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히 상식적인 소리다. 사람간의 관계에는 함부로 넘어서는 안되는 선이란게 있는 법이니까. 나는 그것은 존중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지금 이 상황속에서, 가쉬는 상당히 나의 선을 넘고 있는 기분도 들지만. 그에게 아마....악의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일단 별개의 이야기라고 치자. 응...
"앗, 그래? 연인이 생겼어? 그건 멋진 일이네. 혹시 누군지 물어봐도 괜찮아?"
나는 나와 비슷한 새로운 커플의 탄생에 조금 기뻐하면서 조심스럽게 상대방을 물어보았다. 부모님의 이야기는.....뭐 저렇게 말한 시점에서 평범하지 않은 부모란 것은 짐작이 가지만, 상대가 '약점' 이라고 표현하면서 밝히고 싶지 않아하는 부분에 대해 캐묻는 것은 아니다 싶어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했지만 말이다.
"음. 역시 이야기가 많이 나오니?"
나는 턱을 괴곤 걱정스럽게 얘기했다. 하긴 안나올리가 없지. 그렇게 울적하게 다니면서, 그 때 사건에 휘말린 사람들에게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고개도 들지 못한체 계속 사과하는 모습은 아무리 봐도 괜찮나 걱정될테니까.
"음.....그럼 이렇게 생각해보는게 어때? 은후는 다림이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 혹은 그렇지 않아?"
나는 조금 고민하다가 그렇게 물어보면서도, 어쩐지 초조해보이던 그가 손가락을 물려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는걸 보곤 조금 감탄했다.
“추구하는 폭발물의 목적을 논의해 보자구! ※ 세 번 불지옥 대폭발 물약!(임시) ※은 공포와 파괴적인 이미지를 자아내는 데 특화된 제품이야. 실제 폭발력과는 무관하지만, 폭발력이 강하면 강할 수록 좋지. 이걸 써서 마음에 안 드는 자식의 영업장을 한 줌의 재로 바꿔 버린다거나, 마음에 안 드는 자식을 한 줌의 재로 바꾸어 버린다거나 할 수 있다구. 그것도 절망에 휩싸인 채로 말이지. 게이트 너머의 자식들도, 자기 몸이 불타는 꼴은 보기 싫을 거 아니야?”
이것을 서포터적인 사고방식이라고 해야 할지…….
릴리가 유리잔을 들어올리자, 잔에 차 있는 공기가 둥글게 뭉치며 지나는 상을 왜곡시키는 듯하더니 이윽고 잔에 고인 물로 변했다. 다시 탁자 위에 내려놓자, 이번에는 퐁, 하면서 흰 연기가 작게 피어오르며 물이 기화해 사라졌다.
“내 건 됐고…… 반면에, 당신의 목표는 물리력이야. 내가 지금 도와주려는 게 그거고. 비의념성 재래 폭발물을 갖고, 의념으로 형성할 수 있는 것만큼 강한 충격량을 얻고 싶어하는 거잖아. 알겠어? 로망과 효율은 따로 사는 게 아니야. 다른 조건은 모두 무시하고 효율과 성능만을 추구하는 게 진짜 로망이라구.”
그대로 테이블 위에 놓인 책상에 엎드리며, 손가락 끝으로 탁자에 무언가를 그리다가 진석을 올려다보며 이야기한다.
“소형 수소폭탄 같은 건 어때……?”
참상 하면 둘째가라면 서러울 아토믹 파워의 등장이다.
“충격량 하나는 죽여주잖아. 핵분열 장치 그거, 에너지 드링크 몇 병 마시고 끄적끄적하면 괜찮은 설계가 나올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죽어라고 뛰어왔는데, 결과는 지각이다. 나는 두 무릎에 손을 얹고 허리를 굽힌 채 거칠게 숨을 골랐다. 그래도 먹기 전에 좋은 운동이 되었을지도 모르지. 릴리는 벌써 여유롭게 도착해 나를 기다렸다.
"허억, 초랑, 허억, 그 밑, 단위, 허억, 까진, 허억, 필요 없다, 고...!"
나는 숨을 고르는 와중에도 가슴 속에서 튀어나오는 말을 하나 거르지 않고 그녀에게 쏟아냈다. 저 꼬맹이, 사람 놀리는 재주 하나 만큼은 천재급이라니까? 숨을 고르다 고개를 들자 그녀는 난간 위에서 폴짝 뛰어내려 나에게 다가왔다. 그런가. 아래에선 안 보이니까 난간에 서서 날 찾고 있던 것인가.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 릴리 특유의 우쭐한 표정을 보자 그 마음이 싹 사라진다. 그리고 이어 내가 그녀에게 말했던 '벌칙' 을 상기시켰다.
"..아하하, 내가 그런 말을 했던가~"
말은 안 했지. 다만 가디언 칩으로 연락을 했을 뿐이지. 구두약속은 발뺌하면 그만일지 몰라도, 이미 가디언 칩에 기록은 다 남아있어 그 이상의 반론을 할 수 없었다. 숨을 고르고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보자 평소와는 사뭇 다른 얼굴이었다. 속눈썹은 평소보다 조금 길게 위로 말아 올려져 있었으며 볼터치를 했는지 뺨은 옅은 복숭아와 같은 분홍색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거기에 무엇보다, 오물거리는 그 작은 입술은 핫핑크 색으로 윤기를 띄고 있었다. 메이크업을 했구나. 하고 난 곧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스스로의 치장에는 관심 없는 나지만, 모종의 이유로 여성이 화장하는 장면은 자주 보았던 나였기에 그 변화를 눈치챌 수 있었다.
나의 반응을 나 스스로 단어화 할 필요는 없으리라. 그녀의 메이크업을 깨닫는 시간동안, 난 그저 눈을 크게 뜨고 멍하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주위의 소음이 닫힌 채, 스스로의 행위를 깨닫지도, 그 시간을 알지도 못한채 그저, 한동안. 혼자 그 시간에 갇혀서 말이다.
얼마나 지났는진 모르겠지만 그녀는 우쭐한 표정으로 어디에 꿀밤을 놓을까 하고 이야기했다. 평소와 같으면 거기에 가타부타 소란을 벌였을 나지만, 나는 마치 최면이라도 걸린 것 마냥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에게 머리를 내밀었다. 사실, 고개를 숙이고 싶었을 뿐이다. 이제서야 내가 얼마나 바보같은, 얼빠진 표정으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는지 깨달았으니까. 한 대 맞으면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그래, 이것은 벌칙의 꿀밤이 아닌, 정신을 차리고 원래대로 돌아오기 위한 꿀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