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집안은 기본적으로 서로에게 간섭을 하지 않는다. 관심이 없는 건 아니지만 무슨 일이 나도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기는게 일상이다. 그러니 그녀가 그동안의 사건과 근황이 담긴 편지를 보내도 몸조심하라는 내용과 먹고싶다던 간식거리를 보내주는게 전부였는데. 뒤늦게 소식을 들은 남매 중 한명이 극성을 부려 찾아왔었다.
"그래서 누군데." "알아서 뭐하게."
라온, 당과점의 카페테리아에서 두 남녀가 마주보고 앉아 신경전을 부린다. 여성은 두말 할 것도 없이 그녀고 남성은 그녀보다 나이가 훌쩍 있어보이는며 체구도 꽤나 듬직한, 딱봐도 성인이구나 싶은 사람이다. 그녀와 닮은 금안을 했지만 고운 은발이 아닌 초콜릿을 닮은 갈색머리를 한 남성은 자신을 쎄하게 째려보는 그녀의 시선을 마주하며 의미없는 문답을 이어가고 있었다.
"제대로 알려주지도 않는 사람을 가족으로서 인정할 거라고 생각해? 뭐가 켕기니까 그런거 아냐, 어?" "알아서 어쩔건데 그러니까. 마마도 파파도 아무 말 안 하는데 왜 파이만 그래?" "아무도 신경을 안 쓰니까 나라도 신경쓸라고 그런다. 너 어릴 때 생각하면-" "나 이제 열일곱이야. 그 때랑 똑같이 어린애 아니라고. 계속 그 때 얘기 할거면 내 얼굴 다신 보기 싫은 줄 알겠어."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엄포를 놓자 서늘한 분위기가 둘 사이에 흐른다. 그 말에 입을 다문 남성이 더이상 말을 못 하자 그녀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쓸데없는 짓 말고 조용히 돌아가.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는 그녀를 남성은 잡으려는 듯 하다 만다. 그 일련의 광경은 대화를 듣지 못해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이들에게 입방아 찧기 좋은 상황이었지 않을까. 이미 주변에서 수군수군대는 학생들도 있었고.
"...칫."
주변 분위기를 보고 영 찜찜한 기분이 든 그녀는 그곳을 벗어나 어디든 가려고 걸음을 서두르려 했다. 갈 곳을 딱히 정하진 않은 채 그냥 거기서 빨리 멀어지는게 목적이었다.
또 다시 당신이 고개를 저으면서 뒤로 물러난다. 한결같은 그 반응을 보며 묘한 장난기가 들었는지, 고개가 살랑살랑 저어지는 그 틈을 타 얼른 당신의 머리 위에 제 손을 올려놓았다. 자신이 손을 움직여 쓰다듬지 않아도 알아서 쓰다듬는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며 키득거리고 있었다.
"어머나. 굳이 그렇게 해야 하는 게 아닌데도~ 그래도 날 위해서 해 주겠다는 뜻이지? 그렇게 말해줘서 기뻐, 우리 여보야."
여보자기 하는 이 호칭이 이렇게나 자연스러우면서도 낯설지 않은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허나, 그와 동시에 이번이 처음만은 아닐 것이다. 앞으로도 쭉.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공회전하듯 겉돌기만 하더라도, 지금까지와는 다른 모습으로. 좀 더 부드럽고 유해졌을지도 모를 그 미소를 내비치며 어깨를 으쓱였다. 다정다감한 말투. 그렇지 않은 행동. 어울리지 않는 미소. 모든 것이 극과 극으로 다가오는 지금이 좋았다. 그렇다고 예전이 싫거나 한 건 아니었지만.. 애석하게도 주양은 한번 고백이 이어졌다고 예전에 느꼈던 기분들을 싹 잊을 만큼 머릿속이 꽃밭은 아니었다. 당장 아까 전까지만 해도, 자신은 정말 답답했고, 애가 탔으니까. 자신이 누군가에게 그토록 간절하게 무언가를 바래본 적은 또 처음이었기에, 그때 느낀 답답함을 느껴보라는 것 마냥 당신에게 더더욱 몸을 밀착시킬 뿐이었다. 결과적으로 보복은 절대 아닌. 결국 서로에게 좋을 뿐인 상황이 연출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면 못 써. 너무 과하게 깨물었다가 그 사람이 다시는 나랑 내기를 못 할 상태가 되면 어쩌려고 그래? ... 그래도 역시 그 편도 나쁘지는 않은데? 여보가 할 수 있는 만큼. 그 사람을 힘껏 몰아붙여봐?"
그렇다면 나는 그에 걸맞는 상을 다시 너에게 줄테니까. 진지하게 혼내는 듯 하면서도 자연스럽게 다시 비틀린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평소와 다를 것 없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단 하나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렇다면 역시 그것은 지금의 자신은 당신과 함께, 평행선에서 손을 잡고 놓아줄 수 없다는 닷 그 거리를 조금 더 가까이 하면서 나아가고 있다는 점이겠지. 그것 외에는, 자신의 모습은 그저 평소와 별 차이가 없었다는 게 주양의 생각이었다.
