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사건이 있었던 날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모두가 입 다물고 감추기로 했으니 일상은 뒤틀림을 숨기고 언제나와 같은 평온을 가장한다. 교묘하게, 어떤 면에서는 절박하게도. 이질점을 스스로 집어내어 붙잡지만 않는다면 모든 일이 평소와 같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좀처럼 가라앉은 기분을 떨치지 못했다. 무엇이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어 갔는지 알 수 없다. 지난번에는 현궁의 학생 하나, 이번에는 교수. 비록 후자는 다른 의도를 가졌었기에 참작한다 치더라도 그들이 내부에서부터 숨어들어 있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택영은 아직 자신이 교수에 대해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만약에 그가 정말로 무고하다면 과연 그를 원망하지 않을 수 있을지, 그들에게 섞여들기 돌이킬 수 없는 죄업을 하나라도 저질렀다면 영영 그를 두려워해야 할지.
생각이 복잡했지만 과업에 태만할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울적해하면서도 부지런히 원내를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주변에 별다른 사건사고가 없는지 살펴보는 일을 한 것이다. 움직이니 잡스러운 생각이 덜 드는 듯했다. 생각이 많을 때 고민을 덜어내는 특효약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몸을 움직이는 활동이고, 다른 하나는……. 잡생각 따위가 들 틈도 없이 정신 없는 일에 휘말리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난데없이 사람 하나와 정체 모를 동물 하나가 제 쪽으로 우다다다 달려오는 지금 상황처럼.
이 뭐꼬……. 그는 가장 먼저 손을 들어 눈을 비볐다. 눈을 한 번 가리고 깜빡거릴 때마다 영화의 기법처럼 이노리의 모습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것이야 지극히 일상적인 광경이니 문제 삼을 일은 아니다. 사람이 급하면 복도에서 좀 뛸 수도 있지. 다치지 않게 조심한다면 괜찮았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이노리의 뒤를 따라오는 생물이 점점 생동감을 더해가며 덩치를 키워가니 문제였다. 저건 거꾸로 디비져서 봐도 문카프였다. 일반적인 동물도 아니고, 패밀리어도 아니다. 즉 야생동물을 데려와서 우당탕탕을……! 당장이라도 뒷목을 잡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그럴 시간이 없어 하지 못했다. 말리지 않으면 그대로 멈추지 않고 온 복도를 휘젓거나 충돌 사고가 생길 게 뻔하니, 택영은 일단 이노리와 문카프가 달려오는 경로의 한가운데에 서서 두 손을 휘휘 커다랗게 휘저었다. ……부디 이노리가 이 동작을 반갑게 인사하는 것으로 받아들이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막내동생의 연애 소식에 라온까지 찾아왔던 파이몬을 맞이한 건 당사자의 싸늘한 대접과 그런 그녀의 곁에 거리낌없이 다가가는 한 남학생의 모습이었다. 냉랭한 엄포에 굳어버려, 돌아서는 그녀를 바로 붙잡지 못 하다가, 뒤늦게 카페테리아에서 나와 쫓던 중 둘이 같이 있는 장면을 보고 만 것이다.
자신에게는 한겨울의 북풍처럼 싸늘하게 굴던 막내동생이 붉은 머리에 키가 훤칠한- 본인의 표현으로 기생오래비 같은 남학생의 옆에서 한없이 다정하게 웃고 있었다. 파이몬을 그 장면을 보고도 차마 가까이 다가가질 못 했다. 지금 저기에 끼어들었다간, 조금 전 들었던 엄포가 현실이 될 것을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 가서 둘을 갈라놓고 주먹으로 저 놈의 출신성분을 낱낱이 털어내고 싶었다만. 그것은 이루지 못 할 숙원으로만 가슴에 품은 채 그곳에서 나와야만 했다.
풀 길 없는 답답함을 어찌해야하나 싶던 파이몬은 남매들이라면 그나마 대화가 통하지 않을까 싶어 본가로 모두를 불러모았다. 그냥은 안 모일테니 회심의 술을 미끼로 부르자 다들 귀찮아 하면서도 모여주었다.
