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프하면 닿는다는 말에 입술을 동글게 모았다. <오.> 짧은 감탄사를 위한 것이다. 점프해서 하나씩 글씨 쓰는 모습을 상상해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점이나 콕, 혹은 선 하나 찍 긋고 내려오는 것밖에 그려지지 않는다. 아니면 아예 펜촉이 들어가버리거나. 현실에 발 붙인 상상력은 역시 영 재미가 없다.
"역시 뭘 쓸 거면 벽에다 쓰는 게 낫겠어."
결국 재미없는 결론이 난다. 포기가 빠르다고 해도 할 수 없다. 원래 안 되는 걸 붙잡고 있는 성격이 못됐다.
"고작 하나 더 먹는 애 거 뺏어먹을 생각 없다."
말투가 마치 <아빠 안 잔다––.>의 그것이다. 말투대로라면 입에서 나온 것과는 다르게 뺏어먹는 게 맞지만, 내용만큼은 진실됐다. 사실 지금 시킨 것도 다 들어갈까 모르겠다. 혼자보다 둘이 먹을 때 훨씬 많이 먹게 되는 건 맞는데… 요즘 양이 좀 줄어서. 나이 먹어서 그런가. 누가 들으면 코웃음 칠 생각도 했다.
"밥 엄청 먹었지. 또… 엄청 누워있었지. 공부 좀 해볼까 싶기도 했는데, 장수하고 싶어서 안 했어."
안 하던 짓 하다가 갑자기 저승사자 와서 당신 갈때 됐소, 하면 어떻게 해. 어처구니 없는 핑계 같다고? 아주 정확하다.
“ 선배애, 선배는 유치원생 아니고 아무 데서나 누워서 떼쓰면 안 된다고도 했죠오? 안~ 돼요! ”
난동을 피워도 안 되는 건 안 된다. 주원도 이제 그걸 알고도 남을 나이였다. 언제까지나 떼쓰는 게 통용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아랑은 주원의 떼를 들어주지 않았다. 어떡하지, 선배. 대학생 돼서도 아무 데서나 저러면 안 되는데... 라는 생각도 살짝 했다.
“ 그래요~ ”
언젠가 ~ 하자. 빈말인 약속도 많을 터인데, 어쩐지 주원은 빈말이 아닌 것 같다. ‘ 약속은 하겠지마안, 도장은 안 찍어 줄 거야~ ’ 라고 말하고 싶지만, 주원 선배라면 찍어줄 때까지 버티고 있을 거 같지이. 아랑은 미소하는 얼굴로 주원의 새끼손가락에 제 새끼손가락을 순순히 걸고 도장까지 찍어주었을 테다.
“ 그 만화책이 너무너무 견딜 수 없이 재밌어도요~? ”
농담 투로 가볍게 물어봤다. 군용 담요... 별로 안 예쁘지만 크기가 크면 되었다. 이거면 쓸 수 있을 거라고 말하고 담요에 살짝 얼굴을 가렸다가 기대 가득 찬 눈으로 응시하는 주원에게 다가가 까치발을 들었다. 퐁퐁, 가볍게 머리를 두드려 주거나 머리에 손이 안 닿을 것 같으면 어깨를 두드려 주었겠지. 그러고나선 손을 내리고 발도 내렸을 거다. 이걸 바란 건지 모르겠지만, 방금 너무 칭찬을 바라는 강아지 얼굴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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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실을 나서서 정원을 걷다보면 벚나무가 줄지어 있는 게 보일 것이고, 그중에서는 조금 특별한 벚나무가 있을 것이다. 사이 좋게 정원 쪽으로 걸어가다가 벚나무를 보면 둘 중 누구 하나는 소원 나무를 생각하겠지.
“ 보니까 생각나네요~ 저어기 제일 큰 벚나무 아래에서 소원을 빌면 이루어 진다는 소문이요오. 선배는 3학년이니까 이미 소원 빈 적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
오늘도 학교는 활발하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대화소리와 배경소리에 같이 들뜬 발걸음으로 복도를 걸어가던 그는 가끔씩 여기저기서 뛰어다니는 모습이 눈에 띌 때면 저러다 넘어지지 않을까 걱정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면서 주의를 주곤 했다.
저 애, 아까부터 계속 뛰어다니는데 저러다 넘어지진 않을까?
