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하는 주원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마 그의 물음에 대한 대답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녀는 대답을 찾은 것인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런거구나."
주원은 배려한 만큼 배려했다는 이야기를 듣곤 잠시 스스로 생각하기 위해 고개를 정면으로 돌렸다. 그리곤 "음, 음." 하고 무언가 납득한듯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주머니에 찔러넣었던 왼손을 꺼내 턱을 몇 번 매만지다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다시 응시했다.
"배려한거였구나. 몰랐어. 그렇다면 말 해줄게. 너, 착하구나!"
정답을 알았다는듯 상쾌한 미소를 지으며 선하에게 말한다. 그 말투에 거짓은 한톨도 묻어있지 않았다. 아마 주원에겐 납득이 필요한 것이겠지. 선하의 말에 납득한 것이다. 누군가 시킨다고 해서, 억지로 한다고 해서 나올 수 없는 순수하고 때묻지 않은 목소리로 주원은 말했다.
"못한다기보다 그냥, 싫어해. 응. 그럼 못 한다고 해도 맞을지도 모르겠다."
주원이 성격적으로 진실을 추가한다던가, 그런 인간은 아니었다. 다만 재능으로 인한 역효과일 뿐. 사람마다 먹지 못하는 음식과 싫어하는 음식이 다르듯이. 주원에겐 거짓말이 기호품으로서 맞지 않는 음식일 뿐이었다.
"난 네가 원하는걸 갖고 있지 않으니까."
선하의 담백한 말투와 같은 죄책감도, 미안함도 담기지 않은 담백한 말투로 대답한다.
"이건 설명해주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나 늑대야. 재능은, 그냥 사람의 말이 잘 이해된다고 해야할까. 감정을 알기 쉽다고 해야할까. 그런거."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될까 싶지만, 그런 이야기로 흘러가 버린다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주원은 차분하게 그녀에게 자신의 말이 닿길 바라며 설명했다.
"말 해주면 네가 기쁠 것 같은건, 글쎄. 정말 네가 '진심'으로 기뻐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걸 내 뱉는건 내 입장에선 '거짓'이 되거든. 거짓말이라고 해야할까, 마음이 담기지 않은 말은 가슴이 아파. 듣거나, 말 하는 것도. 그래서 하지 않으려고 하는거야. 음, 미안. 제대로 설명이 되지 않았을지도. 아하하."
처음부터 대화가 맞물려 있지 않았다. 대분은 이런 식이다. 주원이 말하는 것과 상대가 말하는 것은 잘 맞물리지 않았다. 대부분의 이유는 사회의 암묵의 규칙을 지키지 않는 주원이 나쁜 경우가 많지만.
"이걸 말 했어야 했나보다. 난, 별로 널 배려한게 아니야. 그저 내가 우산을 씌우고 싶어서 씌웠을 뿐이지. 가령, 네가 좋아하는 수영을 하는건 누군가를 위한게 아니잖아? 스스로 즐거워서니까. 나도 그냥 그럴 마음이 들어서 그랬을 뿐이야. 그래서 아마 배려에 대한 배려. 라고 생각하지 못했을지도 몰라. 난 처음부터 널 배려한적이 없으니까."
주원은 여전히 그녀쪽으로 우산을 기울인채로 말했다. 등굣길이 이렇게 길었던가? 깊을 정도로 시간이 길게만 느껴진다. 이어 그녀는 주원의 우산 손잡이를 쥔 손을 향해 그녀의 손을 뻗었다. 그 느릿한 손놀림은 닿기 전에 우산을 원래대로 되돌리라는 의미일지도. 하지만 주원은 자신의 손등에 그녀의 차가운 속바닥이 닿을 때까지 우산을 움직이지 않았고, 두 손이 겹쳐지고 난 뒤에도 그러지 않았다. 그저 주원의 반대쪽 손으로, 주머니에 찔러넣었기에 따뜻해진 왼손을 그녀의 차갑게 식은 손 위에 겹치고, 떼어내려 할 뿐.
주원이 너무 가까이 그녀에게 얼굴을 들이민 것으로 그녀는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아." 주원은 저질렀다. 같이 짧게 읊조리며 뒤로 물러난다. 이런 식이었다. 아랑에겐 거리감을 제대로 재지 못하고 그대로 달려들어버린다. 아마 그녀가 너무 귀여운 탓이겠지. 그녀의 뒤로 물러나는 움직임은 마치 걸그룹의 댄스에서나 볼 법한 우아하고 깔끔한 움직임이었다. 주원은 그렇게 부드럽게 물러서는 그녀를 보곤
"미안해."
하고 고개를 슬며시 숙인다. 요즘들어 점점 심해지고 있다고 스스로도 깨닫기 시작했다. 그것도 아랑에게만. 이유는 간단. 너무 귀엽기 때문이었지만, 그녀는 인형이 아니었으니까. 큰 애정을 단순히 부딪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니 말이다. 상대가 받아낼 수 없다면, 그저 서로 서있는 바닥이 더러워질 뿐이다. 그렇게 얼룩진 바닥 위엔 그 아무도 서고 싶지 않을 테니까. 이미 몇 번이나 쏟아버린 것을 주원은 슬슬 깨닫기 시작했다.
"맞아. 그런 얘기가 있지? 남에게 소원을 말하면 그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그렇다면 알려주지 않는게 좋겠다. 응!"
주원은 그런 생각으로부터 저먼치 달아나기 위해 그녀의 말에 과하게 신경을 쓰며 대답했다. 어딜 봐도 어색한 태도. 스스로를 속이는 것 조차 이젠 익숙하지 않게 되어버렸으니까.
"한 글자를 알려줘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떡해? 그랬다간 아랑이 슬퍼할테니까, 괜찮아. 알려주지 않아도."
