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명 더 살릴 수 있으면... 그정도 무리는 감수할만하다고 생각해요. 가디언을 믿어줄 사람이 한명 더 생기는거니까.. "
신뢰는 저희의 힘이나 다음없잖아요, 에릭. 하루는 상냥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어찌보면 욕심이나 다름없었지만, 가디언으로서 하루가 품고 있는 마음일지도 몰랐다. 이것이 그저 자기 만족을 위한 마음일지 아닐지는 모르지만.
" 여기 붕대랑..어.. 식염수랑.. 혈액팩을 가져다 주세요. 일단 눈은 지혈을 하고, 현장에서 수술할 수 있는 팔부터 수술에 들어갈게요. "
새하얗게 변한 하루였지만, 망념을 사용했는지 빛이 반짝이는 눈으로 환자를 살핀 후에 간호사에게 부탁을 하곤 수술 준비를 시작한다. 메스를 한번 더 소독하고 수술할 부위를 닦아낸다. 그렇게 집중을 시작하려고 할 때 갑작스레 들어온 다른 환자의 존재에 당황한 듯 눈이 커진다.
" ..무슨 소리를 하시는거죠. 그 분은 중상이긴 하지만 생명엔 지장이 없으신 분 같으니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이 분은 지금이라도 처리를 안 하면 사망하실 수도 있으니까... " " 닥치고 내 친구부터 살리라고! "
하루는 지친 기색이 역력한 모습으로 고개를 저으며 일단 밖으로 나가달라는 듯 말을 하지만, 환자를 데려온 남자는 거칠게 하루를 밀어붙이려 사며 거친 말을 내뱉고 소리를 치기 시작한다.
" 이분은 먼저 살려야 합니다...! 아직 숨이 붙어있잖아요..! 나가세요..! " " 뭐야? 계집이...! "
조금의 망념도 허투루 소모하고 싶지 않은지, 거칠게 다가오는 남자에게 애써 차분한 목소리로 내보내려 하는 하루였지만, 남자는 그럴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침대에 주저 앉아 울적한 이야기를 중얼거리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나는 다시금 그녀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이 없단걸 눈치 챘다. 평소의 태도를 보면 과거에 울적한 일들이 그럭저럭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 정도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이야기는 쉽게 파고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그녀도 나도 모른척 발을 딛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녀의 옆에 마찬가지로 걸터 앉았다. 딱 붙진 않아도, 적당히 가까운 거리로. 그러면서 천장을 멍하니 올려보곤, 똑같이 중얼 거리듯 얘기하는 것이다.
"과거를 딛고 나아간다는건, 듣기엔 멋지지만 그렇게 쉬운 이야기는 아니더라."
많은 사람들이 '과거는 과거다' 라던가 '얽매이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라' 라던가 이야기 하곤 한다. 그러나 내 입장에서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건 결코 쉽지 않은 이야기다.
"나도 이래선 안된다고 자책하고, 과거를 후회하고, 악몽을 꾸고, 세수하며 거울을 보다 울곤 했어."
지금이라고 뭐, 완벽하게 나아진 것도 아니다만.
"상처란게 혼자서 앓는다고 가라앉는게 아니더라."
나는 거기까지 말하곤, 옆에서 고개를 숙인 그녀를 보며 픽 웃었다.
"그러니 이번 기회에 한번 말해봐. 무슨 내용이더라도 좋으니까. 그럼 조금 편해지거나, 무언가 달라질지도 모르지."
걸터앉은 진화를 잠깐 바라봅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많은 게 학원도 학생들인 걸까요? 과거를 딛고 나아간다는 말과 함께 그것이 쉽지 않다는 진화를 바라보다가 그건 그렇네요. 라고 조용히 수긍합니다. 그게 쉬웠으면 다들 그렇게 하지.. 못하고 미적거리는 자신같은 이가 있을 리가 없잖아요?
"혼자서 앓는다고 그게 낫는 건 아니지만요." 그래도 겉은 멀쩡하니까 된 게 아닐까. 같은 생각을 합니다. 그렇지만 진심이 아닌 적은 없었던가? 그러다가 한번 말해봐라는 말을 듣자
"미안해요 진화 씨..." 조금 고민하는 것 같다 싶다가도.. 말을 하기는 조금 그런 모양입니다. 말을 하고 편해지거나 뭔가 달라질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을 하기엔 그런 모양입니다.
"그래도... 내일 출근하면 괜찮게 대할 거니까요." 무슨 일이 생기지 않는 이상 말이에요? 라고 말하며 미소지으려 합니다.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에릭이 사이에 들어와 무례한 남자를 밀어낸다. 그 남자가 데려온 사람은 한눈에 보아도 팔이 가벼운 골절을 당한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뒤에서 부러진듯한 팔을 부여잡고 있었으니까. 간호사들은 그 와중에도 서둘러 수술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 퉤, 더러운 새끼들. 환자도 가려받는다는거냐. "
에릭이 앞으로 나서자 조금 기세가 죽었던 남자는 그나마 하루가 만만하게 보였던 모양인지, 하루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삿대질을 한다. 하루는 침을 맞고서도 그저 말없이 에릭의 뒤에 서있을 뿐이었다. 남자는 침을 뱉곤 행패를 부리며 나가려했고, 따라온 환자도 서둘러 조용히 따라나서려 했다.
