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는 버니가 눈 앞까지 확 다가왔음에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속으로는 꽤나 놀란 모양이지만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았다. 사람이 많이 당황하게 되면 그렇게 되는 법인가보다. 레오는 꿀꺽, 하고 침을 삼키고 그 놈의 진실을 알려주겠다는 말에도 레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하는 말을 담담히 듣고만 있었다. 이야기를 끝까지 들은 다음에야 심경의 변화가 생겼다. 만약 버니가 하는 말이 전부 사실이라면, 그게 전부 사실이라면. 레오의 동공이 흔들렸다. 불편한 진실과 달콤한 거짓. 인지부조화. 그에 대한 방어체계는,
레오는 속으로 생각했다. 거짓말이라고. 전부 거짓말이라고. 그도 그럴것이, 버니도 그 탈쟁이들 중 한 명이다. 그리고 중 또한 탈쟁이다. 그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감싸주기위해 그런 말을 했는지도 모르지. 어쩌면 그냥 자신을 속이기위해 그런 말을 했는지도 모르지. 이유야어찌되었던, 또 그 이유를 알 수는 없겠지만 아무튼 거짓말이다. 거짓이다. 간사한 뱀의 혀다. 진실이라곤 찾을 수 없는 거짓이다. 레오는 스스로 그렇게 판단을 내렸다. 그래야 자신의 마음이 조금 편해지니까. 불편한 진실때문에 목이 졸리고 하늘이 낮아져 숨을 쉴 수 없게되고 지독한 자기혐오에 빠지느니 달콤한 거짓을 먹고 편해지는게 나으니까.
" 음. "
그렇지. 편할대로 행동하면 되는거지. 레오는 아- 입을 벌리고 먹여준 도넛을 우물우물 씹었다. 비싼게 비싼 값을 한다는 것인지 부드러운 것이 제법 맘에 들었다. 억지로 고개를 돌리고 귀를 막고 눈을 감아도 그 자리에 있는 불편한 진실이라는 것이 자꾸만 목을 조른다. 자꾸만 고개를 돌려 강제로 눈을 마주치고 하늘을 눌러 숨쉬기 힘들게 만들어버린다. 자기혐오에 빠지게 만들고 끝없는 모순속에 정신을 어지럽게 만든다. 그럼 내가 지금 필요한건 뭘까.
" 나도 뭐 하나 알고있는게 있는데. 아니, 알고있다기 보다는.. 그냥 내 추리?라고 해야하나. 근데 네가 들으면 분명히 싫어할거야. 응. 분명히. "
아즈카반과 매구에 대한 자신의 가설. 레오는 굳이 입 밖으로 꺼낼 생각이 없었다. 적어도 조금 더 완벽한 증거들을 가지고 오는게 아니고서야 굳이 입 밖에 내어서 기분을 상하게 만들고 적을 늘릴 필요는 없다. 레오는 습- 하고 깊게 숨을 들이쉬고 파- 하고 또 크게 내뱉었다. 자꾸만 불편한 진실이라는게 스스로를 좀먹고 괴롭혀서. 그저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편해질지도 모르는데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서 지금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꿈 속의 그 녀석. 또 다른 레오라는 그 녀석을 만났으면 좋겠는데, 그럴 수 없는 상황이지. 차라리 잠깐 잊고 싶은데.
" 야. 부탁 하나만 하면 들어줄래? 어려운건 아닌데. "
편안함과 포근함을 느끼고 싶었다. 인지부조화에서 오는 불편한 진실과 지독한 자기혐오 그리고 마주하고 싶지 않은 진실이 자꾸만 고개를 돌려 눈을 맞추고 하늘이 낮아져 숨쉬기가 힘들어지고 목이 졸려오는 이 짐을 잠깐 내려놓고 싶었다. 그래서 레오는 조금 본능적으로 생각하려고 했다. 그야, 짐승으로 변할 수 있는 레오가 가장 잘 할 수 있는것중에 하나니까.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널 보면 그 가느다란 목을 비틀고 싶다고 생각했다. 새하얀 머리카락이 부채꼴로 퍼지고 네가 다리를 버둥거리다 그대로 숨을 거두면 좋았을 것 같다. 아니면 네 존재는 눈사람이고 내가 만들어낸 허상이라 목을 비틀면 녹아버려 영영 사라졌으면 했다. 단지 허상이란 것이 추측이 아니라 확신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세상은 절대 내 편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네 편도 아니었다. 그저 세상은 먼저 행동하고 취하는 사람의 뜻대로 움직이는 것이었다. 그 단순한 사실을 깨달은 것은 너를 보고 나서였다.