"이게 얼마만이야~ 라고 해도, 막내 개학하고 얼마 안 지나서 별로 새삼스럽지도 않네~" "그러게 말이다. 난 이 시기에 파이가 여기 있다는게 더 신기해." "...보나마나 리체 관련이겠지..." "거 주둥이가 많으니까 한마디씩만 해도 시끄럽다. 야야, 떠들고 말고 잔이나 들어."
그렇게 간만에 남매들끼리 술자리가 열렸다. 다들 한 주량 하다보니 독한 술 두세병을 비울 때까지도 술기운은 티도 안 났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 술이 도는 건 이길 수가 없었으니. 하나들 뭉근하게 술기운이 올라올 쯤 되자 이때다 싶었던 파이몬이 라온으로 그녀를 찾아갔던 일을 슬그머니 꺼냈다.
"야, 내가 있잖냐- 막내 그게 애인 생겼다는 말 듣고 거기, 거 라온까지 찾아갔었거드은?"
알콜의 기운 탓에 다소 말이 늘어지긴 했지만, 가서 무슨 대화를 했고 어떤 대우를 받았으며 저를 그렇게 대한 그녀가 기생오래비-애인으로 보이는 남학생과 얼마나 알콩달콩하던가 상세히 늘어놓는데는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그 고민에 동감을 표해줄 줄 알았던 남매들이 보인 뜻밖의 태도들이었다.
"이야- 이 XX 진짜 찾아갔네? 아 이래서 내기하기 싫었는데." "후후! 그 얘길 듣고 가만히 있으면 파이몬이 아니지~ 브리, 나중에 돈 똑바로 내놔? 응?" "재미없긴... 사람이 너무 한결같아도 매력없어..."
자신이 어떻게 할지를 두고 내기를 한 듯한 블리스와 헬리아는 두 말 할 것도 없고, 그나마 자신과 비슷한 마음일거라 생각했던 델피니조차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것이 아닌가. 어느 누구도 자신의 답답한 심정을 이해해주거나 알아주지조차 않는 상황에 파이몬은 그나마 들었던 술기운도 깰 듯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남매들의 입담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 본인에게로 화살이 돌려졌다.
"뭐 내기야 그렇다 치고. 파이 너도 참 징글맞어. 리체는 더이상 그 때의 꼬맹이가 아냐. 그렇게 득달같이 굴 필요 없다고." "아니 그래도 아직 성인도 안 된 애인데," "그래서 뭐, 언제까지 싸고 돌 건데? 어? 나이 차면 다 컸구나 하고 놔줄려고?" "그건 그 때 가서 생각-" "하! 야, 말만 보면 아주 그냥 평생 돌봐주기라도 할 거 같이 구는데, 팩트만 까볼까? 우리 중에 가장 먼저 그 애를 포기했던 건 너잖아."
파이몬의 가장 아픈 곳, 아니, 가장 양심의 가책을 찌르는 말에 일순 자리가 조용해진다. 술맛보다 쓴 말을 들은 파이몬이 조용히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리자, 블리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술잔을 기울였다. 그를 대신하듯 헬리아가 나긋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그 때 정~말 정말 큰 일이었지~ 우리 귀여운 막둥이가 매일 매일 바닥만 보고 다니는데, 그거 달래주느라 얼마나 고생했던지~ 그래도 딱히 파이를 원망하진 않았어. 응.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 "2년이나 돌봤으니까 그만하면 고생했고, 나랑 브리가 졸업한 해에 나갔으니까 그렇게 무책임하지도 않았지. 그러니까~ 우리는 그럴 수 있지 하고 파이의 만행을 넘어가줬어. 나중에 돌아왔을 때, 리체도 아무 말 안 했잖아. 우리는 널 봐줬는데, 넌 왜 그래?" "그거랑 이거는 다르지..." "아니? 뭐가 다르다는 거야. 같은거잖아. 파이가 제멋대로 나간 거랑 리체가 제멋대로 연애하는게 뭐가 달라. 따지자면 리체의 대처가 더 현명하지. 사후 보고긴 해도 말을 해줬잖아. 그런데 파이는? 말도 없이 나가서 2년 동안 아무 소식도 없다가 갑자기 돌아왔었지? 뻔뻔하게 웃는 얼굴로 기어들어온 너를 책망하는 사람이 한명이라도 있었나? 그런 대우를 받아놓고, 이제와 무슨 낯짝으로 리체에게 행실이 어떻니 따위를 따질 수 있어?" "...젠장..."
