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좋다. 하늘에는 먹구름 한 점 없었고 바람은 과하지도 약하지도 않게 불어왔다. 그래서일까, 복도를 걸어다니는 족족 바람이 스치운다. 선하는 부유하는 먼지 한 점 한 점에 집중하지 않으려 부던히 애쓰며 눈을 감는다. 하루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금세 피로해지고 만다. 그럼에도 남아도는 체력은 선하를 지루하게 만들고 있었다.
턱을 들고 허리를 꼿꼿히 새운다. 바람이 불며 교복이 머리카락과 함께 반대편으로 펄럭인다. 쭉 뻗은 선하의 몸이 교복속에서도 뚜렷히 느껴졌다. 창틀에 손을 올리고 있는 선하는 배배꼬인 속내와 상반되게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인기척을 느낀 선하가 눈을 뜬다. 굴러가는 눈동자에 조금은 무기력하고, 조금은 우울한 사람이 담긴다. 선하는 저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다. 비틀린 본능이 이성조차 거치지 않고 선하의 몸을 채찍질한다. 아니, 어쩌면 이성조차 본능의 편을 들어주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느새 선하는 사하를 향하고 있었다. 슬쩍 다가가 툭, 부딪히기까지의 머뭇거림은 전혀 없었다.
"아...!"
선하가 작게 탄식했다. 허리를 굽히자 머리카락이 길게 늘여진다. 허둥지둥 유인물들을 줍는 모습이, 떨리는 양 손과 곤란한 듯 한데 모인 미간이 선하를 무고한 사람으로 만든다. 완벽 범죄다. 자신이 주운 유인물을 섬세한 손길로 정리한다. 내리깐 눈에 붙은 속눈썹이 학의 날개처럼 뻗는다. 선하는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 아주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이내 유인물을 사하에게 건네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난다. 잘 꾸며진 얼굴이 곤란한 낯을 하고 있다.
부딪힌 건 저였는데 어째 저쪽이 더 당황한 것 같았다. 나도 미안한데 내가 더 미안한 티를 내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가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어서 관둔다. 이렇게까지 하는 사람이면 미안함 배틀이라도 하듯이 계속 더 많이 미안한 기색을 내비쳐야 할 것 같았다. 착한 애구나. 첫인상은 쉽게 정립된다.
"아니야, 내가 앞을 안 보고 가서 그래."
창밖을 흘긋 본다. 벚꽃이 늘어선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요즘 같이 날씨 좋을 때 많이 구경해야지.> 덧붙이곤 고개를 끄덕인다. 선하게 내민 손은 물끄러미 보다 제 손을 뻗어 끄트머리를 살짝 잡았다. 곧 악수하자는 뜻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불에 덴 사람처럼 놀라며 손을 뗐지만. <이게 아니구나.> 머쓱하게 덧붙였다.
"이거 되게 가벼운데……. 그럼 지금 들고 있는 것만 들고 같이 가줄래?"
<교탁에 두고 나오기만 하면 돼.> 최대한 쉬운 일이라는 걸 어필하기 위한 말이었다. 다짜고짜 몸통박치기를 하더니 심부름까지 시키는 애……. 제 첫인상을 생각해보니 참담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다. 같이 걷기 쉽도록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나 사실 너 알아. 가끔 착각하고 네 이름으로 바꿔부르는 애들 있었거든. 아, 내 이름 은사하야."
같은 반이었던 적도, 동아리를 같이 하지도 않아서 만날 기회는 없었는데, 고작 이름 조금 들은 걸로 혼자 친밀감이 쌓였다.
"어떤 앤지 궁금했는데 이렇게 만나네. 도와준다고 해서 고마워."
그런데 또 나만 그런 걸 수도 있으니까. 선하쪽을 흘끔 쳐다봤다. 착해서 다 받아주고 있는 거 아닌가 몰라.