나는 이理 가문의 얼마 없는 온건파의 밑에서 자랐다. 온건파인 만치 나는 순혈주의자였으나 유년 시절에도 능력이 출중하여 유일한 후계자의 자리에 올랐다. 다들 내가 아니면 이 자리를 거머쥘 사람이 없었을 정도로 유능한 사람이라 했고, 가족들은 내가 후계자가 된 날 이걸 지키고 올라서는 것이 내 평생의 목표라고 했다. 얼마 남지 않은 온건파가 내게 기대를 했다. 내가 가주의 자리에 오르면 더는 머글과 잡종을 돌보는 추한 짓을 하지 않아도 된다며 기뻐했다. 그래서 나는 기대에 반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최선을 다하는 것은 쉬운 일인데, 시키는 대로 하면 되기 때문이다. 나는 뜻대로 공부했고, 품었고, 싸웠다. 멍청한 것들은 모조리 아래에 밀어 넣고 위로 올라갔다. 가문 사람들은 내 출신이 아쉽다고 했지만, 굳이 문제 삼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매 삶이 떠받들려 기고만장했고, 앞길을 막는 것은 천지신명밖에 없으리라 생각했다. 발밑에 둔 모든 것이 나의 것이었다. 그렇지만 기대는 산산이 부서지고야 말았는데, 네가 들어온 이후다.
너는 열셋에서 열넷이 막 되기 전 우리 집안에 굴러왔다. 네가 가주님의 품에 안겨 집에 왔을 때는 꼭 새빨간 토마토 같았는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어디 하나 피에 젖지 않은 곳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탐탁지 않은 눈으로 너를 쳐다보는 내 가족의 틈을 비집고 나왔는데, 정신을 잃은 듯 축 늘어진 네게서 피비린내가 물씬 풍겼다. 무슨 일이냐 물었지만 아무도 내게 답해주지 않아 답답할 따름이었다. 시간이 지나 네가 정신을 차렸을 무렵 모습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는데, 불안한 눈으로 나도 앉아보지 못한 푹신한 의자에 앉아있던 너는 꼭 새하얀 눈꽃 같았다 회고한다. 너는 머리카락도, 눈동자도, 하물며 속눈썹과 피부까지 어디 하나 모난 곳 없이 새하얗고 조막만 하니 손에 올려두면 금세 녹을 것 같았다. 여린 모습에 나는 동정심이 들었다. 그리고 네가 새 가족이라고 생각했다. 너는 가주님의 오라버니가 애지중지하던 자식이라 했다. 그런데 그 강하신 분 없이 이곳에 왔단 것은 좋은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너는 약자이니 보호해야 하고, 당분간, 이 집 안에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네가 내 자리를 뺏을 것이라고는 일절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세상에 당분간이라는 단어만큼 오래가는 것은 없었다. 당분간이라는 그 시간 동안 너는 내 모든 것을 앗아갔다. 너는 그 동정심을 유발하는 모습으로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았는데, 점점 내 입지가 좁아지게 되는 원인이었다. 가문도, 지위도, 하물며 온정까지 전부 나의 것이었는데 너는 기어이 나의 것을 뺏어간 것이다. 네가 가주님의 곁에 찰싹 붙어있는 시간 동안 가족들은 나를 부추기며 압박했다. 여러 압박 중에 저런 하잘ㄱ없는 촌놈이 내 가주 후계자 자리를 반드시 위협할 것이라는 말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 나는 처음엔 네 모습을 보고 신뢰하지 않았으나 곧 수긍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한 달 정도 지나니 내 입지는 좁아져 있었다. 사특한 술수를 쓴 것도 아닌데도 가주님은 네게는 모든 귀한 것을 안겨주며 내가 네게 조금만 실수를 해도 네가 다칠 수도 있었다며 불같이 성을 내시는 것이 아닌가. 가주님께서 후계자 자리를 결정할 권한을 쥐고 계시니 너를 총애하여 거슬리는 온건파의 사람인 나를 밀어내 너를 세울지도 몰랐고, 그 분위기를 읽은 사람들은 네게 줄을 선 것이다. 사람들이 네게 하나하나 바치는 순간마다 불안감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나는 처음으로 너를 무시하기로 했다. 너를 대화에서 배제한 것인데, 가주님은 그걸 가지고 내게 불같이 화를 내셨다. 