" 잠깐만요.. 이리와봐요.. "
침을 맞은 상태로, 창백한 안색을 한 하루가 애써 그 환자에게는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린다. 망념을 잠시 계산하던 하루는 이정도면 가능하겠다 싶었는지 부러진 팔에 손을 가져가선 빛을 발하게 한다. 고통에 일그러져 있던 환자의 얼굴이 밝아지고, 팔이 제자리로 돌아간 것을 확인한 하루가 숙였던 몸을 일으키며 숨을 뱉어낸다.
" ... 수술용 장갑 좀 가져다 주세요, 수술 시작합니다.. "
지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었지만, 에릭에게 고마웠다는 듯 눈으로 인사를 해보인 하루는 팔이 부러졌던 환자를 내보내곤 수술대러 돌아가려 했다.
" .. 혹시나 또 들어와서 행패를 부리려고 하면 막아주세요. 수술 중엔 정말 집중해야하니까.. "
밖의 일까지 신경써가면서 할 수 있을 실력아 아니라서요. 에릭에게 그렇게 중얼거린 하루는 메스를 집어들었고, 그 손과 눈동자에는 다시 의념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그녀를 한번 보았다가, 나는 천장을 올려봤다. 나도 안다. 과거의 트라우마를 묻는 것이 별로 건전한 행위가 아니라는 것은. 그러나 그녀는 내 동료였고, 나는 단순한 호기심으로 묻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답지 않다고 스스로를 비웃으면서도, 한발 더 내딛는 것이다. 다만. 아마도 내가 간섭하는 것은 여기까지겠지. 만약 한번 더 거절의 의사가 보이면, 나는 물러날 것이다. 그녀에 대한 실망을 품고.
"괜찮게, 라."
나는 그 말을 곱씹듯 한번 중얼 거렸다. 에릭과 나는 그녀의 처연한 태도와, 이 슬픈 분위기에 압도되서, 여태까지 어리광을 받아줬던 것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나는 그녀에게로 시선을 되돌리곤, 확고한 말투로 답하는 것이다.
"미안하지만, 그런건 괜찮다고 하지 않아. 괜찮은 척이라고 하지."
이 다음말은 어쩌면 상당히 신랄할지도 모르지만, 난 말해야겠다.
"그리고 더욱 미안하지만, 다림이는 완벽하게 괜찮은 척을 할만큼 능숙하진 않은 것 같아."
그럭저럭 괜찮은 척은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요 근래처럼 어딘가 불안정한 모습이, 처연한 태도가, 유심히 보고 있는 사람에겐 밀봉된 그 그릇 어딘가에서 한기를 느끼게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내가 답지 않게 기숙사까지 찾아와서 과거를 캐묻는 지금의 상태가, 그녀의 이번 사태로 비롯된 정신적 불안이 크게 눈에 띈다는 증거 아니던가.
"그러니까 여기서 돌아가게 되면, 내일부턴 서로 괜찮은척 연기하면서 일하게 되겠네."
그런걸 원한다면 그리 하겠다. 나는 말을 짧게 마무리 했다. 그녀는 그럴 의도를 품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나를 마치 얼간이처럼 대하고 있다. 여기서 '아하, 그렇구나. 그럼 내일 무사히 잘 출근해.' 라고 넘어갈 수 있을리가 없지 않은가?
"아..아니요.." 친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친하기 때문에 말하기 어렵단 것을 말을 해야하나 말아야 하나. 하고 고민하지만 친한.. 편이라고 생각해서 말을 하기가 어려워요.. 라고 웅얼거리듯 말합니다.
"괜찮은 척..이라뇨. 정말로 괜찮.." 그렇게 말하려 하지만 다음 말을 들으면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사실 정말로 괜찮았다면 처연한 듯 애매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게 맞을 리가 없지. 그냥 막 사람들과 교류하며 즐거워하며 지금 사태도 미안합니다.. 그치만 온전히 제 책임만은 아니에요. 라고 사과 한 번으로 끝냈겠지...
사실 내일 무사히 출근해~ 로 끝났다면 그렇게 넘어간다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요. 다림은 진화의 말에 말을 잇지 못하고 말문이 막힌 채 어물어물한 표정을 짓습니다. 멀어지는 걸 권장하려 하면서도 실망을 안겨주거나 나쁘게 보이고 싶지 않다니. 참... 이상한 반응이겠네요.
"친하게 지낸.. 그런 이들을 공격을 했다는 게.." 용서가 잘 되지 않네요.. 한숨을 내쉬고는 눈을 피하면서 말을 해보려 합니다. 가끔 이렇게 강하게 나오는 분들에 못 이깁니다. 자꾸 말을 하면 안 되는데. 상황이 자신에게 자꾸 입을 열게 만드는 것이었을까요?
"친하게 지낸 이들이나.. 가족처럼 생각한 분이 안 좋게 돌아가셨거든요." "아무래도 저랑 같이 있던 것 밖에 공통점이 없는 만큼.." 저는 친한 이들의 안위에 좀.. 예민한 편이에요. 라고 말을 해봅니다. 그렇게 말에 얻어맞고도 범위를 꽤 줄인 것 같군요. 말만 듣기로는 몇 사람이다. 정도로 넘어갈 수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