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니가 아닌 다른사람이 물었더라도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고 대답했을것이다. 뒤에 나오는 말이 조금 달랐겠지만.
" 오히려 더 버텨줬으면 했는걸. 더 살아있었으면했어. 계속 아파하는게 보고싶고.. 계속 살려달라고 비는게 보고싶었고 그리고 계속 계속 아파했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했지. 픽 죽어버리면 너무 싱겁잖아. "
솔직한 감상이었다. 왜인지 모르게 이 사람에게는 그 때 당시의, 누군가에게 말하지 못할 솔직한 감상을 말할 수 있었다. 그 탈은 자신을 아프게 했었다. 무시했고, 기만했으며 욕보이고 지옥같은 고통을 줬으니 적어도 그에 몇 배에 달하는 고통을 맛보게 하기 전에는 죽어버려선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레오는 또 이히히.. 하고 웃었다.
" 노력은 해볼게, 노력은. 너무 기대하지는 말고.. "
선비탈이라면 그 때의 그 녀석인가. 그 자리에서 아즈카반으로 끌려갔다고 하던데 또 탈옥했구나. 레오는 파- 하고 한숨을 쉬었다. 아즈카반, 어쩌면 굉장히 물렁한 곳일지도 모른다. 아즈카반이란 단어를 듣자 레오는 또 다시 자신이 세워놨던 가설들이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기 시작했다. 어쩌면 버니의 집이 불타고 모든 구성원이 죽은 것부터 특별사면-그녀의 말에 따르자면 탈옥, 누구의 말이 사실인지는 모른다-이 전구 매구의 계획이었다는 자신의 가설.
" 신경쓰이지않는다면 거짓말이지. 나, 그 교수님 꽤 좋아했거든. 신비한 동물도 좋고. 사람도 좋아보이고.. "
레오는 다시 슬쩍 손을 잡고 입으로 가져와 입술에대고 부- 하고 바람을 불면서 조금은 정신사납게 장난을 쳤다. 초콜릿 향기와 딸기향이 난다. 도넛의 향이구나.
" 그 사람하고 내가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는 불편한 생각이 들어. 그 사람은 탈을 썼고 나는 그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렇게, 이러고 있고.. 그 사람은 우리를 지키기 위해 탈을 썼다고 하고 나는 나를 보호하기 위해 저주를 배웠고. 그 둘 사이가 뭐가 다른지 모르겠어. 아니, 그런데 그 말을 어떻게 믿어? 수틀리니까 거짓말 한걸수도 있잖아. 그치? "
레오는 자기 눈 위에 덮어둔 버니의 손을 살짝 치우고 눈을 뜨고 올려다보고는 다시 눈을감고 손을 눈 위에 얹었다. 극심한 인지부조화. 불쾌감이 계속해서 스멀스멀 고개를 들고 자꾸만 목을 조르는 느낌이다. 레오는 파- 하고 한 숨을 쉬었다. 불편한 진실과 달콤한 거짓중 무엇을 따를지는 스스로가 선택하는 길이겠지만 지금으로선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알 수 없으니 무조건 스스로가 맞다고 믿는 수밖에.
라온에서 친구를 만나기로 했다. 인카서러스 마법을 도와야 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묶거나 목에 초커를 매주는 등, 자신의 사람임을 표시하는 걸 좋아하는 기묘한 성벽에 어울려주거나 할 생각은 없었지만 궁금한 것이 많았기 때문에 필히 만나야만 했다. 너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그는 학교를 다니지 않고 여러 죽음을 마주해서 아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너도 치료사 가문의 사람인지라 여러 응급처치는 알고 있지만, 직접적인 사인을 꿰뚫는 그라면 조금 더 자세한 지식도 당연히 있을 테니 누군가 다쳤을 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조금 약속이 흐트러지고 말았다.
[새벽 3시는 어려울 것 같네만 뻐꾸기 여덟번 우는 시각은 어떤가.] [전날 약속을 바꿔버리는 사람이 세상 어디 있나.] [나도 일이 이렇게 생길 줄은 몰랐네. 시체가 세 구나 들어왔어. 금방 처리하고 오지.]