영문도 모르고 혼이 난 것도 서러운데 부모님은 그 촌놈이 기어오르는데 너는 이것밖에 할 줄 모르냐며, 네가 이리 맞는 것은 전부 촌놈 탓이라며 회초리로 다리를 맞았다. 그 이후로는 네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가족들이 내게 저것을 하루라도 빨리 밀어내야 네가 다시 평온해질 것이라 말했을 때는 옳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유년 시절의 내 괴롭힘은 멈출 줄을 몰랐다. 괴롭히는 날마다 나는 네가 약자임에도 내 자리를 위협하는 강자라 믿었다. 네가 그냥 후부키인지 뭔지 하는 숲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반반한 낯짝을 이 집안의 어디든 들이밀지도 않았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그랬다면 나도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인데 이리도 내 삶에 파고들어 와 안온하고 평화롭던 내 일상을 박살 낸다.
"도련님."
유독 나는 네 입에서 나오는 도련님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것이 싫었다. 네가 내 이름을 부르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네게 모질게 구는 것을 하루의 일과에 넣을 정도로 네가 싫고 증오스러웠다. 네 존재가, 네 숨이, 네 삶이 싫다. 네가 내 자리를 뺏을수록 나는 불리하기 때문이다. 내 일생의 목표를 위협하는 너를 증오한 만큼 괴롭힘은 멈추지 않았다. 나는 살면서 네 이름을 부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너는 그런데도 내 이름을 잘만 기억했고, 늘 그렇듯 미소를 지었다. 한서 도련님, 하고 네가 천진난만한 미소로 오늘은 어땠는지, 몸은 괜찮은지 안부를 물어보며 내 속을 살살 긁을 때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입학 직전에는 결국 그 짜증이 하늘을 치솟는 것이다. 전대 가주님을 뵙는 날이었다. 전대 가주님까지 네가 뺏어가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는 네가 그분을 만나지 못하도록 고운 한복의 소맷단을 죄 찢어놓고 넘어지면서 주스를 머리에 끼얹었다. 그런데도 너는 웃으면서 내가 고의로 한 짓이 아니라는 양 도련님은 괜찮으시냐며 안위를 묻는 것이다. 몸이 좋지 못해서 넘어지고 말았다는 핑계와 함께 방에 들어간 나는 화병을 집어던지며 악에 받쳐 소리를 질렀다. 너는 단 한 번도 불평의 ㅂ자도 꺼내질 않는구나. 염병할 옷을 입었다면 웃지 말고 내게 화를 내든지 하란 말이다, 머리에 쏟았으면 화라도 내란 말이다!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지 말고 당당하게 걸어 다니며 나와 맞서란 말이다! 대체 왜 내게 이러는 것이냐! 나는 어깨를 들썩이며 거친 숨과 분노를 잠재웠다. 방 안이 온통 난장판이었다. 기어이 무릎을 꿇고 바닥에 엎드려 소리 내 울었다. 네가 미소를 짓던 그 얼굴이 아른거렸기 때문이다. 내가 너를 괴롭힐 때 유독 견딜 수 없는 순간이 있었다. 네가 날 보고 미소를 지을 때다. 맨 처음 너는 입술의 양 끝을 말아 올리는데, 천천히 눈을 접고 온 얼굴로 미소를 퍼뜨린다. 그럴 때마다 네가 웃음을 잃어버렸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동시에 네 태도가 역겹다고 되뇌었다. 분명 내게 동정심을 얻고 싶어 하는 모습일 것이다. 새하얀 눈송이를 처음 본 날처럼 내가 너를 가엾게 여겼으면 하는 마음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네가 끔찍할 만치 싫고 증오스럽다. 네가 사라져버렸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영영 내 눈앞에서 사라져서 그 거슬리는 모습을 내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죽어버리면 좋겠다 생각했다. 이제 곧 원내로 갈 건데 그게 두려웠다. 눈송이가 아닌 널 마주할 용기도 없으며 네가 저지른 죄를 보기도 싫은 것이다. 난 너를 증오하기에 너를 끝까지 괴롭힐 것인데 네가 원내에서 그 모습으로도 미소 짓는 모습을 보면 나는 미쳐버릴지도 모른다…….