블리스가 묵직하게 치고 들어간다면 헬리아는 특유의 나긋함으로 차근히 짓밟는 스타일이었다. 그것도 정확히 팩트만 짚으니 파이몬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죄인마냥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었다. 그저 자신의 답답함을 들어달라 하려고 만든 자리에서 이렇게 역풍을 맞을 줄이야. 반쯤 마음이 꺾인 파이몬을 보고도 누구 하나 달래주지 않는다. 형식상의 위로도 없다. 델피니는 질린다며 술잔을 들고 자리를 피하고, 블리스와 헬리아만이 쿵짝을 맞춰 대화를 나눌 뿐이다.
"아, 맞다~ 브리, 그거 알아? 내가 진짜 재밌는 얘기를 하나 들었거든?" "재밌는 거? 뭔데?" "저~기 어느 나라에 우리랑 비슷한 약소 순혈 가문이 있는데, 유일하게 대를 이을 장자가 지병으로 죽어서 가문의 맥이 끊기기 직전까지 갔었다더라구. 여식도 있긴 한데 걔도 오늘내일 했나봐~ 그래서 그 가문에선 여기까진가보다 하고 가문을 포기하려고 했는데, 어떤 순혈 마법사가 나서서 그 가문의 맥을 이어주겠다고 했다는거야~" "뭐야 그게. 그런게 가능해?" "방법이야 없지는 않지? 듣자하니 이번엔 그 마법사가 그 가문의 데릴사위로 들어가는 걸로 했다던데? 어디서 구했는지 몰라도 여식의 병을 낫게 할 특효약까지 구해왔으니 가문 입장에서 거절할 이유가 없지~ 그런데 참~" "왜, 그거 말고 뭐가 또 있어?" "있지~ 그게 말야, 그 여식이랑 그 마법사의 나이 차이가 무려-"
쾅!
둘이 술잔을 기울이며 노닥이고 있던 중, 그 때까지 가만히 있던 파이몬이 돌연 술상을 주먹으로 내리쳐 소음을 일으켰다. 마치 헬리아의 말을 끊으려는 것처럼. 그 의도를 읽은 듯 모두가 말을 멈추고 행동을 멈춘 채 파이몬을 보았다. 조금 전까지 짓고 있던, 기가 꺾인 표정 대신 은근한 분노를 드러내는 파이몬을 보고 곧 헬리아가 시니컬한 웃음과 함께 말했다.
"어머, 파이, 그렇게 발끈하면 애써 이름을 감춘 보람이 없잖아. 아, 혹시 감춰서 화난거야? 오. 난 네가 열두살짜리 님펫(Nymphet)을 들인게 그렇게 자랑스러울 줄은 몰랐는데?" "뭐야. 파이 얘기였어 그거? 아니 그보다 뭐? 님펫? 몇살?" "...하, 누가 말려. 저 성질머리..."
꽤나 충격적인 얘기에 블리스는 대놓고 놀랐지만 저만치서 듣고 있던 델피니는 이미 알고 있던 얘기인 듯 미간만 찌푸렸다. 이번에도 화두의 중심이 된 파이몬은 좀더 선명히 화를 드러내며 낮게 으르렁거렸지만, 이 파문을 일으킨 헬리아는 되려 소리높여 웃으며 그를 조롱했다.
