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손 끝에 차가고도 기분 좋은 감촉이 전해져오고, 주양은 저도 모르게 히죽 미소짓고 말았다. 여태껏 이런 이상한 기분은 처음이었다. 오묘하고, 미묘하고, 그리고 내기로만 느꼈던 짜릿한 기분을 지금 한껏 느끼면서. 만약 자신이 그것과의 내기에서 진다면.. 그땐 두번 다시는 느낄 수 없을 기분이라고 생각하니 조금은 묘했다. 놀랍게도 우리는 이미 내기의 결과에 대해 알고 있다. 허나 주양이 그것을 알 턱이 없었기에, 그저 당신의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던 손 끝을 꾹 눌러 매만지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퍙생 간직할 수 있겠지?' 하고. 조금은 순수하게 미소지어보이기도 하면서.
"음~ 우리 여보야가 보여주는 모습이라면 다 좋지만~ 그래도 역시 애태우는 모습이 제일 끌리는걸? 열심히 나한테 그 모습을 보여줬으면 좋겠다구~"
그 모습이 끌리는 데는 이런저런 많은 이유가 있기는 하지만, 그중에서도 제일 큰 이유는 역시 그렇게 구는 당신의 모습을 쉽게 떠올릴 수 없어서인 탓이 컸다. 다른 모습들도 충분히 끌리고 매력적이겠지만, 역시 상상할 수 없는 모습에 제일 흥미가 끌리는 것은 어쩔수 없는 일이었다.
"아쉽지만 아직 그건 아니야~ 단지. 우리 여보야한테 아주 잘~ 어울리는 예쁜 물건들을 준비했을 뿐인걸! 기대해도 좋다구~?"
물론 당신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그 물건들을 전해줄 타이밍은 전혀 로맨틱이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일찌감치 체감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 이야기는 좀 더 뒤로 미뤄야겠다고 생각하기는 했으나 그것은 아주 잠깐일 뿐이었다. 미뤄봐야 좋은 건 없으니까. 그리고.. 언젠가는 알아야 하니까. 다만. 아직은 당신의 이야기에 확답을 주지 않은 채, "입마개라면 지금도 해줄 수 있어." 하고 당신의 코끝을 톡 건들며 잔망스럽게 웃었다.
"으.. 그. 나도 지팡이 있거든..! 마법 쓸줄도 알고! 다, 단지 주문이 기억나지 않았을 뿐이야.."
방으로 돌아와서. 당신의 이야기에 잠시 수줍어하는것도 잠시, 무릎 위에 앉혀지자 눈을 몇번 깜빡거리던 주양은 이윽고 수줍게 웃어보였다. 당신에게 부담이 안 갈 정도로만 슬쩍 몸을 기대어오며, '방음주문은 언제까지 쳐둘 생각이야?' 하고 짓궂은 물음을 던졌다.
물음을 던지는 것과 당신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별개의 일. 당신이 들려주는 책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주양은 눈을 빛내며 흥미를 보였다. 자신만 재밌는 책 읽은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구나 싶다. 정확히는, 읽었다기보다는 그것과 필담을 나누듯이. 바로 옆에 그것을 두고 이야기를 나누는듯한 기분이 들었다는 쪽에 가까웠다. 당신의 이야기가 끝이 나고, 주양은 잠시 뜸을 들이며 더더욱 몸을 기대어왔다. 이제. 그 이야기를 할 차례구나.
"나는. MA가 재앙이기 이전. 그러니까.. 신이었을 때 그것과 내기를 한 사람에 대한 책을 읽었어."
그게 아닐지도 모르지. 사실대로 말하자면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었다. 짜릿했고 고양감이 차올랐으며 흥분감에 몸이 달아오르기까지 했었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그런 말을 하지는 못했다. 이또한 일종의 방어기제였다.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거짓말을 하는것. 짜릿하고 몸이 달아오를 정도였지만 '그렇게 나쁘지는 않네' 정도로 치부하는것. 사실 중탈과 자신이 무엇이 다른지도 모르겠지만 어찌되었든 우리는 다르며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는 흑백논리를 펼치는 것이 레오가 할 수 있는 방어기제의 전부였다.
" 아니 그냥, 음.. "
어디서 들었냐는 말에 레오는 잠깐 입을 닫았다. 역사서에서 읽긴했지만 그걸 그대로 말한다고 믿어줄지도 의문이고 자신이 알고있는 내용을 말한다고 한들 조리있게 말할 자신도 없었다. 나름의 추리라면 끝내놓았지만 그걸 말했을때 예의 그 '주인님'이라는 것을 믿고 따르는 버니가 어떻게 반응할지는 불보듯 뻔한 일이기도했고. 레오는 자기 눈을 가리고 있는 버니의 손가락을 살짝 벌려 표정을 보았다.