결국 나는 전대 가주님마저 뺏겼다. 가족에게 크게 혼이 나 회초리를 맞고 피딱지가 앉은 다리에 머트랩 용액을 바른 모습으로 입학을 했고, 너와 다른 기숙사가 되었다. 너는 선택의 기회가 있었는데, 내가 마주치지 않을 현무로 갔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같은 기숙사였으면 자퇴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너는 원내에서 다른 모습으로 살았다. 이노리인지 뭔지 하는 어린 소녀의 모습은 조막만 하니 처음 본 날을 떠올리게 했다. 그마저도 동정심이 들게 하는 모습이라는 뜻이었다. 나는 의도적으로 너를 피했다. 가족들은 가주 후계자 자리를 위협하는 너를 빨리 치워버리라 종용하는데 정작 다른 곳에서 화가 났기 때문이다. 그곳에서도 사랑받는 네가 부럽고도 화가 치밀었다. 너를 증오할 사람은 나뿐인데 네게 손댈 사람이 더 생길까 그것이 화가 나서인지 나의 괴롭힘은 원내에서도 멈추지 않았다. 내가 괴롭힐 사람임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렇게 네 곁엔 아무도 없게 됐는데, 3학년이 되던 날에 네가 지독히 외로워하는 모습을 난 보았다. 쑥을 피면서 눈물을 쓱 닦는 것이다. 나는 네가 외로우면 악몽을 꾸는 걸 알기에 널 위해 네 패밀리어에게 노래를 가르쳤는데, 그 이유는 너를 걱정해서가 아닌 내게 불이익이 돌아올까 두렵기 때문이라 합리화했다. 그런데 네 패밀리어가 죽었다지 않은가. 그리고 네가 나를 피해 다니니 나는 영문을 알 수 없는 것이다.
이유도 모르고 시간이 흘러 6학년이 되어서까지 내 괴롭힘은 멈추지 않는다. 결국 장난의 도가 선을 넘었는데, 이는 후계자 자리에 대한 압박이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좁아진 입지와 달리 시간은 1년 남짓하였으니 온건파의 편지는 쇄도했고 급했던 나머지 내가 저지른 실수임을 인정한다. 그날은 네가 내게 주먹을 휘두른 처음이자 마지막 날일 것이다. 너는 나를 미친 듯이 때렸다. 코뼈가 부러지는 순간 나는 네 분노에 찬 표정을 처음 봤는데, 그때의 희열을 도저히 잊을 수가 없다. 드디어 네가 화를 냈기 때문이다. 새하얀 얼굴에 돋은 핏줄도 그렇고 꽉 깨문 입술 사이의 새하얀 치열조차 새로웠다. 만약 그때도 네 미소를 봤다면 나는 미쳐버렸을 것인데 네가 이리 화를 내어 이루 말할 수 없이 기뻤다. 네가 사감 선생님께 제지되어 악에 받친 소리를 지를 때는 화병을 던져 깨던 날의 나를 겹쳐보았는데, 너는 그것보다 훨씬 우아한 사람이었다. 나는 네가 내 자리를 위협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았고, 가족들이 누누이 하던 경고를 확실히 깨달은 날이었지만 차라리 네가 가주 자리에 앉아버렸으면 하고 내가 대패했음을 인정했다. 너는 밤이 되어 기숙사에 찾아왔는데, 지팡이를 들이밀던 순간 너는 내가 만들어낸 허상도 아니며 마냥 참는 호구 같은 새끼가 아님이 다시금 실감이 났다. 결국 너도 나를 싫어하니 어서 나를 밀쳐냈으면 했다. 그리고 내 눈에 영영 사라졌으면 했다. 이대로 사라지면 내가 져도 후련한 것이다. 하지만 나는 좌절했는데, 너를 도발하기까지 했거늘 네가 오블리비아테로 내가 알고 있는 가장 큰 비밀을 지우지 않은 것이다. 너는 내게 기회를 주었고 나는 그게 끔찍하게 싫었다.
