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이름표를 읽었다. 파란색인 걸 보니 2학년인 모양이었다. 평소 다른 학년에 관심을 크게 두지 않는 편이다. 따라서 눈살을 조금 찌푸리고 홍현이에 대해 떠올리려고 해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최민규는 빠르게 포기했다.
"부르고 싶은 대로 불러. 그런 걸로 가오 잡으면 좀.. 모양새 그렇잖냐."
걸린 적이 있냐는 말엔 조금 찔린 표정을 했을지도 모른다. 곧이어 다시 무던한 표정으로 돌아왔지만. 애초에 교칙이 엄한 학교가 아닌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뭐.. 크게 문제되지는 않았지만 말이야."
대충 얼버무렸다.
"응, 운동.. 육상부야. 너는? 동아리 든 곳 있어?"
딸기에이드란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계산대를 향했다. '여기 딸기에이드 하나랑, 또.. 아이스초코랑.' 낮은 목소리가 사람 목소리들 틈새에 드문드문 들렸다. '아뇨, 테이크아웃 할 거예요. 네.' 주문을 마무리하려다가, 저 멀리 홍현을 한번 힐긋 보았다. 그리고 뭔가를 하나 더 주문했겠지.
또한 진심이었다. 중요한 시기인 만큼 컨디션 조절이 중요하니 모처럼 보건실에서 푹 쉬는 것도 나쁘지 않으니까. 보통 내신을 빡빡하게 관리하는 학생이라면 시간을 아껴 공부하려고 할 테니 깨운 거지만. 바로 뜬 눈 안으로 형연한 이채를 감지하며 마찬가지로 넉살 좋게 대꾸했다.
"몇 번이나 고민할 정도면 그냥 오지. 시험 끝나면 내가 갈게. 자고 있으면 어떡할까?"
간만이라고 느껴지는 건 착각이 아닐 것이다. 볼일이 있어 2반에 들릴 때마다 해인이 있는 곳을 훑긴 했지만 그때마다 눈에 띄게 피곤해 보이거나, 쪽잠을 자고 있거나 바빠 보였으니. 양으로 태어난 지도 어언 18년 가량. 늑대에 대한 사전조사를 진즉에 끝마치고 남은 여자는 품은 의문과 별개로 대꾸없이 해인의 말을 경청했다. 말을 고르는가 싶다가 입을 열었다.
"아쉽네. 적절히 사용하면 좋은 능력인데 조절이 안된다니. 따로 생각해둔 진로라도."
나라면 그렇게 했을 것 같은데, 라는 듯한 뉘앙스가 담긴 투였다. 말재주 만으로 사람을 제 편으로 만드는 게 가능하다면 쓰임새가 무궁무진하지 않은가? 처지가 안 좋은 형편이라면 타고난 재능으로 숙명이라는 올가미를 벗어던질 것 같은데. 윤리 면에서는 걸리지만. 미래도 중요하지만 현재 또한 그렇기에 여자의 눈에는 육체적인, 정신적인 피로로 곤혹에 빠진 늑대가 사람과 겹쳐 보였다. 이어지는 걱정에 바람빠지는 소릴 내며 살짝 눈을 감았다 뜬다.
"시험기간이 되면 수면 시간을 한 시간씩 줄이거든. 난 괜찮아. 적어도 몸만 힘들잖아."
그리 말하며 천천히 손을 뻗어 해인의 앞머리를 결을 따라 정돈해주었다. 심지가 강한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로 삐져나오는 모습을 보며 웃어버린다. 반곱슬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곱슬기가 강한 걸. 느른히 웃으며 물었다.
"해인아. 너도 그래? 누군가... 필요하진 않고?"
지나가듯 물은 질문이다. 충분히 도와줄 의사가 있었기에 던져보는 것이 가능한. 오늘치 억제제는 복용했지만 약속 정도야 잡을 수도 있겠지. 연료가 필요한 재능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언급했지만 어찌 되었든 현재는 필요한 상태가 아닌가? 불온한 연상 작용은 백가예의 머릿속에서 은밀하게 조직된다.
직접 보여준다고? 그래도 되는 걸까. 제가 감히. 미천한 제가 위대한 고양이 님을. 하지만 달콤한 유혹 앞에서 의연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고, 사하는 그 희귀한 케이스에 해당되지 않았다.
"직접 만날 수 있으면 나는 진짜 좋죠. 나중에 기회 되면 직접 인사할게요."
처음 만난 사이인데 푼수처럼 떠들어대고 싶지 않아 최대한 침착하게 대꾸하긴 했다. 얼굴에 서린 기대감까지 완전히 감추진 못 했지만. 좋은데 어떻게 해.
"참고해준다니 고맙네요."
제 손을 포개는 양손을 보고 사하가 눈을 깜빡거렸다. …고양이식 인사법인가? 어리둥절한 표정도 잠깐, 슬혜와 닿은 손가락 마디를 굽혀 잡곤 가볍게 흔들었다. 아무렴 어때. 반가움만 전달됐다면 그만이다. <현슬혜.> 가볍게 중얼거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잊지 않고 잘 기억해두겠다는 나름의 다짐이다.
"잘 부탁해요."
요리부에서 한 번, 간식을 직접 만든다는 말에서 두 번 놀랐다. 아무것도 안 하면 중간이라도 갈까 싶어 가만히 있는 사하. 사실은 못 하는 게 많았다. 일단 몸 쓰는 일은 형편 없었고, 뭘 만드는 일에도 영 소질이 없었다. 말 그대로 먹고 죽지 않을 정도의 요리가 최선이었다. 간이 맞지 않는 건 다반사요, 태워먹지 않으면 다행이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