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지만 바닥에 콩, 하고 떨어지는 릴리의 구두 뒷굽 소리는 이미 ‘충분히 노리고 있었습니다’ 하고 광고해 주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릴리는 명석한 두뇌를 발휘하여 지금 자신이 처해 있는 이 곤경을 분석해 보려고 했다. 그랬더니 쉽게 알 수 있었다. 이것은…… 지금 이 상황은…….
…… 이건 시험이다.
샤르티에 집안의 비전서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 인생은 언제나 시험받는 것의 연속이고, 자기가 처한 시험과 함께 정답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늘 명석하며 깨어 있어야 한다고. 그것이…… 진리로 향하는 길이라고…….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가…… 가져가지…… 그…… 래……!”
그렇다! 연금술의 해법 일부가 들어 있을 법한 책을 흔쾌히 포기할 수 있는가? 책과 글은 어디까지나 보물상자를 여는 열쇠이며 진리는 자물쇠의 너머에 있다. 지금 저 책을 구하는 데 눈이 멀어서 무슨 일이든지 했다간, 처음 보는 인간한테 망신만 산 채로 진리에서 멀어지는 꼴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런 유의 시험이겠지!
하중을 견디지 못하는 부실한 건물처럼, 릴리의 애써 지은 웃음은 화산 폭발 현장으로 변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릴리의 표정 요정(가상의 존재)들에게는 이미 대피령이 내려지고도 한참 지났다.
“나는 당장 읽을 필요는 없으니까 말이야……. 헤헹……. 그으…… 그으렇게 읽기를 원하신다면야…… 나야 물론 흔쾌히 넘겨 드리지……. 이런 데서는 양보하는 게 도덕 아니겠어……? 자, 얼른…… 가져가시라구.”
이것이 릴리가 생각해 낸 답안이었다. ‘어때? 이번 시험은 통과겠지?’ 그러고는 머릿속의 헤르메스한테 한 방 먹였다는 듯이 마음속으로 메롱을 날렸다. 하지만, 하지만……!
이것이 연금술의 길에서는 정답일지도 모른다. 아니, 높은 확률로 이것이 정답이리라고 릴리는 확신한다. 하지만, 하지만……!
한편으로 독서광인 릴리는 책을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 악마처럼 자라나는 것을 막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어떡하지……! 어떡하긴, 그야 두 주먹을 쥐고 턱 밑으로 모은 자세로 ‘아주 자아아알생긴 오라버니, 부디 오라버니께서 들고 계시는 책을 저 오렐리 샤르티에에게 건네 주실 수 없으신가요?’ 하고 말하는 거지……!
“ …… ……………………!”
모기 소리로 말하면서, 거의 주먹을 쥐고 턱 밑에 붙이며 눈을 동그랗게 뜰 뻔했던 순간에 머리 위에 통하고 둔탁한 감각이 와닿았다.
“…… 어? 넘겨주는 거야……?”
두 손으로 머리 위에 얹힌 책을 받아서 차르륵 넘겨 보았다. 방금 그것으로 대강의 내용은 머리에 들어온다. 음, 과연 그렇군……. 하고 얕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방금까지 자기를 놀리던 남자의 제안에 이번에는 정말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올려다본다. 그렇게 실랑이를 하긴 했지만 결국 이 사람도 책을 사고 싶어서 온 것이리라. 체면상이기는 해도 릴리가 양보를 한 것도 사실이었고.
그렇담 혹시, 이 사람도 연금술사?
“오호, 그러면…… 진작 말하지 그랬어. 그래, 어디 가서 찬찬히 읽어 보자고.”
다소 기쁜 표정으로 웃으면서 책을 품에 안고, 릴리는 책장의 계단을 종종걸음으로 내려가기 시작한다.
왠지 조금 더 기다렸으면 애교를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IF는 넘어가도록 하자. 나는 그녀에게 책의 소유권을 넘기기로 결정했고, 그것은 바뀌지 않는 것이니까. 그녀에게 책을 건네주자 그녀는 익숙한 듯 책을 촤라락 넘겨 살펴보았다. 내용을 확인하는 것인가? 그러고보니 내가 찾던 책은 저 책이 맞나? 지금 와서 조금, 불안한데 말이지. 저자가 이름이 비슷했나? 이어 그녀는 진작 말하지 그랬냐며 나의 제안을 승낙했다.
"으응?"
뭔가 오해를 산 것 같은 기분이 드는걸. 하지만, 뭐 상관 없나. 책을 안은 그녀의 기뻐하는 표정은, 나로 하여금 책을 건네주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이어 그녀를 따라 계단으로 내려가 계산대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나 돈은 있었나? 그녀의 뒤를 따라가며 혹시 몰라 지갑을 열어보니
...