가까워진 거리 만큼이나, 귀와 입의 거리도 가까워졌기에.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하며 당신의 귓가에 나직하게 속삭이고는 귓볼을 살짝 깨물며 짓궂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근데 지금은 나한테 물려버렸네?" 하는 말과. 그렇게 이야기하며 비열한 듯 얄미운 표정을 내걸어보이는 것은 덤이었다.
"으응, 그렇게 빤히 보고 있으면 부끄럽단 말이야~ 그리고 정말로 나한테 족쇄를 채울 생각인거야, 여보~? 그렇다면 나는 환영이지. 나중에 여보야의 가문에 놀러가게 될 날이 더더욱 기다려지는걸?"
괜히 부끄러운 척 하며 몸을 이리저리 비비 꼬던 주양은 이윽고 경박스러운 웃음을 터트렸다. 족쇄라는 것은 차본젓도 없고. 그리고 차겠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으며, 찰 생각도 없기는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당신의 눈빛에서 스쳐지나간 소유욕을 보지 못했을때의 일이다. 그것을 봐버린 이상. 주양 역시 더 과감하게 굴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자신을 가지고 싶다는 그 마음이. 자신에게 애매함이 아니라 확신으로 다가왔으니까. 짧은 키스는 끝이 났으나, 이대로 거리를 떼버리기는 아쉬웠는지 주양은 한참동안 물러나지 않은 채 있었다. 생각해본다면 자신이 언제부터 주변에 대해 신경썼나 싶었다. 이래놓고 또 나중에 눈치를 잔뜩 보게 될 것이 분명했지만, 적어도 지금만큼은 그 무엇도 신경쓰지 않은 채, 오늘 당신과의 시간을 완벽하게 끝마무리짓고 싶었으니까. 이대로 또 떨어지는 것은, 주양에게 아쉬움이라는 묘하면서도 큰 감정 기복을 가져다주었다.
"있잖아, 여보~? 나는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내가 엉성하게 군다면, 언제든 나를 집어삼켜주기야. 그리고, 너가 원하는 대로. 마음껏 휘두르는거지. 대신 그 반대의 상황이 오더라도 너무 날 원망하지는 말고~ 어때? 내기 하나 할래?"
내가 엉성하게 굴지 않는다는 데, 너를 걸게. 문맥상으로 참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를 꺼내놓고서 주양은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러니까, 결국 이것 역시도 주양의 소유욕이 어긋난 채 반영된 이야기일 뿐이었다. 자신이 엉성하게 굴지 않고, 제대로 목줄을 쥔 채 길들일수만 있다면. 당신은 완벽하게 자신의 것이 될 테니까. 자신이 생각한것과 반대의 상황으로 흘러간다고 해도, 결국 누구에게나 손해따윈 없을 내기였다.
"좋아~ 믿고 있을게, 우리 여보? 내가 마음에 안 든다고. 여길 콱 물어버리거나 하면 안 된다~ 알지?"
만약 그랬다간. 목줄에 입마개까지 씌워버릴거야. 별 생각 없이 던졌던 그 이야기가 문득 머릿속에서 묘하게 현실적으로,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만 같아서. 저도 모르게 조금 위험한 미소를 지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잠시 동안은 아무 소리도 듣지 않고 싶었기 때문에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바로 들리지 않았다. 조금만 더 신경질이 심했다면 귀를 막고 마구잡이로 달려서 그 자리를 벗어나 아예 듣지 못 했겠지. 지금은 뛰지도 않고 그저 빠른 걸음으로 가고 있었기 때문에 윤의 목소리를 뒤늦게나마 들을 수 있었다.
금방이라도 뛸 듯하던 걸음을 늦추며 뒤를 돌아보자 반가운 얼굴이 보인다. 뛰었는지 숨을 몰아쉬며 무슨 일이냐고 묻는 윤을 미묘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그녀. 뭐라고할지 고민하듯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대답을 미루다가, 손으로 얼굴을 한번 쓸어내린다. 그렇게 표정을 정리하고서 싱긋 웃으며 말했다.
"무슨 일이긴요. 아무 일도 없어요."
윤이 그 말을 믿든 아니든 상관없는 것처럼 정말 아무것도 아니란 듯 보이려 했다. 그래, 저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라고 스스로에게 말하면서. 오늘도 어김없이 그와 함께인 백설에게도 안녕, 하고 인사하곤 다시 윤을 본다.
"그러는 선배야말로 뭐하고 있었어요? 어디 다녀오는 길?"
그녀는 그가 왔을 방향을 돌아보는 시늉을 하며 어디 다녀오느냐고 되물었다. 연인...이기는 하나 서로 일정을 꿰고 있는게 아니니 이렇게 마주치면 뭐했는지 궁금할 법도 하다. 그런 척을 하며 아주 잠깐 당과점 쪽을 힐끔 보고, 언제 그랬냐는 듯 윤을 향해 생글생글 웃는다.
