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묘하게도 틀리길 바란 예감은 빗나가는 법이 없다. 사람마다 충격적인 사실을 마주했을 때 내보이는 반응은 제각각이다. 누군가는 부정하고, 누군가는 절망하며, 또다른 누군가는 분노하여 난폭한 행동을 하기도 한다. 그는 이 예시 중 무엇에도 속하지 않는 유형이었다. 벌어진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새었다. 미치겠네, 그는 저항할 수 없는 운명의 흐름에 한탄하며 환장하는 쪽이었다. 제발 좀 가만히 내버려두면 안 되나? 학교 보안은 왜 이렇게 허술해? 두 손을 들어 머리를 감싸잡은 채 고개가 앞으로 숙여진다. 잠시간 침묵. 기절할 수 있었다면 차라리 혼절해서 잊어버리고만 싶은 진실들이다. 하지만 도망친다 해도 운명은 달라지지 않으리란 걸 그도 알고 있다.
절규는 오래 가지 않았다. 현실을 부정하고 싶어하긴 했어도 그는 회복이 빠른 사람이었다.
"……노력해 볼게요."
최악의 선택을 하지 않도록, 정정당당하고 공명정대한 인간으로 있을 수 있도록. 후자라면 이미 어긋나버렸는지도 모르지만.
"선생님이 좋아하실 인간이 된다면 조금 이득이 있을까요?"
매구는 어째서 집요하게 학원을 노리는가? 아직은 학생을 죽이는 게 목적이 아니라 하면서 지속적으로 학생들을 공격하는 이유 하며, 충분한 기회가 있음에도 비슷한 방식의 습격만을 반복하는 이유는? 의문은 여전히 많이 남있으나 이것은 무기가 알려줄 수 없는 이야기에 들어 있으리라. 한 일이라고는 앉아서 대화를 한 게 다였어도 정신적인 소모가 있어선지 급격하게 피로해진 기분이다. 그때였다. 그의 충격을 상쇄시켜 줄 상대가 나타난 것은.
무릎 위에 팔을 얹어두고 한숨을 쉬던 그의 귀에 불현듯 헥헥거리는 소리가 꽂혔다. 모래밭이라 발 딛는 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분명 열렬하게 기다려왔던 그 소리였다. 라쉬가 돌아왔다.
"너 진짜…."
불만스런 어조에 라쉬는 시선을 슬슬 피하며 한껏 눈치 보는 표정이 되었다. 슬슬 피하고 싶어하면서도 다시 도망가지는 못 하는 걸 보면 어떻게 변명해봐도 이게 제 잘못이라는 건 알고 있나 보다. 그는 손짓하여 라쉬를 부르자, 개는 머뭇거리다 결국 자발적으로 형에 순응했다. 그는 라쉬의 부들부들한 볼을 붙잡고 짜부를 만들다, 쭉 늘리다, 짜부를 만들다……. 나쁜 자식. 원래는 괘씸해서라도 혼내려고 했는데, 지금의 그는 마음의 안정이 필요한 고로 간식 삭감은 취소하기로 했다. 아무튼 우리 개가 제일 예쁘고 똑똑하고 귀엽다.
민은 저주 마법들과 이념싸움, 폭력과 공포에 유독 예민하게 굴었다. 그건 비단 개인 성향의 문제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또래 학생들이 저주하고 저주 받고, 증오하고 증오받는걸 덤덤히 넘기고픈 마음은 없었다. 민은 어디까지나 평범한 학생이었고, 일탈을 꿈꾸지도 않았다. 요컨대, 2년간 알아온 선배가 아무렇지도 않게 이 상황-크루시오가 오가고 저주 마법이 난무하는-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일상으로 여길 마음이 없다는 뜻이었다. 비일상은 몰이해를 불러왔다.
"선배, 가끔은 달라서 더 눈에 보이는 법이에요. 낯설잖아요. 난 선배가 낯설어요. 난 힘들고 무서운데 선배는 너무 익숙해져서 당연하게 여기는 것 같아서 두려워."
민은 모래성에 잠시 시선을 두었다. 결국 파도 한 번에 사라지고 말 허무한 것들. 그럼에도 민의 태도는 여전했다. 금가락지를 모셔둔 아이처럼 조심스럽고 섬세했다. 민은 이제 다른 조개를 손에 올린다. 아까 길을 만들어둔 조개 껍데기 옆에 놓아둔다. 민은 판단할 수 없었다. 사람과 사람 관계에 있어서 도무지 투박해질 수가 없었다. 모래성을 만드는 일처럼 조심스럽다.
"선배, 이제 이런 질문하지 말까요?"
민이 손바닥에 묻은 모래 가루를 털며 물었다. 허공에 날린 모래가루가 빛을 받아 황금빛으로 반짝거리다가, 많고 많은 모래 알갱이중 하나가 되었다.
"아하하. 그쵸? 리 사감님은.. 음. 보기만 해도 좀, 힘들어 보이신다고 해야 하려나요.."
