입기엔 이르지. 이런 취향이야? 참고해야겠네."
사복이긴 하지만 따뜻해져가는 날씨에도 좀 추워서 몸이 웅크려지는 건 사실이다. 이때 네 가방에서 다시 꺼내지는 저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어서 웃으며 기꺼이 받아 무릎에 덮었다. 음, 옷에 남은 네 체온이 마음에 들어 발목을 꼰 채 여전히 얽혀 있는 두 손을 내려다 보았다. 늑대라기엔 한없이 무해해 보이는 손인걸. 따뜻하고 말랑말랑하고. 감상에 젖어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직 이렇게 입기 이르다면 이유를 설명해야 할 테니.
"편하게 먹으라고 이렇게 입고 온 건데? 모처럼 해인이가 나랑 충전하는데 포옹이나 하고 가라고 야박하게 굴긴 싫고, 그렇다고 보이는 곳에 흔적이 남으면 곤란하거든."
늑대와 양이 상호 협의 하에 억제제를 복용하지 않은 채 같이 있는 상황은 줄다리기 같은 것이었다. 하고 싶은 것이 명확하고 뚜렷했기 때문에 백가예는 팽팽한 줄끝을 틀어쥐고 먼저 잡아당겼다. 꽃향기도, 먹음직스러운 향기도 아닌 마른 흙과 잎을 층층이 쌓아올린 사이에 달디 단 머스크 향이 스며들어 매캐하게 마무리되는 페로몬이 가로등 불빛 아래 불길처럼 공간을 메우고 있었다. 늑대마저 삼킬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 양이 해인의 반대편 어깨에 잡지 않은 쪽의 손을 올리며 속삭였다.
"우리 만난지 참 오래 됐다. 그런데 언제부터 이랬더라, 해인아."
그게 나쁘지 않아. 백가예가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옷에 걸고 가까운 거리에서 해인의 얼굴을 지그시 주시했다. 언제라도 접촉을 하겠다는 듯이.
>>436 뭐어 전체이용가가 아니니까. 가족이 다 같이 보는건 아니긴 하지. 막내 동생은 못 봐!
>>437 그게 손을 베일수도 있는거구나. 난 또 비늘 얘기하는줄 알았어. 참치로서 말하는 것인가, 진짜 슬혜주의 머리카락을 말하는 것인가. 흐~음 그렇구만. 그렇다면 사이버- 쓰담쓰담이니 관계 없다! 나는 슬혜주를 쓰담, 는다는 기분만 내는거니까! 쓰다듬는다! (쓰담쓰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