뒤로 물러나면서 고개를 좌우로 절레절레 흔드는 순간 머리 위에 올려지는 손에 단태는 눈썹 한쪽을 치켜올렸다. 꼭 머리를 쓰다듬는 것 같아서 기분이 미묘해졌지만 머리 위에 올라온 주양의 손목을 잡고 끌어내려서 머리 대신 자신의 뺨을 쓰다듬도록 유도하며 "과하게 물었는데 그정도로 다시는 내기를 하지 않는다면 그것밖에 안되는 사람일 것 같은데. 최대한 살살 아프지 않게 물어보도록 해보기는 할게." 방금 들렸던 말에는 대답을 덧붙히지 않은 채로, 단태는 그 뒷말에만 대답하면서 주양의 손바닥 안쪽에 입을 맞춘다.
일부러 이러는건가싶을 정도로 거리가 가까웠다. 떨어지거나 하지 않고 밀착해오는 행동은 단태에게는 그냥 넘길만큼 사소한 일은 아니었기 때문에 샐쭉- 가늘어진 암적색 눈으로 주양을 바라보며 한번 더 입을 맞추고 손을 놓아줬을 것이다. 일부러 이러는 건가, 하는 단태의 생각은 주양의 행동에 의해 확신으로 바뀌었다. 분명하게 일부러 이러는 거라고. 처음 경험해보는 자극이 낯설지만, 하! 하고 짤막하게 건조한 웃음이 터졌다. 가스나가- 사람이 돌아버리는 걸 보고 싶은건가. 분명한 도발이었지만 단태는 어이없다는 듯이 다시 건조하게 입가를 당기며 떨어지지 않은 주양의 턱을 감싸쥐었다. "방금 한 도발, 제법 귀여운데 어디까지 도발하면 내가 돌아버릴지 알고 싶은거야, 달링?" 분명 가까운 거리였지만 단태는 끝까지 입을 맞추거나, 받은대로 돌려주는 행동을 해보이지 않았다. 나름대로 인내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족쇄 이야기는 네가 먼저 꺼냈잖아. 도망이라도 가려고 한다면 채울지도 모르지만- 뭐, 잘어울릴 것 같아. 발찌도, 족쇄도."
물러나지 않는 주양의 모습에 단태또한 거리를 떼거나 하지 않았다. 하고 싶은 게 있다면 더 해보라는 것처럼. 네 진심을 알고 싶고, 네가 어디까지 원할지 궁금하고 어디까지 자신에게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했고 보고 싶었다. 소유욕과 집착을 어디까지 받아줄 수 있는지도.
"그 내기는 애초에 성립이 안될 것 같지만 어차피 그 누구도 손해보는 내기는 아니니까 괜찮은 것 같네. 좋아. 대신 내기의 기간은 한명이 죽는 순간까지로 할까."
암적색 눈동자를 깜빡이면서 단태는 낄낄 웃음을 터트리고 가까워진 거리를 더 좁힐 심산인지 이제는 아예 주양의 허리에 손을 대고 있다가 끌어당기면서 귀를 물었던 것을 되돌려주려는 양, 옆목에 얼굴을 대고 살갑게 부비적거렸다. "입마개까지 씌워버리면 나랑 입맞추는 건 포기한다는 뜻인가." 하고 능청스럽게 중얼거리면서 부비적거리던 걸 멈추고 얼굴을 떼어내며 주양과 거리를 벌리려했다. 여전히 주양의 손은 잡고 있는 상태였다.
별이 잘 보이는 위치에 자리를 잡고 하늘을 바라본다. 때마침 걸터앉기 좋은 바위가 보여 그 위에 앉아 준비해온 필기도구들을 하나하나 늘어놓았다. 오늘 택영은 혼자였다. 지난번 문카프 관찰 때 억지로 끌려나온 일의 앙갚음을 하고자 이번만큼은 그의 쪽에서 친구를 끌고 나오려 했지만 맥없이 실패해버렸고, 차선으로 설미라도 데려가고 싶었지만 족제비 씨는 저녁잠 중이었기에 건드릴 엄두도 내지 못했다. 결국 터덜터덜 혼자 걸어나와 지금의 상황이다.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예상보다 분위기가 으스스하지는 않았다. 이번 일에는 기척을 내지 않도록 조심히 행동하지 않아도 되기에 초롱을 챙겨들고 나왔더니, 등으로부터 은은하게 빛이 새어 어두운 밤 시간도 고즈넉하게 느껴질 뿐이다. 바람만 조금 더 시원하게 불었더라면 기분 좋은 운치가 있었을 텐데.
아무튼, 이제는 목적을 완수할 시간이다. 그는 하늘에 뜨고 지는 여러 신호들을 받아 종이면에 묘사해간다. 후덥지근하지만 쉬어가듯 느릿하게 흘러가는 미풍을 따라 잔잔한 곡조가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