"헬리아, 너...!" "아하하하! 왜, 왜 그러는 건데? 난 감춰주려고 했는데 파이가 그렇게 반응하니까 감춰주기 싫어지잖아. 자초한거야. 듣기 싫어도 꾹 참았으면 그대로 지나갔을텐데." "됐고. 니가 그걸 어떻게 아는거야. 분명 어머니 밖에 모르실텐데." "후후. 알다시피 내가 발이 좀 넓잖아~ 단골 손님 중에 하나가 마침! 그 나라에서 온 사람이었거든. 파이는 몰라도 '스피델리' 라는 이름은 아니까, 성이 같은 나한테도 얘기가 들어온거지. 아, 멍청한 파이몬. 알려지는게 싫었으면 적어도 성은 가렸어야지~ 우흐, 흐흐, 아하하하!" "이.... XX!!!"
자신의 일을 갖고 자지러지게 웃는 소리가 듣기 싫었는지, 파이몬은 끝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식당을 나갔다. 제법 무게가 있는 문을 쿵! 울릴 정도로 닫고 나가는 걸 보며 남매들은 각자 웃고, 고개를 젓고,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파이몬이 나간 뒤 제자리로 돌아온 델피니를 향해, 헬리아가 웃으며 물었다.
"그 가문 여식의 특효약 만든 거, 너지? 델피." "...알면서 뭘 물어봐..." "아니~ 뭔 수를 써도 안 낫던 병을 고치는 약을 만들었다니까~ 대단해서 그렇지?" "어, 그러게. 뭘 어떻게 한 거냐?" "......리체랑, 비슷했으니까... 그래서 가능했어..." "흐음, 그렇구나." "뭔 소리야. 니들만 이해하지 말고 설명 좀 해봐 이것들아!"
대화 중간에 끼어든 블리스가 성을 냈지만 남은 둘은 입이 붙기라도 한 듯 더이상 말하지 않았다. 저만 따돌리는 상황에 성이 난 블리스에게서 다시 쌍소리가 나오려 하자, 헬리아가 근처에 있던 과일조각 몇개를 그의 입에 쑤셔넣어 말을 막았다. 그런 다음 태연히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우리 꼬꼬마 리체도 애인이 생겼으니 곧 그게 오겠네. 잘 견딜 수 있으려나?" "저번에... 약 보냈어. 그러니까, 괜찮아." "그럼 다행이고~ 아, 델피는 아직 모르지, 그거? 엄청 아프다구~ 누가 심장을 쥐고 이렇게 비트는 것 같이 아픈데-" "아 아 아아아! 아파! 아픈거 알았으니까 그만해!" "어머, 미안. 살짝 예시만 보여준다는게~"
헬리아가 설명과 함께 정말로 델피니의 왼쪽 가슴을 비틀었기 때문에 아픈 비명이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잘 다듬어진 손톱이 파고들었던 옷 위를 문지르며 궁시렁대는 델피니를 보면서 잠시 키득댄 헬리아는 그제서야 쑤셔넣었던 과일조각을 다 먹은 블리스를 발견하고 말했다.
"자! 아직 술 남았으니까 한잔씩 더 하자~ 브리, 거기서 안주만 축내지 말고 잔 들어~ 아직 밤은 길다구~" "이 망할! 내가 축냈냐 니가 먹였지! 이 화상아! 오늘이야말로 너랑 나 둘 중에 하나는 죽을 때까지 마실 줄 알아!" "오! 나야 환영이지! 델피, 저기 창고 가서 몇병 더 꺼내와. 오늘이야말로 결판을 내보자구?" "...에휴... 밑 빠진 술독들 같으니..."
그렇게 남매간의 술자리는 최초의 목적을 잃고 파탄 직전까지 간 끝에, 날이 밝을 쯤 블리스와 헬리아가 동시에 쓰러지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파이몬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으며 뒷정리는 그 때까지 조용히 자작하던 델피니의 몫이었다고 한다.
너는 신나게 복도를 누볐다. 복도를 뛰는 건 버릇없는 짓이라고들 하지만 재밌는 일이 있는 걸 어쩌겠나. 문카프는 막대기처럼 쭉 뻗은 토실토실한 몸을 좌우로 흔들며 열심히 네 뒤를 쫓았다. 그 광경이 어미 닭을 쫓는 병아리 같았지만, 그 크기가 달랐다. 너는 여타 1학년 학생과 비등할 정도로 아담했고, 문카프는 너보다는 하나정도가 작았기 때문이다. 그런 두 존재로 인해 원내는 당연히 소란스러워진다. 문카프는 야행성이고, 수줍음이 많으며, 보름달이 뜨는 날 모습을 드러낸다 알려져 있는데 이렇게 활기차게 달릴 줄 누가 알았겠는가. 소수의 인원은 문카프가 작은 줄 알았지만 제법 컸기에 놀랐던 것도 있으리라.