" 너 표정 보니까 말 안하는게 낫겠다. "
사람을 화나게 하는 방법은 두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말을 하다가 마는거고 두 번째는...
레오는 이히히, 하고 웃고는 다시 손가락을 붙여 눈을 가렸다. 어딘가 졸린 느낌마저 드는 것이 의외로 자신은 지금 누워있는 이 자리를 편하다고 느끼는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분명 적일텐데, 분명 아즈카반에 수감되었던 죄수일텐데 작은 밀회를 몇 번 가지다보니 금새 편하다고 느껴버리는것이었다.
월식 주막에서 학생들에게 새로운 버터맥주 레시피를 받고자 한다. 식용 꽃, 설탕, 솔티 캬라멜, 과일 등을 넣고 새로운 레시피를 만들고자 한다는 데...대체 두가지 이상을 넣으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단가가 크게 올라가니 무리인것 같다.
식용 꽃은 넣을 수 없다. 왕건이 한 여성에게 마실 물을 달라고 하자 현명한 여성은 왕건이 급히 먹다 사례가 들리지 않게 나뭇잎을 띄워서 준 것처럼 식용 꽃은 아무리 식용이라할지라도 맥주를 마시는 데 방해만 된다. 무엇보다 결국 꽃잎도 풀때기인지라 굽거나 찌는 등의 열을 가하지 않는 이상 식감이 별로다.
설탕을 중점적으로 사용해보기로 한다. 설탕을 끓여 끈적한 카라멜로 만든 후 버터맥주에 섞는다. 아무래도 그냥 설탕을 넣으면 녹지 않은 설탕 알갱이가 바닥에 가라앉아 씹힐 수 있으며 그런 경험은 그다지 좋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지팡이를 휘두른다.
젤리를 먹는 사이 시선이 느껴져 옆을 힐끔 보니, 그녀를 보며 미소를 짓는 아성이 있었다. 왜지. 제가 뭐 웃긴 말이라도 했던가? 그렇다고 비웃는 건 아닌거 같고. 굳이 따지자면 그녀의 손윗남매가 가끔 짓는 미소 같은 느낌이다. 아, 선배니까 그런가. 대충 납득할만한 이유가 떠올랐으니 그런가보다 하자. 불쾌한 일도 아니니까.
이번엔 지팡이로 휘둘러서 부순 사탕을 먹는 아성의 말에 그녀는 어련하겠냐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다른 건 몰라도 먹을 걸로 장난치는 걸 좋아하지 않는 그녀로서는 간식을 먹는데 재미를 찾는게 그닥 와닿지 않아서다. 그냥 맛있는 걸 먹는 걸로도 충분히 즐거운데. 굳이 뭘 하면서 먹을 필요가 있을까.
"곧 졸업인 선배가 재미를 찾을 여유가 있으실 줄은 몰랐네요."
한참 시험이다 과제다 바쁠 학년일텐데, 여유가 넘치는 모습이 신기하기도 하다. 이미 진로가 정해져 있다거나 아니거나 한 걸까. 궁금하긴 해도 개인 사정을 파고들 생각은 없어서 다른 말로 흘려넘긴다.
"뭐, 본인이 좋아하는대로 즐기면 그만이겠죠. 던지는 것도 먹는 것도."
진로도 장래도 미래도, 다 같은 거다. 이어야 하는 가업 같은게 있다면 말이 달라지겠지만. 그녀는 젤리 몇개를 더 집어먹고 남은 봉투를 접어 주머니에 챙겨넣었다. 요기는 되었으니 다시 돌아다니든가, 돌아가던가 해야지 싶었다.
불가능은 아니지만 매우 극소수인 경우라고 생각한다. 아성의 경우는. 실제로 한창 달리는 선배도 제법 있는 걸로 알고, 그로 인한 스트레스도 어마어마한 걸로 안다. 뭐, 그로 인해 극단적인 사례가 백궁에서 나온 적 있었으니까 말 다 했지. 그녀는 문득 한번 만났던 버니가 떠올랐다. 아즈카반에 끌려가기 전은 어땠는지 궁금한데, 흠.
즐기고 싶은 대로 즐기면 그만 아니냐는 말에 아성이 동의를 표하기에 그녀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 이상 붙잡을거 같지 않으니 이만 자리를 떠야겠지 싶다. 그녀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치마를 툭툭 털어 정리하고, 가볍게 기지개를 켠 후 아성을 향해 고개를 다시 한번 까딱였다.
"그럼 쉴 만큼 쉬었으니 먼저 가볼게요. 선배."
언제 어디에서 마주칠지 모르는 일이니 다음을 기약하진 않는다. 그래도 복도 같은데서 마주치면 인사는 해주자고 생각하며, 천천히 그 자리를 벗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