하지만 죽음의 앞에서는 아무리 천방지축인 너라도 조용해진다. 너는 군말없이 라온의 뒷골목에서 친구를 기다리는 것이다. 늘 그렇듯 귀곡탑 근처의 골목이다. 너는 이곳은 인적이 드문 걸 잘 알고있다. 여기에서 친구를 만나기도 하고, 저번엔 마노 경을 만났다. 추종자는 그래도 상처를 치료해주는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다른 탈을 만나보니 아니었다는 걸 깨닫긴 했지만 말이다. 너는 돌멩이를 발끝으로 톡 때렸다. 머글이니 혼혈이니 다 어려운 말이다. 사람은 그냥 사람이지 않은가. 친구는 운 좋게 품종교배가 잘 된 녀석들이 짐승의 삶을 우월하다고 으스대는 것이 꼴보기 싫다 했지만 너는 그정도까진 아니었다. 어려운 고민을 떠안던 그때 인기척이 느껴지자, 너는 조심스럽게 그림자 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왔ㅇ.."
헉. 너는 깜짝 놀라며 다시 그림자 속으로 후다닥 숨는다. 다른 사람이다! 어린 소년의 목소리를 한 너는 그 목소리에 걸맞게 수줍은 행동을 보였다. 고개를 빼꼼 내민 너는 누군지 알아보곤 입을 우물거렸다. 탈과 조우했을 때, 하마터면 공격을 맞을뻔한 친구였다. 너는 가면이 없는걸 깨닫고 얼굴을 잠깐 더듬더니 눈을 내리 깔았다.
아주 가끔이지만, 리치와 함께 라온에 나올 때가 있다. 보통은 그러지 않지만 유달리 리치가 그녀에게 매달리는 날이 있는데 그런 날은 떼어도 밀어도 어떻게든 달라붙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데리고 나온다. 크로스백처럼 생긴 가방에 리치를 담아 메고서 밖으로 나오면 어찌나 좋아하는지. 이런 날은 또 평소랑 다르게 마차도 잘 타고 주변 인파도 덜 경계한다. 그래서 혼잡한 거리를 걸어도 갑자기 뛰쳐나갈 걱정은 덜 수 있었다.
"리치리치~ 사람 구경이 그렇게 좋아?"
먀옹!
고개를 빠끔 내밀고 주변을 두리번두리번 구경하는 리치에게 묻자 당연하지 않냐는 듯 곧장 대답이 돌아온다. 가방 안에서 꼬리를 흔드는 움직임이 느껴져 엉덩이 부근을 토닥여주고 느긋하게 거리를 걸었다. 그냥 산책 겸 나온거라 가게 같은 곳에 들르지 않고 걷다보니 외진 곳까지 도착하는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북적이는 라온 중에서도 외진 곳, 가림빛과의 경계인 귀곡탑과 가까운 곳. 출입이 금지된 곳이 가까우니 자연히 사람도 없고 조용해진다. 이 곳을 저번엔 그와 함께 걸었지. 멀찍이 보이는 귀곡탑을 보면 떠오르는 기억에 괜히 낯이 간지러워진다. 그래서인가, 그녀 역시 그림자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작은 사람에 흠칫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아."
깜짝아.
놀란 표정 놀란 몸짓과 달리 내뱉는 말은 평소와 다를거 없는 톤이다. 그건 가방 속의 리치도 마찬가지라, 무슨 일이 있냐는 듯 그녀와 앞을 번갈아 볼 뿐이다. 별거 아니라고 머리를 좀 쓰다듬어 준 후 갑자기 튀어나왔던 사람이 누군지 확인했다. 작은 체구, 검은 머리, 한번 보면 잊기 힘든 특유의 눈. 그녀 역시 초랭이탈을 두고 마주했던 그 학생을 떠올렸다. 그 때는 이런 느낌이 아니었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반걸음 물러섰다. 어딘가 주눅들어보이는 상대를 위한 거리였다.
"부딪힌 것도 아니니 괜찮아요."
그 말대로, 직접적으로 부딪히거나 뭔가 잘못된게 없으니 사과받을 이유가 없었다. 그러니 괜찮다고 말하고 고개를 살짝 꾸벅였다. 그건 그렇다 치고, 여기서 친구를 기다린다, 라. 아무리 봐도 장소가 조금 잘못된 거 아닌가 싶어 말해본다.
"과한 참견이겠지만, 이런데서 사람을 만날 거라면 좀더 조심하는게 좋겠네요. 교수들에게 들키면 귀찮아지니까요."
먀오옹!