"야!!! 이누리!!! 멈춰!" "그럴 재간이 있으시다면 어디 한번 멈춰보시든지요." "너 진짜 그럴..악!"
당연히 너를 제지하려 했던 사람도 있다. 한서다. 소란이 있다는 소리에 너를 막아세우려 했지만 그는 문카프의 폭신한 몸에 맞고 쓰러졌다. 방해물을 흘끔 돌아본 너는 메롱, 하고 혀를 쭉 내밀더니 손을 들어 입가를 가리며 쿡쿡 웃었다. 그리고 다시 질주를 시작했고, 너를 막을 사람은 없어보였다.
"안녕-! 이노리도 안녕이에요?"
단 한사람을 제외하면 그렇다는 소리였다. 너를 누구보다 잘 다루는 원내의 존재 중에는 택영이 있는데, 칭찬 세례를 받다보면 어느새 쳤던 사고도 말끔하게 정리가 되는 편이었다. 누군가의 염원이 무색하게도 너는 택영의 행동을 인사로 받아들였고, 점점 속도를 줄였다. 당연하게도 안기 위해서다. 이대로 안아버리면 넘어질게 뻔했으니 너는 다다닥 달리던 발걸음을 천천히 늦추더니, 어느 지점에서 노련하게 폴짝 뛰더니 나무에 매달리는 매미처럼 착 그를 끌어안으려 했다. 아이처럼 꺄르륵 웃은 네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금지된 숲 근처에서 놀고 있는데 친해졌어요? 문카프야- 인사해!"
문카프는 몸을 뒤뚱뒤뚱 움직여 택영의 근처로 다가온다. 뾰로롭 소리를 내며 폴짝폴짝 뛰는것이다. 너는 당연히 이 상황이 재밌다는듯 웃었다.
무엇이 분한것인지는 전혀 감을 잡지 못했다. 자신에게 크루시오를 더 맞지 못한것인지 아니면 더 많이 쓰는 모습을 보지 못해서인지 아니면 다른 탈이 와서 그 녀석을 데려갔기 때문인지. 레오는 감을 못잡겠단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하곤 뭐가 됐든 잘 된것 같으니 됐나- 라는 속 편한 생각으로 일관했다. 뭐, 좋은게 좋은거니까. 저렇게 밝은 목소리도 낼 줄 알았구나. 저렇게 기쁜 표정도 지을 줄 알았어. 그럼 지금 나는 어떻지.
" 특별히 챙겨주는거라니까 감사한 마음으로 챙겨먹어야겠네. "
딱히 좋아하는 음식도 아니고 그렇다고 좋아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냥 있으면 먹고 아니면 말고, 굳이 찾아가서 먹지는 않는 그런것. 레오는 별 생각없이 받아 입으로 가져갔다. 생각보다 달콤한 것이 의외로 괜찮았을지도. 레오는 뭔가 말하려던것도 도넛을 먹는 것에 입이 막혀 말하지 못하고 잠시간 도넛만 씹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책에서도 도넛이 나올 정도로 이걸 좋아한다고 했었지. 맞아. 책의 내용들.
" 물어볼 것도 있고, 그냥 얘기하고 싶은 것도 있고.. 아, 하나만 더. "
레오는 자연스럽게 하나를 더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책의 내용을 읽고 나름대로 추리라면 추리한 것은 매구가 일부러 불을 지르고 구성원을 몰살한 후에 버니를 만나 탈을 주고 자신의 휘하로 들였다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이 운명처럼 기가막힌 타이밍을 설명할 길이없다. 혹시 모르지, 정말로 운명처럼 기가막힌 우연의 일치일지도. 두 번째는 매구가 탈옥시킨 것인지 아니면 책의 내용대로 특별사면이 이루어진것인지. 둘 중 하나는 거짓을 말하고 있으니까.