[영민하신 분이니 곧 깨달으실 거라 믿습니다]
하는 편지를 네가 보내긴 했지만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다. 네가 지운 기억이 당최 무엇인지 억울해하며 나는 그날 밤을 꼬박 지새울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후계자 자리에서 박탈되며 가족에게 버림받았다. 일생의 목표는 실패했지만 후련했고, 그렇게 원내의 생활에서 너라는 사람이 지운 기억이 무엇인가 싶어 하며 살았다. 이제 이걸 핑계로 너를 만나지 않고 싶었다. 가족들은 퇴학을 종용하면 자리를 얻을 수 있다고 했지만 나는 그걸 무시했다. 너를 만나면 이 증오를 태워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대신 가주님께 편지를 보냈다. 내가 너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기에 괴롭혔다는 반성문이다. 더는 나는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주님은 제법 친절하게 내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 내용에는 내가 알지 못한 것이 있다. 나는 가주님이 편지 끝단에 '네가 죄를 시인한다고 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님을 명심하라. 용서는 네가 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에 수긍하며 좌절했다. 공교롭게도 그날은 원내에 탈이 들어와 전투가 있던 날이었다. 나는 고통받는 머글을 보았고 순혈주의의 참상을 목도한다. 너는 인카서러스 주문에 묶였고 나는 널 구하고자 하였는데, 막상 손을 들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편지의 내용을 보건대 나는 죄인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너는 죽기 싫다고 했고 그 모습에 나는 기숙사로 도망쳤다. 내 역겨움이 도가 지나쳤기 때문이다. 나는 그로 사흘을 내리 앓았다. 지금까지 쌓아온 죄를 시인하는 것은 예상보다 끔찍한 일이었다. 나는 네게도 편지를 보냈는데, 그것이 모든 사실을 실토하는 것이다. 그렇게 답신 없이 또 한 주가 지났다.
"오셨습니까."
오늘 너는 내 기숙사에 들어와있다. 공손하게 너는 절한다. 나는 네가 헛것이길 바라며 우두커니 서 있다. 흰 눈송이가 자라서 사람의 형태를 가졌는데 그게 바로 너다. 너는 "어서 들어오시지요." 하는데 그 순간 내가 기어이 미치고야 만 것이다. 나는 네게 달려들어 목을 쥐었다. 네가 여기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나 같은 죄인이 감히 너를 마주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너는 얌전히 뒤로 넘어가며 바닥에 머리를 댔다. 몸이 넘어지자 너는 나를 가만히 올려다보고 입을 벙긋거리니, 그 어조가 담담하여 내 가슴에 또 방망이질을 치게 하였다.
"어디 졸라보십시오. 시생을 죽이려면 조금 더 힘을 내셔야겠습니다."
너는 그렇게 말했다. 내 모습을 취해 기숙사 방안에 아무도 모르게 기어들어 와서는 이렇게 도발하는 것이다. 내 밑에 깔려 바닥에 부채꼴로 흩어진 네 흰 머리카락 하며 새하얀 피부까지 죄다 눈사람 같았고 허상 같아 나는 손에 힘을 주질 못한다. 손에 힘을 풀고 바닥에 늘어뜨렸는데, 그러니 네가 장난감을 찾은 아이처럼 웃는 것이다. 가는 손가락으로 제 입가를 가리고 웃는다. 네 미소는 언제나 그렇듯 입에서 시작해 눈으로 끝난다. 잔망스럽게 웃던 네가 그대로 손을 뻗고 내 목덜미에 깍지를 낄 때, 나는 네가 원래 이런 사람인가 싶었다. 내가 네 순수한 면만 보려 했던 것이 아닌가 싶었다. 아니면 이게 내가 기어이 미쳐 보게 되는 환각이라면 나는 죽어 마땅한 사람인 것이다.