지금의 리 사감님이 그렇게 당한다면 다음대 리가 될 사람도 그런 과정을 겪어야 하는걸까. 상상해보니 조금 소름이 돋았다. 아무리 목숨을 맡겨둔다고 해도 일단 살아는 있으니 아픔이라던가 하는 걸 더 잘 느낄 것이다. 이거. 전에 그 특제 요리를 조금 더 성의있게 만들어야 했나. 츄르를 마치 시멘트 반죽 펴 바르듯 거칠고 질척거리는 느낌으로 발랐던 그 정체불명의 음식이 머릿속에서 떠올라 조금은 멋쩍은 웃음이 터져나왔다. 음. 그래도 백호님이 맛있게 먹었다면 그걸로 그만.. 이겠지. 그렇고 말고.
"어라~ 그렇다면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겠네요! 잠시 죽었다가 금방 살아나는 기분을 느끼게 되는 걸까요? 뭔가 엄청 새로울 것 같아요, 그거."
죽으면 인생은 끝인데, 금방 다시 살아나게 된다면 분명 사후세계가 어떤 느낌인지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중에 사감 자리에 앉게 된다면, 귀여운 학생들에게 사후 세계 이야기를 해줄수 있지 않을까. 조금 엉뚱한 곳으로 주양의 흥미가 흘러갔다. 벌써부터 학생들의 표정이 대강 짐작이 되었다. 분명 청을 거는 것보다.. 재미는. 글쎄. 주양의 표정이 살짝 진지해졌다. 분명. 꽤 허전할 것이었기에. 모든 게 다 끝이 난다고 해도, 청은 청으로써 제 곁에 남아야만 하는데.
".. 어머나."
아. 내기. 먼저 걸어주었다. 꽤 놀라운 경험이었다. 늘 자신이 먼저 남들에게 내기를 숱하게 걸어본 적은 있어도, 이렇게 직접적으로 먼저 내기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꺼내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게다가 먼저 다른 조건을 걸 줄이야. 역시, 사감님은 조금 다른 걸까. 같은 겜블러끼리는 뭔가 통하는 게 있는 것일까. 용기는 매우 가상했다고 하려 했으나, 어른에게 쓰기에는 조금 이래저래 맞지 않겠지.
당신의 쓰다듬을 받으며 >.< 하는 걸맞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이래저래 색다르면서 신기한 느낌이었다. 아아, 사감님이라는 자리만 아니었으면, 지금쯤 청 대신 자신의 내기에 몇번이고 걸리고도 남았을텐데. 조금은 아쉬운 탓에 주양은 입맛을 다셨다. 그러면서도, 조금은 차분하게 웃었다.
"이게 이렇게 되어버리면.. 저는 조금. 나쁜 사람이 될 수밖에 없겠는걸요? 아니. 원래도 그닥 친절하지 못한 사람이니까. 사감님이 설득에 실패하시고 제가 다음 대 건이 되지 못한다는 데, 청이를 걸게요."
진지하고 차분한 목소리. 그러면서도 담담한 느낌의 목소리로 말하며, 주양은 다시 조금 비열한 미소를 지으면서 청을 쓰다듬었다. 항상 자신이 이길 거라고 당당하게 선포하던 모습과는 조금은 다른 분위기의 것이었다.
당신이 이야기한 대로 사감보다 오래 사는 동물은 없다. 청 역시 그럴 것이다. 분명 졸업 후에도 몇년간은 자신의 곁을 지킬테지만, 그 이후에도 그럴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 사감이 되지 않아도. 그리고 사감이 되더라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평생 내기에 걸었던 무심한 주인 곁에서 남은 여생을 낭비하는 것보다, 자신만의 자유를 찾아. 저 하늘을 날며 남은 여생을 즐기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그냥 날려보내며 작별을 고하는 것은 미련이라는 대단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이상한 기분만을 남길 뿐이니, 이왕이면 완벽한 작별을 고하는게 낫지 않을까. 당신이라면 충분히 자신을 이기고 승리를 거머쥘 수 있을테니까. 지금만큼은. 그 뜻에 반대되는 나쁜 사람이 될 수밖에.
".. 이기실 수 있겠어요? 사감님. 저,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라서 밀이예요."
그러니. 인생에 찾아올 또 한번의 큰 기복을 위해. 부디 자신을 꺾어주기를. 악인들이 으레 그랬듯, 옳은 뜻 앞에 무참히 부러질 수 있기를. 그 과정을 통해, 영원까진 아니지만 영원 가까이 다가갈 겜블러에게서, 영원하지 못할 내깃돈을 가져가서 그 굴레에서 해방시켜줄 수 있기를. 당신과의 대화 이후로 생긴 또 다른 마음은 그렇게 한 없이 커져만 갔다. 주양은 그 어느때보다 해사하게 웃었다. 마음 쓰지 않아도 된다면 자신만의 방식으로 기꺼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친절하셔라~ 뱀은 무섭지 않지만 물리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조심하도록 할게요! 아아, 사감님계서 저랑 비슷한 나이이셨다면 청 대신 제 내기에 걸어보는건데. 조금 아쉬운걸요?"
호박 주스를 받아들며 언제 진지했냐는 양 다시 상큼하게 한쪽 눈을 찡긋였다. 친절하기도 하고. 먼저 조건을 걸며 내기도 제안하고. 이런 감정기복을 가져다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사감이라도 내기에 걸어볼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잠깐 스쳐 지나갔으나 역시 사감님은 사감님이니까 그럴 순 없을거라고 생각하며 미련을 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