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에서 맹렬히 항의해보지만 딱히 신빙성은 없다. 그를 한번이라도 만나본 사람이라면 연호가 그런 인간성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은 1밀리그램도 들지 않을테다.
아무튼 그는 중간에 교실에 들러 종이와 펜을 가져오면서 확연하게 새슬에게 뒤쳐졌다. 물건을 챙긴 뒤에 평소처럼 창문을 통해 나갔더라면 새슬을 앞지를 수도 있었겠으나, 그래서야 반칙에 불과하다. 이미 옥상에서 연호가 행동을 중단한 것으로 인해 둘 다 그런 행위는 하지 않도록 암묵적인 동의가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거기서 행동을 중단한 본인이 직접 그 규율을 어겨버려서야, 서로에게 상처밖에 안된다. 그는 둘째치더라도 새슬의 실망이 꽤나 클테다. 아무리 그가 천진난만하고 철없어보인다지만, 그의 나름대로 긍지는 가지고 살아가고 있을테다.
" 으아아악! "
새슬의 손이 벚나무에 닿자마자 반사적으로 나온 소리였다. 아무리 긍지를 지켰고, 후회없는 싸움(달리기)였다곤 하지만 졌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종이만 아니었어도... 라며 안타까운듯이 중얼거리고는 새슬의 옆에 등을 대고 같이 앉았다. 그는 숨이 찬 기색은 적었다. 한두번 심호흡을 몇번 하고서 숨을 가라앉혔다.
" 다음번엔 안질거야. 네 발로 뛸거야! "
벌써부터 다음 승부를 기약하는것은 너무 성급하지 않을까... 싶지만 졌다는게 분하긴 한 모양이다. 새슬이 풍경에 대해서 이야기하자, 그도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확실히, 그렇게 달렸다곤 해도 아직 학교 내부인데 풍경이 상당히 달라졌다. 그는 조용히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잠시 눈을 감고 바람을 느끼다가 다시 눈을 떴다.
" 음...... 비밀! "
이라고 하면 화낼거야? 라며 장난스레 웃으며 새슬을 돌아보았다. 사실 비밀로 할 마음따위는 없을 것이다. 그는 장난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입술을 장난스레 비죽거리며, 괜히 툴툴대는 체 했다. 사실 이기든, 지든, 네 발로 달리든, 한 발로 깽깽이를 하든, 냅다 구르든 상관 없는 게임이었다. 새슬에게는 그 시간 자체를 즐기는 데에 의미가 있었으니까.
게다가 이번에야 운이 좋아 이겼다지만, 평소에 보았던 연호의 모습을 떠올렸을 때 그가 진심으로 부딪혀온다면 십중팔구 지고 말았을 것이 틀림없었다. 애초부터 연호가 어느 정도의 공정함을 위해 편의를 포기하고 자신을 봐 준 것이다. 애초부터 네 발로 달리거나,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면 안 된다고는 어느 누구도 이야기하지 않았으니. 하지만 이렇게 분해하는 얼굴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으응, 그래, 다음을 기대할게. 나도 지지 않을 거지만! 새슬이 가볍게 키득거리며 웃었다.
“앗, 나는 호야한테만 가르쳐 줬는데~.”
정말로? 여전히 등을 기둥에 편안히 기댄 채, 고개를 살짝만 틀어 옆에 앉은 연호를 흘깃 바라보았다. 장난기가 담긴 익숙한 웃음. 화 내면 알려주는 거야? 그럼 해 볼래. 마찬가지로 장난스레 응답하고는, 또 금새 말갛게 웃으며 이야기했다. 그치만 사실은 알려 줄 거지? 다 알거든~, 궁금한데. 호야 소원.
“저기에, 던져 넣고 빌면 된대.”
이렇게 손 모으고, 눈 감고. 다른 곳보다 유난히 움푹 패인 기둥면을 가리켜 보이면서, 소원을 비는 시늉을 해 보인다. 그러고 보니 자신이 던진 쪽지는 사라졌을까? 다른 아이들이 던진 쪽지는? 갑작스런 호기심에 고개를 쭉 빼어 구멍을 살펴보려 했지만 딱 거기까지. 아주 잠깐 훑어보나 싶더니, 새슬은 고개를 다시금 나무에 기대었다. 아무래도 아직은 일어서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갑작스런 체력 소모는 사람을 지치게 만드니까. 묘한 나른함이 스멀거렸다.
그는 어딘가의 광고처럼 속닥속닥 새슬에게 말했다. 네발 달리기란 사실상 엄청 어렵다. 항상 두 발로만 움직이던 인간에게 갑자기 네발로 달리라고 하면 다들 스텝이 꼬이거나 이동속도가 현저하게 느려진다. 야생성을 간직하고있는(...) 그이기에 할 수 있는 것일테지.
아무튼 갑작스럽게 성사된 대결은 웃음을 불러왔다. 졌다고는 해도 그는 재밌었다. 분하긴 해도 즐거웠으면 된거다.
" 너도 거짓말. 화 안낼거면서? "
새슬과 만난 시간이 그렇게 길다고는 할 수 없어도, 그는 새슬이 화내는 것을 짐작할 수 없었다. 그녀가 예측하기 힘든 사람이라는 점도 있지만 그 태평한 얼굴에서 화낸다는 것은 정말로 생각해내기 아려운 발상이었다. 새슬이 화내면 어떻게될까. 평소에 웃고 잘해주는 사람이 화내면 엄청 무서워진다는 말처럼, 새슬도 그럴지도 모르겠다.
" 그럼, 여기까지 온 목적을 달성해볼까. "
그는 새슬이 가르쳐준대로 쪽지에 소원을 적고나서, 그것을 집어넣고 손을 모은채로 눈을 감았다. 혹시나 그저 눈을 감고 조용히, 평온하게 소원을 빌고있을 모습을 떠올렸다면 그건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는 간절한게 어떤 모습인지 보여주려고 하는것처럼, 손을 모은채로 인상을 팍 찌부려트린채 '으으음!' 하는 소리를 내며 마음속으로 소원을 몇 번이고 되뇌었다. 이루어질거라는 확신은 없었지만 이루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니까.
" 자, 다 됐다. "
그는 정말로 쪽지가 사라졌나 확인하지도 않고 다시 새슬의 곁으로 돌아와 앉았다. 전설의 내용처럼 쪽지가 사라졌나 사라지지 않았나는 확인해볼 수도 있었겠지만, 만약 사라지지 않았다면 안그런척 해도 조금 실망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간절하게 비는게 이 소원 전설의 중요한 점이라고 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자신의 간절함이 사라질 수 있을것이라 생각해서겠지.
아무튼 그는 평소의 모습과는 다르게 조금 이질적이라고 할 수 있을만큼 편안한 표정을 취했다. 잠시 눈을 감고서 무언가를 생각하듯이 입가에는 부드러운 미소를 띄웠다가, 어느샌가 다시 평소의 장난스러운 웃음을 띄운채로 새슬을 보았다.
" 자, 그럼 목적도 달성했고, 여기서 대충 놀다가 들어갈까? 수업시간도 곧 끝날테니까. "
사실 이루어진다면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그것을 볼 수 있을테다. 새슬은 이미 소원이 내용이 뭔지 알고있을 테다. 그가 쪽지를 쓰는 동안 눈을 아주 조금만 옆으로 돌렸어도 그가 무슨 내용을 썼는지는 알 수 있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