"한서 도련님. 무르십니다. 이래서야 어찌 한 집안의 기둥이 되겠습니까?"
너는 내 허리에 다리를 감았다. 그마저도 가벼운지라 나는 필히 환상이라 믿었다. 의심하지도 않았고 내가 이리도 역한 사람이구나 하며 좌절했다. 너는 눈을 내 마음을 알지도 못하면서 입을 열어 낭랑하게 고하는 것이다.
네가 말을 멈추곤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너는 벽 근처에 있었기에 몸이 뒤집히며 자연스럽게 벽에 내 등이 닿는 것이다. 나는 갈 곳을 잃고 졸지에 너를 내 다리 위에 앉히게 되었는데, 깍지 낀 팔을 꾹 잡아당긴지라 시선이 가까워졌다. 네가 입술이 닿기 직전까지 다가오자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문다. 너를 이리도 가까이 보는 것이 처음이기 때문이다. 너는 눈을 빚어 만든 것이 분명하다. 바닥을 그러쥔 손을 눈동자의 경계가 흐린 하얀 시선이 잠시 훑고는 나를 향해 다시 눈을 굴린다. 그 모습에 숨을 멈출 수밖에 없었는데, 네가 다시금 웃었기 때문이다.
"아신다면 참으로 음란하신* 분이시렵디다." "그만. 제발 그만." "안타까운 도련님.. 제가 한서 도련님을 잡아먹었다면 진즉 입안에 넣고 혀 위에 굴렸을진대 어찌 그것 하나 모르십니까? 이 정도로 그만둔다면 염치가 없지 않겠습니까."
너는 붙잡은 내 손을 올려 뺨에 비빈다. 볼을 비비던 것을 멈추고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가 뜨는데, 그 모습이 내가 간원하던 것이 무엇인지 꿰뚫는 것 같이 무미건조하여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을 수밖에 없다. 이후 손바닥 오목한 곳에 입술을 대며 내게 속삭였는데, 그 말이 차가워 영구동토 한가운데에 홀로 서 있는 느낌이었다. 나는 그 순간이 두려웠다.
"아니면 혹 그런 상황을 원하시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어리석습니다. 무얼 믿고 그러십니까."
네가 나를 잡아먹고 굴린다 해도 상황이 나아졌을 리가 없음을 명백하게 내포하였기 때문이다. 네 말에 나는 "원치 않는다." 하고 애써 답했는데, 네가 수줍게 웃는다. "참으로 영민하십니다. 상을 드리도록 할까요." 하며 이윽고 갈 곳 잃은 내 손을 쥐어 제 가슴팍의 옷고름을 조심히 잡더니 그 끈을 잡아당기는 것이다. 앞섬을 풀자 나는 눈을 질끈 감았는데, 네가 늘 어깨에 걸치는 하오리 자락과 함께 옷깃이 내려가는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 눈 뜨시는 것이 이로울 겁니다." 하며 단호하게 눈을 뜨라 하자 나는 결국 눈을 뜰 수밖에 없었는데, 흰 살결이 먼저 보이고 그 뒤에 내 눈에 네가 가졌다는 죄가 보였다. 너는 나를 가지고 놀면서도 끝까지 기회를 주니, 나는 이것을 구분할 재간이 없어 더 고통스러울 뿐이었다.
"저희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제게 죄를 고백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저의 죄를 고백하고 참회하고자 하는 것이니 괘념치 마시지요." "내 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제발 그만.." "도련님. 연정은 도련님의 죄가 맞지만 다른 것은 도련님의 죄가 아닙니다."
너는 내게 몸을 숙인다. 내 품에 기대며 눈을 내리까는데, 이노리의 모습과는 달리 성숙하던 그 모습으로 속눈썹의 그림자를 드리우며 입꼬리를 내린다. 안타까운 표정에 나는 입술을 꽉 깨문다. 네가 내게 속삭이는 것이다.