책은 개뿔 오늘의 끼니를 해결할 돈도 들어있지 않았다. 이것은... 그래. 비밀에 부치도록 하자. 나만의 비밀로. 서점에서의 나만의 비밀로. 책을 살 돈도 잊었을 줄이야...
"계산하고 오라고. 꼬마아가씨. 난 바깥의 벤치에서 기다리고 있을테니까."
나는 먼저 바깥으로 나가 벤치에 앉아 시간을 때울겸 하모니카를 꺼내 연주하기 시작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0hAkmC6Poyk (Englishman In Newyork. 대충 이런 곡입니다)
모르겠다. 이 곡을 불고 있자면, 이방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면서도 어딘가로 금방 날아가버릴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단 말이지.
당연히 자기가 사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던 릴리는 금방 계산을 해치웠다. 서점에서 밖으로 나오고 나서는, 품에 안고 있던 갓 나온 책의 향기를 한껏 들이마신다. 역시, 이 리그닌 향기는 마음을 안정시켜 준다……. 그런데, 마음을 안정시켜 준 건 단지 책 향기뿐만이 아닌 것 같았다.
선선한 바람을 타고 들리는 하모니카 소리. 잠깐 눈을 감고 음악 소리를 듣고 있다가, 릴리는 그 뒤쪽으로 걸어갔다.
“좋은 연주네.”
무미건조한 말투였지만 그 다섯 글자가 진심이라는 것은 만약 릴리의 눈동자를 보았다면 확실히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악사였어? 당신…….”
벤치의 옆으로 빙 돌아가서 연주에 몰두해 있는 그의 옆자리에 풀썩 앉아, 무릎 위에 책을 얹고 가장 앞 장을 펼친다. 티 한 점 없이 깨끗하게 재단되어 나온 속지가 처음으로 바깥 공기를 마시고 숨을 쉬는 듯했다. 속표지에 쓰인 책의 제목과 저자명은, 그가 찾던 것과 비슷한 것이 아니라 똑같았다.
본격적인 독서에 앞서서 책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두 손을 마주 대고 합장하며 감사의 기도. 그러고 나서, 자연스럽게 책장에 손을 얹으며, 릴리는 옆에 있는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려 올려다보고 물어보았다.
“우선 하나 묻겠는데, 당신…… 연금술사인가?”
아까 체면치레하면서 책 가지고 실랑이할 때와는 사뭇 다른, 그러니까 아까와는 반대의 의미로 ‘진지한’ 태도였다.
나는 연주에 집중하여 문이 열리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이대로 계속 연주하다보면, 이대로 날아갈 수 있지 않을까? 이 섬을 떠나, 저 하늘로 날아오른 뒤, 하늘을 빙글 크게 한 번 돌고 돌아오면, 과거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럼, 엄마랑, 아빠를.. 다시.. 그런 새어나오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연주에 담고 있을 때, 그녀의 목소리에 의해 반강제로 지상으로 정신이 돌아왔다.
"아하하. 방금건, 잊어줘."
보이지 못할 장면을 보였다. 설마 그 제어하지 못한 감정이 연주에 섞여 흘러 나왔을지, 그것이 나에겐 제일 걱정이었다. 그런 연주, 누구에게도 들려주고 싶지 않으니까. 그래도 그녀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는지 그녀의 눈은 장난이 아님을 나에게 증명하고 있었다.
'아, 이런거 싫어.'
나는 억지로 헛기침을 두 어번 "크흠, 크흠, 크흐음!" 하고 한 뒤 그녀의 질문에 "아~" 하는 대답을 하기 애매할 때의 말소리를 내었다. "그냥 취미야. 가끔 바깥에서 연주하기도 하고. 간간히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고."
이어 그녀는 내 옆자리에 앉아 책의 가장 앞 장을 펼쳤다. 책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는 단순히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닌, 거의 신봉하는 수준의 사람으로 보였다. 책 오타쿠. 그런걸까? 이어 그녀는 책에 합장을 하곤 두 손을 공손하게 책 위에 올려두었다. 단순히 책 오타쿠 수준이 아닌 것 같은데? 이어 그녀는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연금술사? 아아, 뭔진 알아. 내가 좋아하는 소설책 이름이기도 하고."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 좋아하는 책이다. 사실 연금술에 관한 책이기보단, 인생 자체가 연금술이라는 뜻의 연금술사지만. 물론 도중에 진짜 연금술에 관한 내용도 나온다. 현자의 돌이라던가.
"분명 철이나 다른 재료를 계속 가공, 재련해 금을 추출해내는거지? 하지만 금이라는 물질보다도 연금술사 자신의 영혼을 단련하는 것에 의미를 두고 있다고 하더군. 즉 연금술사란 어떤 의미에서 자신의 영혼을 단련하고 재련하는 자.. 그렇다면 나는 연금술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