복도를 지나갈 때마다 여기저기서 눈에 띄었던 뛰어다니는 붉은머리를 발견한 그가 슬쩍 다가갔다. 2학년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선배가 혼냈다고 우울해지게 만들진 않도록 주의하자! 속으로 다짐하며 바로 앞에까지 다가간 그가 뒤를 보고 멈춘 그에 깜짝 놀라며 황급히 급제동을 걸었다. 다행히 어느 정도 반사신경이 받쳐 주었기에 가까스로 부딪히지 않을 수는 있었다.
"아, 괜찮아. 너야말로 다친 곳은 없어? 아까부터 뛰어다니던데, 그러면 넘어질 수 있으니 조심해."
지나가던 같은 반 학생이 괜찮냐고 물어보자 고개를 돌려 괜찮다고 웃으며 대답해준 그가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다정한 얼굴과 다정한 목소리로 놀라지 않았을까 걱정하며 사근사근 달래며 그는 그의 안색을 살폈다.
"응? 절대 방어술?"
갑자기? 잠시 당황하던 그가 이내 부드럽게 웃으며 보여달라고 대답했다. 마치 어린 조카가 학교에서 배운 걸 자랑하는 걸 구경하며 호응해주는 삼촌 같은 말투였다. 아직 보지는 않았지만.
잠시 기다리던 그가 뒤에서 연필이 날아오는 걸 발견하고 눈이 점점 커다래졌다. 잠깐...! 황급히 소리치며 손을 들어 옆으로 밀치려고 해보았지만 이미 늦은 듯 했다. 자신이 늦었다는 걸 깨닫고 안색이 거무죽죽해지던 그가 정말 다행이게도, 연필이 붙잡히고 그 모든 게 앞에 있는 아이의 장난이었다는 걸 깨닫자 힘이 풀린 다리를 덜덜 떨며 안도했다.
주저앉으면 안 돼, 소리질러도 안 돼. 다른 아이들이 놀랄 거야. 어째서 까먹었을까. 아이는 때때로 해맑게 위험한 장난을 치곤 하는 걸.
"대단하네~. 그렇지만 실수하면 다치니까 앞으로 하지는 마? 누군가가 널 건드리거나 다른 사람이 맞았으면 어쩌려고 그랬어. 복도에서도, 어디에서도 네가 다칠 수 있는 위험한 장난은 하지 마."
그는 식은땀을 흘리는 창백한 안색으로 웃으면서 박수를 짝짝짝짝 쳤다. 이걸 연습하다가 얼마나 다쳤을까. 다른 아이에게 던져달라고 시킨 건 아니겠지? 그가 연필이 날아온 방향을 살폈다.
"미안해. 동생이 사이비는 들어가지 말라고 그래서."
주변에서 흘깃흘깃 바라보는 시선을 느낀 그가 다시 흐림 한 점 없는 맑은 안색으로 돌아와 안타까운 듯이 웃으며 거절했다. 악의는 없고, 형이 사이비 포교인에게 끌려갈까봐 걱정한 동생의 천주교, 기독교, 불교도 포스터 준다고 따라가면 안 되지만 그 외는 다 '사이비'라고 부르는 것이고 그런 곳에서 오는 제의는 절대, 저얼대애!! 따라가지 말라는 동생의 가르침이 담긴 말이였다. 그래도 명함은 받은 그가 "이름이 연호였구나~. 성씨도 그렇고 좋은 이름이네. 불과 호랑이 같아서 잘 어울려. 이름 뜻이 뭐야?"라고 궁금해하며 물었다.
따분하기만 한 수업 속, 하늘에서 눈을 돌려 내려다 본 정원에 커다란 뭉게구름이 함뿍 피었다. 그것을 보자마자 머릿속에 스치듯 떠오르고 만 것이다. 벚꽃에 파묻혀서 낮잠을 자 보자, 하고.
거추장스러운 신발과 양말은 나무 아래로 아무렇게나 벗어 던진 지 오래, 사방을 둘러싼 꽃잎들이 바람이 불 때마다 아지랑이처럼 흔들려 부서진다. 학생들이 빼곡히 들어찬 교실 창문 너머로 아무도 없는 텅 빈 정원, 흐드러진 벚꽃나무, 높은 가지에 기대 누운 밀색 머리칼의 소녀. 깊게 마실수록 나른하게 눈을 감기는 벚꽃향이 꽤.. 마음에 든다. 가지 아래로 늘어뜨린 다리 하나가 힘 없이 불규칙하게 흔들린다.
