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휘두르는 검에 검념을 담는다.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고싶다는 염원과 소중한 사람을 지킬 수 있는 영웅이 되고 싶다는 소원을 담는다. 그리고 너에 대한 미련을 담는다.
비를 머금은 먹구름이 흩어지고 하늘이 완전히 붉게 물든다. 석양을 등지고 선, 그런 나를 노을 빛으로 물들어 가는 하늘. 너와 선배와 내가 의뢰를 끝내고 올려다본 하늘.. 지금 와서는 그런 모든 추억들도 뉘엇거리며 흩어진다. 나는 나아가기로 결심했다. 이제는 너에 대한 미련을 접어두고, 나 자신을 미워하는 것을 그만 두려고 한다. 너를 구하지 못한 나를 원망해도 좋다. 하지만, 너는 그러지 않겠지. 당신은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너에 대한 미련과, 노을이 만들어낸 추억에 잠긴 상태로 검을 휘두르려는 나에게. 또 다른 너는 말했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너는 말했다.
'나를 봐'
한 순간 공훈갑이 만들어 낸 투구 밑에 번뜩이던 붉은색의 안광이 흔들린다. 눈 돌리지 말고, 지금을 보라는 너의 말에 검자루를 부러트릴 것 마냥 강하게 움켜쥔 나는 사양하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의념기 - 베르세르크Berserker
내가 휘두른 일격은 눈앞의 적을 완전히 해치우지 못했다. 미련이었을까? 아니면 후회였을까? 어쩌면 지금 여기서 너를 쓰러트리고 미련에 붙잡혀 있는게 싫었을지도 모르겠다. 난 너에게 패배함으로서 또 다시 나아갈 수 있게 되었겠지. ..그렇겠지.
공훈갑이 흩어지고, 망념이 한계라는 신호가 가디언칩으로 부터 울려퍼진다. 나는 이제는 보지못하는 너의 무덤에 풀썩 주저 앉아 기대며, 이제부터 봐야할 너를 바라보았다.
" ..차고 넘쳐 누님 "
나는 너를 용서할 수 있겠지. 언젠간 다시 볼 수 있겠지. 그 때 다시 볼 수 있으면 좋겠구나 루.
다림과 함께 에미리의 말을 듣고 있던 하루는 잠시 망설이는 듯 뺨을 매만지며 고민에 빠진다. 왠지 에미리가 양쪽을 말하는 어감이 미묘하게 달랐기 때문이었다. 생각해보면 연애라는 것은 그저 호기심만으로도 시작할 수 있는 것이라 했다. 물론 하루는 그런 것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지만 세상은 넓은 법이니까.
" 다림양, 저는 일단 정했어요! 에미리 양의 첫사랑 이야기를 듣는게 좋을 것 같아요! "
하루는 디저트를 입에 넣고 오물거리며 입안에 감도는 단맛을 즐긴다. 그리곤 그 단맛을 이용해 머리를 굴리며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활짝 웃으며 말한다. 역시 사랑이야기 쪽이 좀 더 깊게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 연애 이야기도 뭔가 새로운 에미리의 모습을 알 수 있을 것 같아서 궁금하긴 한데.. 역시 이쪽이 조금 더 궁금하긴 하네요! "
하루는 홍차로 입가심을 하고는 눈웃음을 지은 체 에미리의 눈을 응시하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망념따윈 신경쓰지 않았다. 평소의 장기전을 대비하는 태도따윈 버렸다. 가디언의 망념이 한계까지 치달았다는 신호. 더 싸울 수 없고, 전투력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경고. 남의 손목에서 울리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것에 죽음이 가까워졌음을 직감하는 건 나였다. 똑같이 의념이 제한되는 순간 질기게 버티고 서있던 나는 균형을 잃었다. 상반신과 하반신이 어긋난 듯, 그런 고통도 더 큰 고통에 삼켜지고 생각이 흐릿하다. 이 상태로 오래 있으면 위험하다. 다치고 피를 흘린 것도 이 상태라면 치명적이다. 건강이 제약된 몸은 나약하고, 영성이 제약된 두뇌는 우둔하다. 길게 생각하기 힘들다.
" ...보건실 좀 데려다 주련. "
이런 상태로 판정승이라니 큰 자비에 기대는구나. 구차한 몸이 허물어질 땐 긴장을 풀어버렸을 때였다.
"그렇죠? 짖궂었답니다." 정어리 파이는 잠을 깨게 하는데 효과적이었던 것... 그리고 경험이랄 것이라는 말에 에미리를 잠깐 빤히 쳐다봅니다. 하지만 에미리가 에미야라는 걸 아는 닙장에서는 그 연애상담이 경험에서 우러난 그런 것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걸요!
"질리도록 해봤다는 것도 경험이신걸요..." 음. 질리도록 해봤다는 건 좀 다른 영역인가. 라고 생각하지만 굳이 입 밖으로 내보내지는 않습니다.
"첫 연애랑 첫사랑이 다르다는 걸까요..." 쉿 하는 것 같은 에미리 양의 모습에 따라하는 것처럼 쉿 하는 손가락을 따라해봅니다. 활짝 웃는 하루 양의 말을 들어보면 역시 첫사랑이 대세인 걸까요? 손에 쥐고 있던 것을 슬쩍 주머니 속에 집어넣고는(메타적으론 주사위라고 한다)
"그럼... 저는" 이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짖궂은 미소로 하루를 바라봅니다. 뭔가 통한 것 같은 눈빛이었을까요?
"...역시 하루 양처럼 첫사랑 이야기가 듣고 싶네요..?" 아 짖궂기는. 그러면서 다림은 디저트를 한 입 앙 베어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