"추한 가족의 죄이지요." "네 그 무슨 뜻이더니?" "도련님께서 더욱 잘 아시렵디다. 누구의 탓입니까? 도련님을 누가 이리 종용하였습니까." "나는……." "혹 집안에서 버려졌으니 다행이라 생각하십니까? 종용한 자가 용서할 것 같은지요?"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일생의 목표에 실패하였으며 내 입지는 아주 좁은 온건파가 아닌가. 그런 내가 참상을 목도하고 돌아선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을 것이라며 반발할 것이다. 너는 그걸 알고 있다. 이 이후에 무엇이 일어날지. 온건파는 쓸모없는 나를 분명 나를 제거할 것이다. 더군다나 내가 돌아서는 걸 안다면 평범하게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순혈주의인 사람들이 그것조차 못할까? 당장 탈만 보아도 저주를 쓰는데 집안의 사람들이라고 그러지 않을 거란 보장은 없었다. 나의 두려움을 알았는지 너는 내 뺨 위에 손을 얹는다. "마음을 강건히 하십시오. 참상을 보셨다 하였습니까? 그렇다면 써먹으십시오. 그 머리에 저를 담지 말고 계략을 담으십시오." "내가?" "예. 한서 도련님이 말입니다. 멍청한 표정 짓지 마십시오. 그리한다면 도련님을 제 밑에 내려두고 즈려밟고 싶어집니다. 시생은 들개를 키우고 싶은 것이지 종이 필요한 것이 아니옵기에."
그렇게 말하면서도 너는 즈려밟힌 나를 떠올리곤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눈을 휘어 웃으니 결국 나는 눈을 감고 네 얼굴을 잊으려 노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너는 내 뺨을 쓸어주며 속삭이니, "욕망은 간원이지 않겠습니까. 제게 용서를 구하고자 하며 충족할 욕망이 무엇입니까?" 하고 종용하는 것이다. "도련님께서 행복할 선택이 무엇이온지." 하는 목소리에 결국 나는 무너졌다. 내가 행복할 선택지를 아무리 찾아도 단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살고 싶다. 죽고 싶지 않았다! 이제 너를 이해하려 들었는데 이대로 죽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죄에 대해 속죄하고 머글과 혼혈을 위하고 싶었다. 나는 네 하얀 살결을 품에 가득 안고 덜덜 떨며 입술을 벙긋거려 네 이름을 더듬어 부른다. "이로하, 로하야." 하며. 그러자 네가 눈을 나지막이 감는다.
"예." "나는 죽고 싶지 않아." "세상 그 누가 죽고 싶어 하겠습니까?" "나는 살고 싶어. 그렇지만 살아갈 선택지가 단 하나밖에 보이지 않는데 어찌 해야 할까..?" "행복할 선택은 제가 정해드리는 것이 아니지요. 선택은 본인의 몫이지 않겠습니까." "…로하야." "예." "내가, 네가 날 용서하는 조건으로 피바다를 만들어도 나는 정말 괜찮은 걸까?"
그러자 네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경계가 흐린 하얀 눈동자가 행복할 선택지가 과격하였다고 생각하고는 눈을 휜다. 너는 이윽고 품에 파고든다. 새하얀 머리카락이 쇄골을 타고 내려온다. 행복하면 되는 것이다. 누군가 죽어도 선택을 하였으면 그 대가이기 마련이다. 내 가족이 그러하였듯 누군가 죽는 일도 그 사람이 행복하면 그만인 것이다. 그 이후의 처절한 복수도 내가 행복하면 된 것이다. 자연은 그런 법이다. 선악의 구분선이 없고 무지한 만큼 순수하며 약육강식과 공생이 공존한다. 그만큼 순수하고 잔인한 너는 그 날선 손톱으로 가슴팍에 손을 얹는다. 손가락이 휘어 빙글 원을 그어내고 심장이 있을 부분에 손을 지그시 얹는다.