그러고 보니 애들이 무슨 이야기를 했던 것 같은데. 소원을 이루어 주는 벚나무 요정? 있잖아, 그거 굳이 종이로 써서 건네야만 하는거야? 진짜로 벚나무 요정이라면 여기서 외치는 걸로 대신해서 들어 주지 않을래? 거기에 벚나무 요정이 자기의 말을 듣고 있다는 확신조차 없는데도, 마치 옆에 있는 듯 조곤거리며 졸라 보는 것이다.
으응, 농담이야. 어차피 이런 건 속는 셈 치고 위안을 얻어 가는 것에 불과하잖아. 하지만 그런 점을 좋아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에서 눈을 돌려 희망을 바라보는 건 중독되어 버릴 만큼 달콤하니까. 그러니 한번 더 속아 볼래. 여기까지 와서 이런 소리나 중얼거리면 너도 슬프지? 키득키득, 작은 웃음소리를 흘리더니, 기대 있던 몸을 튕기듯 일으켜 아래를 본다. 투박하게 찢긴 종이에 아무렇게나 휘갈긴 것을 접어 기둥에 던져 넣고는, 두 손을 모아 올리는 아주 찰나의 기도. 뜬 눈에 나른한 웃음기가 가득하다.
“ㅡ!”
무어라 외치는 짤막한 소리는 알아들을 수 없이 금방 바람에 실려 사라졌다. 가지가 스치는 소리 사이로 아하하하, 하는 맑고 경쾌한 웃음소리가 묻혀 울렸다.
주원이 난동을 부리고 떼를 쓰는 모습에 아랑이 안 된다고 하자 그제서야 그것을 멈추고 짐짓 슬픈 표정을 지으며 훌쩍거린다. "아랑은 되지만 나는 안 된다니. 쿨쩍." 그 이유를 아예 모르는 것도 아니었지만 주원으로서는 그저 아쉬울 뿐이었나보다.
아랑이 손가락을 걸고 약속해줄까. 조금 불안한 마음도 있었지만 결국 그녀가 새끼손가락을 걸고 도장을 찍어주자 주원은 환히 미소지으며 "응!" 하고 대답했다.
"으, 윽. 물론이지. 아무리 재미있는 책도 나중에 혼자 읽을 수 있지만, 아랑이랑 함께 있는 시간은 언제나 있는게 아니니까."
좀 더 길게 있었으면 좋겠지만. 하고 생각하면서도 구태여 덧붙이지 않았다. 그렇게 말을 했다간, 너무 속내가 드러나는 것 같아서이다! 주원은 이 귀여운 후배를 언제까지도 끌어안고 쓰다듬은 마음으로 가득했지만, 스스로는 거기까지는 들키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마 이미 훤히 드러났을지 몰라도. 이어 군용담요를 갖고 온 주원을 보고 아랑이 까치발을 들자 주원은 익숙한 듯 상체를 숙이고 그녀가 쓰다듬을 수 있는 높이로 머리를 낮춰주었다. 아랑의 작은 손이 주원의 폭신폭신하고 부드러운 머리를 쓰다듬자 말하지 않아도 통했던 것이 기뻐서인지 주원은 "으헤헤." 하곤 헤벌레 웃음짓는다.
그녀와 함께 부실을 나와 학교 정원쪽으로 향하니, 벚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주원은 벚나무들이 줄지어 잘 보이면서도 시선 정 가운데에 커다란 벚나무가 보이는 곳에 돗자리(가 아닌 군용담요) 를 반으로 접어 깔아둔다. 크기가 왠만큼 되니 반으로 접어도 둘이서 앉기엔 충분했다. 주원은 좀 더 접어 어쩔 수 없이 거리를 좁히게 할까 하고 생각했지만 그랬다간 굳이 왜 더 접었냐며 혼날 것 같아 적당히, 양심적으로, 두 번만 접어 펼쳐둔 것이었다. 접지 안고 폈다간 엉덩이가 아플지도 모르니까.
주원은 앉아 봄의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벚꽂 가득 매달린 벚나무들을 응시했다.
"좋다..."
그리곤 작게 중얼거린다. 스스로 의식하고 말한 것이 아닌, 그저 자기도 모르게 내뱉은 말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