어쩌면 둘 다 진실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버니가 이 모든것을 알고있고 레오의 추리대로 매구가 불을 지르고 구성원을 몰살시킨뒤 특별사면을 이루어냈다면 어떤 의미에선 매구가 버니를 탈옥시킨게 맞는 셈이지. 하지만 그럴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책의 내용대로라면 버니는 적어도 누군가에게 '복수'를 이루고 싶다고 했고 그 대상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책에서 읽은 내용과 자신이 아는 것을 토대로라면 대상을 좁힐 수는 있다. 복수라면 자신에게 이루어진 나쁜 일의 원을 찾아 똑같이 보복한다는 의미인데 그녀에게 일어난 나쁜 일이라면 구성원의 몰살과 아즈카반에 끌려간 일 정도다.
우선 전자. 구성원을 몰살시킨 사람. 누구인지 찾을 순 없지만 의심가는 사람은 있다. 자신이 아는 내용이 정답일 경우, 범인은 매구가 된다. 그걸 믿어줄지 말지는 모르겠지만. 다음은 후자. 버니가 아즈카반에 끌려가게 된 이유. 이건 순전히 네 잘못이잖아. 레오는 순간 머리가 지끈 아파와서 윽, 하고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 그냥 누구랑 같이 있고 싶은 기분인데, 학교 사람들하고 같이 있을 수는 없거든. 지금은 별로 같이 있고 싶지도 않고.. 이거 맛있네. "
레오는 도넛을 하나 더 집었다. 적당히 입에 물고 우물거리며 가만히 사색에 잠겼다. 크루시오를 썼을 때 분명 자신의 오랜 라이벌은 그렇게 말했다. 이것에 대해 해명해야 할 것이라고. 경황이 없어 그냥 넘어갔지만 당장 얼굴보기 껄끄러운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모든 학생들이 그 교수를 두둔하고 나섰을때 분노하고 화를내고 증오심에 휩싸여 말을 들을 필요도 없다며 주먹을 꽂은 것도 자신이고 먼저 자리를 뜬 것도 자신이다. 역시 다른 사람들을 바로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그 교수는 탈이었다. 탈중 하나였다. 레오가 그 교수를 증오하고, 미워하고 그 교수에 대해 분노하며 믿지 못하는 것은 그 녀석이 탈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레오는? 레오는 탈들 중 하나와 밀회를 가지고 있고 그녀의 숨겨진 패가 되어 교육을 받고있으며 일이 끝난 다음 다른 친구들이 아닌 탈을 찾아와 심경을 토로하며 시간을 보내려고 하고있다. 결국 탈을 공격한것도 버니의 교육과 지시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 그게 아니었다면 평소처럼 굴렀을지도 모르지.
극심한 인지부조화가 찾아왔다.
극심한 불쾌감이 찾아왔다. 그에 따른 방어기제는 자기합리화였는데 레오는 스스로를 방어하고 다음에 또 탈들이 찾아오면 제대로 스스로를 지키고 공격하기 위해서, 그리고 저주에 대한 방어법을 찾기 위해서 버니와 만나 배울 수 밖에 없었다고 스스로에게 변호했지만 그렇다면 백혜향 교수또한 그의 주장에 따르면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는 변호가 가능했다. 아니야, 그건 거짓말이야. 그걸 어떻게 믿어. 하지만 그런다고해서 남들이 내 말을 믿어줄까? 아, 또 불쾌감이 찾아온다. 인지부조화에 따른 불쾌감과 죄악감이 몸을 덮치면 자기합리화라는 방어기제가 작동해서 잠깐 기분이 나아졌다가 그 자기합리화에서 또 극심한 인지부조화가 찾아온다. 그러면 다시 자기합리화를 거쳐, 또 다시 인지부조화로. 끊어지지 않은 연쇄의 굴레처럼 불쾌감이, 죄악감이, 혐오감이 목을 졸라온다.