그렇게 말하곤 미소를 지어보인다. 우러나온 미소가 아닌 미소를 지어야한다는 생각으로 지어낸, 쓴맛을 지워내지 못한 미소. 귀여운 후배가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아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을테니까. 주원은 이어 말 없이 그녀에게서 메모지와 볼펜을 받아들었다.
"뭐라고 적으면 좋을까."
스스로도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무엇이 이루어 졌으면 좋겠는지. 이젠 슬슬 충분히 즐거우니까. 라고 생각하고 있기도 했다. 행복하냐고 묻는다면. 웃으며 행복하다고 대답할 수 있기도 했고. 매일이 흘러가는 일상. 누군가와 만나고,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가끔은 마음이 맞는 이야기를 하고 기뻐지고. 상대방과 어긋나고 슬퍼지고. 그렇다고 모든 인간 맞을 수는 없으니.
그렇다면.
주원은 무언가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을 작게 몇 번 접어 주머니에 넣는다.
"의외로 빨리 결정됐어. 아랑이도 다 쓰면 함께 내러 가지 않을래?"
그는 소원을 고민하고 작성하는 아랑을 보지 않기 위해 아랑으로부터 등을 돌려 어딜 둘러보더라도 벚꽃 가득한 풍경을, 들어오지도 않으면서도 그 눈에 담고 있었다. 그 눈은 그 벚꽃들을 보고 있지 않았지만. 그저 시선이 그 쪽으로 향하고 있을 뿐이었다.
왜 소원을 빌어보기 위해 나오자는 생각이 들었을까, 홍현은 어느새 노을도 다 져서 어둑어둑해진 학교 정원에 홀로 서있는 자신을 알아차렸다. 손에는 쪽지가 들어있었다. 쪽지만 펼쳐본다면 언젠가 소문을 듣고 썼을법한 이 쪽지의 내용을 알 수 있었겠지만 홍연은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아마 안에는 영양제의 완벽한 조합을 찾을 수 있게 해달라는 소원 같은 게 들어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왠지 미소가 절로 띠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버릇에 대해 들어있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자 미소는 사라졌다. 말을 더듬는 버릇, 완화시킬 수는 있지만 고치긴 힘든 버릇. 버릇에 대해 생각하니 왠지 답답해졌다. "불안감"을 주기 때문이었다. 불안함은 늘 그랬다. 한번 생겨나면 걱정이라는 질 나쁜 친구를 끌고 오는 나쁜 녀석이었다. 누군가 보는 건 아닐까, 만약 보고 있다면 뭐라고 변명해야 할까. 보고 있다면 원예부에서 키운다던 딸기를 보러 왔다고 말하면 되겠지. 하지만 서리한다고 생각하면 어쩌지? 거기에 이 쪽지는 어떡하지? 오만가지를 걱정하던 홍현은 현기증이 나는 것만 같았다.
홍연은 자신이 늘 들고 다니던 가방에 있던 강장제를 급하게 꺼내 따 한 모금 마셨다. 그와 함께 고개를 저으며 확실히 생각들을 떨쳐버렸다.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았다. 아니, 걱정들이 떨쳐져 확실히 머리가 맑아졌다는 게 느껴졌다. 홍현은 한층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벚꽃나무 아래로 향했다.
벚꽃나무를 올려다보며 잠시 생각을 가다듬던 홍현은 자신의 소원이 들어있던 쪽지를 들고 잠시 뜸을 들이다가 쪽지를 놓고 눈을 감았다. 속으로 시간을 세던 홍현은 간절히 속으로 소원을 빌어야 한다던 말이 생각났다. 잠시 가슴이 내려앉은 것 같았다. 쪽지 안에 뭐가 들었는지 모르는데. 하지만 왠지 눈을 뜨면 벚꽃나무가 화를 내서 자신을 쫓아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홍현은 자신이 썼을 법한 소원 두 가지, 두 가지를 빌어보기로 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홍현은 조심스레 눈을 떠보았다. 그리고 알아차린 건, 자신의 안경이 어딘가로 떨어졌다는 것이다. 아마 고개를 저을 때 떨어진 거겠지? 홍현은 급하게 뒤로 가서 잔디를 뒤졌다. 그렇게 한참 뒤지던 홍현에게 자신이 여기 있다는 듯 달빛을 반사시킨 덕분에 안경이 자신이 소원을 빈자리에 떨어졌단 걸 알게 되었다. 안경을 다시 주운 홍현은 앞이 잘 보이지 않아 쪽지가 사라진 건지 아닌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다시 한번, 소원을 빌러 온 김에 눈을 감고 아까의 소원을 빌어보기로 했다.
잠시 후, 눈을 다시 뜬 홍현은 안경을 썼다. 그리고 잠시 일어나 걸어가는 듯 싶다가 딸기 모종 옆에 앉아 아직 얼마 차지 않은 달을 바라보며 아까 마시다 말던 강장제를 음미하며 마셨다.
>>929 8ㅁ8.... 시계바늘을 돌려야 하는 걸까요...!! 쪼꼼만 더 힘내시고, 집에 오시면 천천히 쉬어주세요!
>>930 아니... 벌써 그런 면을 보셨단 말이에요...? oO 가예 프로필은 >>아니. 모든 사람을 품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군자의 덕목이니까.<< 요게 제일 인상 깊었다고 할까, 걸크러쉬!! 였는데 실제 일상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돼요! 😃 친한 친구들과 있을 때랑, 안 친한 사람이랑 있을 때랑 갭이 좀 있을 것 같지요!
>>934-935 연호주 어서오세요!! :D 쫀 저녁!! 여태 본 일상 조각 중에 제일 늑대 같아요...? oO (댕댕이같던 연호 봄) (늑대 같은 연호 봄) (번갈아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