"예. 들개의 이빨을 내보이십시오. 피를 보시는 것이 선택이라면 망설이지 말고 죄 물들이시며 치의 무지를 참회하게 하여 시체로 산을 이루옵고 그 위에 서시옵소서. 그게 선택이라면 행해야 함이 마땅합니다." "그렇지만 사람을 죽이는 거잖아. 범죄라서, 난 두려워." "도련님." "응." "그게 왜 두렵습니까?" "..뭐?" "복권(復權)하시어 다시금 명예를 빛내시면 아무도 반발할 자가 없습니다. 그걸 원하시는 것 아닙니까? 도련님의 욕망을 마주하십시오." "네가 막겠다는 말은 하지 않는구나." "행하지 않겠다는 말씀이 없는 것도 도련님 이옵디다." "그래. 마주하도록 하마. 나는 복권하여 네게 사죄할게.." "하면 이제, 그 조건으로 용서해드리도록 하지요."
너는 내 품 안에서 히죽 웃는 것이다. 나는 네 흰 머리카락을 쓸어주며 결국 고개를 끄덕였는데, 너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달상하여라." 하더니 품에 안겨있던 몸을 일으켜 한 손으로 뺨을 쓸더니 나를 내려다보는 것이다.
"도련님, 나의 도련님. 제가 혀 위에서 굴리지 못하실 분이시여. 성공적인 복권의 대가는 기억으로 가져가 보도록 하겠사옵니다." "뭐?" "걱정하지 마시지요. 핏줄 다른 가족의 우애는 남겨두나 오늘의 계약 내용은 잊는 것이니, 지난밤 도련님께서 제게 행하신 선행을 죄 지운 것처럼 제가 종용한 사실은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제가 너무나도 가엾어 머글과 혼혈을 위해 온건파를 죄 쓸어버리고 복권하고 싶다는 생각만 남을 겁니다."
너는 지팡이를 꺼내 들곤 내 머리에 겨눈다. 나는 그 자리에 굳어 네 아름다운 얼굴만 멍하니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네가 입술을 벙긋거린다. 오블리비아테. 나는 뭐라고 말할 새도 없이 눈을 감고 기절해버렸고, 너는 웃으며 지팡이를 입가에 가져다 대 지그시 누른다. 날 선 지팡이의 끝이 입술을 파고들어 붉은 피가 흘러 내 뺨 위로 한번 흘러내리더니 너는 안겨있던 몸을 떼어내며 상의를 다시금 걸쳐 입고 하오리를 어깨에 걸친다. 그리고는 "이 정도면 6년의 괴롭힘 값은 치른 셈이지." 하는 것이다.
— 파멸할 자는 알아서 제 길을 개척하니 굳이 건드릴 필요는 없습니다.
과거 네가 탈을 만났을 때 하였던 말이다. 너는 이 지론을 좋아한다. 자신의 손을 더럽히지 않는 법은 많다. 굳이 더럽혀야 할 이유도 없다. 품으면 되는 일이다. 그 사람이 행복했으면 되는 일이 아닌가. 너는 사람의 선택을 중요시했지만 아주 가끔 행동에 나설 때가 있었다. 끝내 돌아올 수 없을 마지막 선에 도달한 사람을 만났을 때다. 손가락으로 살짝 떠밀기만 하면 모든 것이 끝난다. 너는 선에 걸쳐진 한서를 검지 하나로, 혀 하나로 밀어버리기로 선택하였다. 당연히 서로를 이해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끌어 올려줄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아주 최소한의 자비와 그 자비를 희망으로 삼아야 한다는 절망을 안겨주는 것이 자연이지 않은가. 앞으로 살아 돌아오는 것은 본인의 몫. 이것은 일생의 목표를 다시금 살려주는 대가이자 복수할 기회를 주는 것이니 제법 자비로운 처사 아닌가. 너는 작게 소리내어 웃고는 한서의 모습을 뒤집어 써 백궁을 나서 현궁으로 돌아갔다.
>>454 맞아요! 한서를 길들이고 혀 위에 가볍게 굴려 놀려주며 후계자 자리를 돌려주는 대신, 이제 왕관의 무게를 견뎌야 하는 건 한서의 몫이지요. 지금의 로하 독백은 원숭이 손에서 모티브를 가져왔거든요. 가주 후계자 자리를 돌려주는 행운을 가져다주는 대신 온건파 몰살이라는 불행을 안겨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