>>782 엌ㅋㅋㅋㅋㅋㅋㅋㅋ 그... 뭐시다냐... 별 큰 문제는 아니고, 응. 슬혜가 싫어하는것 키워드 중에 하나가 거짓말이니까!! 물론 안지켰다고 무조건 흥칫뿡 하는건 아니고 '상대방이 충분히 지킬만한 사항이지만 말해놓고 잊는것'이 아닌 '상대방이 지킬만한 사항이 뻔히 아닌데도 지킨다말하는 것'에 극혐한다는 느낌이야~
사하의 시선을 선하가 뒤따른다. 벚꽃이 보기좋게 흐드러진다. 마음만 같아서는 '왜, 나랑 구경가고 싶어?'따위의 망발을 던지고 싶다만 선하는 꾹 참아냈다. 노골적으로 친해지고픈 티를 냈다가는 좋은 꼴 보지 못한다. 그런 스스로를 대견해하며 빙그레 웃는다. 속으로 북치고 장구치고 아주 난리다.
손이 닿자 선하가 파르르 떤다. 눈을 크게 뜨고 사하를 보는 눈동자에 순간 이채가 서린다. '왜 나한테 끼부려?'라는 개소리를 하고픈 마음도 꾹 참아낸다. 평소 태도를 생각하면 젠틀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그 대신 가볍게 웃음을 터트린다. 떠나가는 손이 못내 아쉬워 손가락을 살짝 굽힌다. 사하의 손끝이 살짝 닿는 것이 선하의 시선에 잡힌다. 괜히 의심받지 않게 잽싸게 팔을 거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너 엄청 재미있다."
들고 있는 유인물을 갈무리하며 품에 안는다. 확실히 바람이 안 부는게 아닌지라 이렇게 하지 않으면 전부 날아갈 것 같았다. 아, 일부로 날려보내면서 시간 끌면 싫어할려나. 태평히 생각하며 사하 옆으로 따라붙는다. 이쪽 역시 걸음을 맞추기 위해 느리게 걷는다.
"네가 사하였구나! 알아, 알아. 친구들이 자주 헷갈리더라고. 이렇게 만나니까 반갑다. 우리 앞으로 친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아."
마치 오늘 처음 봤다는 얼굴로, 이것도 다 인연이라는 밑밥을 깔며 재잘거린다. 경쾌한 목소리가 조금 높아진 상태였다. 고맙다는 말에 눈을 가늘게 뜨고 입끝을 만지작거렸다. 그 말 한 마디가 제법 감명깊게 다가온 모양이지? 작게 콧노래 부른다. 안그런척 따라붙는 시선이 제법 집요한 동시에 은밀했다.
닿은 손끝이 이상하게 좀 간지러웠다. …꽃가루 알러지인가. 오늘도 어김없이 생각은 이상한 방향으로 튀었다. 다행히 금방 돌아오긴 했다. 도와주겠다고 뻗은 손을 악수하자는 줄 알고 덥석 잡은 제 기행을 <재밌다>는 말로 상냥히 포장해준 선하 덕분에.
"가끔 그런 말 들어."
진지하게 대답하는 것보단 농담이 분위기 풀어줄 것 같아 가볍게 말한다. 근데 뱉고 나니 뻐기는 것처럼 들렸을까 싶다. 그래도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거든. 제일 잘 하는 합리화로 술렁이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3학년 돼서 새 친구 사귈 일도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없다고 생각한 기회가 찾아오자 삐걱대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속으로만 그렇다.
"너도 사하라고 불린 적 있어? 우리가 여태 못 만난 게 신기하네."
<친하게 지낼 수 있으면 좋겠다.> 덧붙였다. 고3이지만, 공부해야 하는 것도 맞지만, 친구랑 사이좋게 지내면서도 공부할 수 있는 거잖아요. 물론 잘 한다곤 안 했다. 변명을 요구하는 사람도 없는데 혼자서 둘러댈 말을 만든다.
"나는 3반. 그래서 못 봤구나. 그래도 이제 이름이랑 얼굴도 알고, 이렇게 인사도 했으니까 오며가며 알아볼 수 있겠다."
선하를 보곤 웃으며 말했다. 근데 이 애, 붙임성도 좋다. 예쁘게 생긴 애가 착한 데다 성격도 좋네. 신이 공평하다는 말은 역시 다 개소리다. 혹시 믿는 신 있으면 미안.
"…혹시 외부 활동 뭐 하는지 물어봐도 돼?"
<불편하면 한 대 쥐어박아줄래?> 물어보려다 입을 다물고, <말하기 싫음 비밀이라고만 해줘.>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