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또한 그런 관계가 몇 있다. 그러니까 소중하다고 생각하고, 또 그에게도 그런 사람이 있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훈훈한 분위기로 마무리......되었다면 좋겠지만. 그 이후 주변 사람들의 시선 따윈 아랑 곳 하지 않는 요란한 아기 울음 소리를 내는 그 때문에 분위기가 죄다 망쳤다. 그대로 진지한 모습으로 가만히 있었으면 좀 평가가 올랐을텐데 말이야.
"그래. 똑똑히 말하건데 나는 연인이 있어. 그러니 내가 사실 남자던 여자던, 너와는 사귈 수 없어."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외톨이라서 방에서 홀로 훌쩍거리거나 점심 시간에 울적하게 구석에서 남 눈치를 보며 밥을 먹던 시절에서......장족의 발전이다. 이딴걸 장족의 발전이라고 생각하는 스스로가 어쩐지 한심하게 느껴지는 기분도 없진 않지만, 좋은게 좋은 것이라고 치자.
"흐음......"
그리고 그 뒤에 살짝 악의가 느껴질 정도로 남자 친구라고 강조하는 이야기를 조용히 듣던 나는...
딸칵
하고 장식용 로베인의 영광의 환희를 들었다.
"내. 연인은. 여자. 입니다."
한번 더 남자친구라고 말했다간 지난번처럼 이걸로 네 머리통을 부숴버릴 것이라는 온화한 뉘앙스를 담아, 나는 활짝 웃으면서 딱딱 끊어 한마디씩 정중하게 전하는 것이다.
라포 형성이라고 환자와 친밀감과 공감대 형성을 해서 경계심을 허물고 자연스러운 대화를 이끌라고 하면서도 역전이를 통해 환자에게 과몰입해서 의사와 환자 관계의 선을 넘는 짓은 절대로 하지 말라고 함. 사실 말만 들으면 '당연한거 아님?' 이라고 하는데, 정신치료과나 작업치료 같이 밀접하게 대화해야하는 계통은 실제론 그게 꽤 어렵데.
조금 특이하다는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그럴 수도 있지. 라고 생각했다. 사람마다 다른 것이려나... 환경 탓일 수도 있지만, 너무 깊게 들어간게 아닐까 하는 고민도 있었다.
다림의 말에 희미하게 웃더니 "흉내는 내주지 않는 거야?" 라며 아쉬움을 표했을까. 농담 때문인진 몰라도 삐진게 조금 풀린 느낌이었으려나. 그러다가 파는게 아니라는 말에
" ...으음. 아쉽네. 그거 맛있었는데. "
많이 아쉬워하는 기색이 느껴졌겠지. 그도 그럴게 파는 거라면 대량으로 들여놓고 먹으려고 했는데 직접 만든 거라면 먹고싶을 때마다 주입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으니... 물론 미리 만들어놓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기에는 조금 귀찮다. 그러다가 농담처럼 말하는 것에 "그거 있으면 엄청 대용량으로 만들어먹을 수 있을지도.." 라면서 흥미를 표했을까?
" 한정판 파이, 먹어볼래? "
사과 파이라던가, 이런저런 파이를 팔고있는 모습을 보며 다림에게 한 조각을 들어 권유해본다. 시식해볼 수 있도록 파이 하나를 조각조각 잘라서 전시해놓은 느낌이었으려나...
분명 멋진 남자친구씨겠지. 잘생기고, 자상하고, 매력만점에, 강한! 아마 나 따위는 범접할 수 없는! 나는 진화양의 남자친구 자랑을 기다리기로 했다. 타인의 남자친구 자랑은 썩 달가운 것은 아니었지만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들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귀를 열고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지만, 그녀로부터 들려온 대답은
연인은, 여자라는 것이었다.
그런가. 그랬던 것인가. 진화양은, 그렇구나. 평범, 아니 요즘시대에 평범이고 뭐고. 그러니까, 여자친구라는거지. 여X여.. 그렇다면 분명, 멋진 사람이겠지. 그래 여자던 남자던 중요하지 않다. 분명히 굉장히 멋지고, 그러니까.. 학년의 왕자님(여성)으로 불리는 그런 사람이 아닐까? 왜 가끔 있지 않은가. 여성들 사이에서 왕자님이라고 불리우는 그런 쿨계열의, 누님같은?
그녀가 집어든 장식용 방패 - 아마 이전에도 나를 잔뜩 내려친 그 - 를 보고 본능의 단계에서 벌벌 떨면서 나는 손에 든 커피 한잔을 마셔, 버렸다.
"으앗써 웃퉤퉤퉤투텥텥퉽!!!!"
나는 한 모금 입에 담자마자 마치 '화둔 호화구의 술!' 이라는 어느 애니메이션의 스킬을 쓰듯이 입 밖으로 푸우우우우하고 커피를 부채꼴로 뿜어버렸다.
"으.. 이건 진짜 못 마시겠다.. 그래서, 성함이 어떻게 되는데? 그 분은."
이름이라도 알아둬야지. 찾아가서 '네가 진화양의 그렇고 그런 사람이냐! 결투를 신청하겠다!' 이럴 마음은 추호도 없다. 단지 누구인지 알아두고 싶었을 뿐이다. 이름이라도. 그리고 학교도. 그리고 찾아가서.. 아니, 그런 짓은 하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