" 잠깐 여기 앉아봐. "
레오는 자신이 앉아있던 넓고 평평한 바위를 톡톡 쳤다. 아무래도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까. 덤으로 레오는 다른 사람과 맞닿아 있는 것을 좋아했다. 그게 자신의 라이벌이던, 남들보다 체온이 낮은 다른 기숙사의 친구던, 처음 만난 자신에게 친절하다고 말해준 친구이던 아니면 그것이 설사 자신을 죽이려 들었지만 지금은 선배님 노릇을 하고있는 탈이던간에. 레오는 버니가 순순히 앉아준다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허벅지를 베고 누울 생각이었다. 덤으로, 갑자기 하늘이 너무 낮아져 숨쉬기가 힘들었기에 슬며시 손을 잡아 자기 눈을 가리려 들었을것이다.
지난번에 배웠던 문카프의 습성을 다시 떠올려보자. 문카프는 수줍음이 아주 많아 보름이 아닌 날에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동물이다, 라는 내용이 첫줄에서부터 커다랗게 써져 있었는데 그렇다면 지금 저기서 쪼르르 달려오는 동물은 대체 뭔지 모르겠다. 이노리가 온갖 동물들과 친하게 지낸다는 사실 정도는 그도 이노리를 보아온 시간이 있으니 알고 있었지만, 설마하니 그 친화력이 겁 많다는 문카프를 대낮에 학원 안에서 뛰어다니게 할 정도인지는 몰랐다. 안녕이에요?라는 대답이 돌아오자 그는 헛웃음을 지었다. 영혼은 조금 빠져 있었지만 싸늘하지는 않은 표정이다. 황당하면서도 해학적인 상황에 넋이 빠져버린 것이다. 역시나 기대가 무색하게 의미 전달이 잘못되었지만 이노리도 문카프도 멈추었으니 상심하지 말자, 의도했던 결과는 얻어냈으니 말이다.
"예에, 안녕하세요. 오늘도 재미집니꺼."
이노리가 폴짝 뛰며 팔을 뻗자 그는 반사적으로 상체를 조금 숙여주었다. 이런 일이 한 번은 아니었을 테니 저도 모르게 몸이 먼저 반응한 것이다. 안 그러려 노력은 한다지만 그가 저보다도 조그맣고 아이처럼 천진한 이노리를 알게 모르게 귀엽게 여기고 있어 그런 탓도 있으리라. 그대로 가만히 목석처럼 서 있기도 무엇하여 그는 손을 들어 이노리의 어깨 부근을 톡톡 두드리는 것으로 화답을 했다. 녹색빛 눈이 한쪽을 넌지시 향하며─눈이 마주치자 문카프의 눈망울이 한층 더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말문을 열었다가, "야는 어떻게……." 질문을 던지기도 돌아온 답에 그대로 끊어졌다. 문카프랑 친해진 거, 그래 보이긴 했다. 너무도 명료한 대답에 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눈동자만 조용히 굴린다.
"진짜 만져도 되는교. 그, 야가 싫어할 수도 있지 않심꺼……."
문카프가 울음소리를 내며 주변을 폴짝폴짝 뛰어다녔지만 그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이리저리 눈을 돌릴 뿐이다. 언뜻 불편해 피하는 듯 보였지만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동물을 꽤 좋아하는 편이었다. 문카프는 뾰로롭거리는 울음소리도 곱고, 동글동글한 머리도 귀엽지만…… 문제는 택영이 동물에게조차 낯을 가리는 극도의 소심형 인간이었던 것이다. 제 근처를 뛰노는 네발짐승의 깜찍한 모습에 그는 슬쩍 이노리의 눈치를 봤다. 신비한 동물 수업 때는 만나는 동물이야 수업 대상으로 보였기에 스스럼 없이 대할 수 있었는데, 이노리가 데려온 친구로 바라보자니 갑자기 부담감이 생긴 것이다. 흡사 새학기 때 처음 보는 친구를 소개받자 잔뜩 어색해하며 기존의 친구 옆에만 붙어 어색한 시간을 흘려보내려는 내성적인 중학생 같은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