그녀의 말에 동조하듯 리치가 고개를 들고 울었다. 그리고 귀를 쫑긋거리며 이노리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 그래, 그 마음가짐이야. 쉽게 죽으면 재미없어. 그런데, 그 생각이랑 진짜 잘 맞는 놈 생각난다..... ’
선비탈이 생각난 부네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습니다. 그녀가 느끼기에는 레오는 그 쪽이 아니라, 이 쪽과 잘 어울릴 게 분명했으니까요.‘ 흐응, 아. 그렇겠네. 너희한테는 좋은 사람이지. 우리한테는 매ㅡ우 귀찮은 거라. ’
그녀는 한 손으로 자신의 턱을 괴더니, 픽 웃었습니다. 그리고 레오를 바라봤습니다. 말해줄까 말까 고민하는가 싶더니, 그대로 얼굴을 레오에게로 확 가까이 댔습니다.
‘ 내가 알려줄까? 그 놈의 진실? 어느 날, 직접 주인님을 따르겠다고 와서는 [그 학원 학생들에게 살인 저주를 날리지 마세요, 말로는 믿지 못하겠으니까 여기 있는 전원과 깨뜨릴 수 없는 맹세를 하면 이 탈을 받겠습니다] 라고 한 거야. 주인님이 재미있게 여기셔서 그 맹세를 한 거지. ’
진짜일지, 거짓일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녀는 다시 고개를 뒤로 확 물렀습니다. ' ‘ 뭐, 어렵게 생각할 거 있나. 네 편할 대로 생각하면 되는 거지. 나도 내 편할 대로 행동하는 거야. 물론, 그 행동에 일말에 후회는 없어. 중요한 건, 주인님이 거기에서 날 꺼내주셨다는 거지. ’
그 말을 마친 버니가 먼치킨 도넛을 하나 먹기 위해 집어 들었습니다. 곧바로 레오의 목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꽤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리곤 레오의 입에 먼치킨 도넛 하나를 넣어줬습니다.
놀란 표정과 몸짓을 보며 너는 마찬가지로 눈이 동그랗게 뜨이더니, 손을 앞으로 모았다. 손가락을 꼼질거리는 것이 놀라게 해서 제쪽도 당황한 것 같았다. 잠깐의 망설임 끝에 눈을 살짝 들어 확인하니 저번에 만났던 사람이 맞다. 너는 기억력이 제법 좋은 편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고양이를 향해 시선을 흘끔 옮겨보인 너는 애써 미소를 지어보였는데, 상대방의 배려 덕분이었다. 괜찮다는 말과 함께 반걸음 물러나준 덕분에 너는 한결 편하게 말을 할 수 있었다.
"조언 감사합니다..."
부끄러운지 뺨을 발그레 물들이며 입술을 몇번 뻐끔거리다 뱉은 말은 어린아이가 처음 보는 어른에게 선물을 받듯 머뭇거리는 면도 있지만 제법 차분하다. 너는 눈앞의 학생이 건넨 조언을 듣고 납득했고, 추후 일어날 파문도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다. 이렇게 으슥한 곳에서 사람을 만난다는 소문이 와전되면 가뜩이나 이상한 애라던 평가가 더 나빠질 수도 있는 법이기 때문이다. 최근 학생 중에서도 탈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져 흉흉하였기에 접선을 시도하려는 어둠의 마법사로 낙인이라도 찍히면 큰일이 아닌가.
하지만 친구는 사람을 통 좋아하지 않고 어린 나이에 흡연을 하기 때문에 으슥한 곳이 필요했다. 친구에게 자신이 있을 때는 흡연을자제하라고는 했지만 인간에 대한 환멸을 늘어놓으며 이건 제법 정당한 일이라는 궤변을 끝으로 자제는 커녕 들어먹을 사람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음부터는 학생의 조언대로 다른 곳을 찾아보든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덜 어두운 곳이면 될 것 같다. 누군가에게 들키면 친구가 알아서 할 것이다. 물론 그 방법이 섹튬셈프라 이후 오블리비아테면 너는 극구 말려야 하겠지만.
너는 고양이의 울음소리에 고개를 들어올린다. "야옹아, 안녕." 하고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 눈을 맞추고 천천히 깜빡여보이곤 배시시 눈만 휘어보인다. 이후 고양이에 정신이 팔린 걸 깨닫듯 흠칫 놀라고는 손가락을 꼬물대더니 고개를 천천히 들어올리고 꼭 사고를 치다 걸린 아이처럼 멋쩍게 웃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