왠만해선 고개 돌리지 않더니 이번만큼은 고개를 틀어 리안을 보았다. 장난이란 걸 몰라 다급했으나 열출의 일부인걸 깨닫자 별 말 없이 앞쪽으로 고개를 돌려버린다. 조금 매정해 보일지 모르겠지만 민이라는 사람 자체가 걸음이 느린 터라 딴짓하면서 걸을 여유가 없기도 했고, 멀티테스킹이 잘 되지 않아서 보통 앞만 보고 걷는 편이었다.
"그랬는데 아버지가 화 내시진 않으시고요? 저희 아버지였으면 괜한 짓을 한다고 화 내셨을텐데."
민은 정말로 놀랐다는 듯 물었다. 그야 그럴것이... 현재 민이 가진 리안의 아버지에 대한 이미지는 우락부락한 무림고수쯤 되신다. 그런데 아들 말에 성씨를 두개 붙여줄 정도라면 생각보다 꽉 막힌 사람은 아니겠다 싶은 것이었다. 물론 4일이나 밤낮으로 굶은 리안의 일념 역시 혀를 내두를 만했다. 왜 청룡에 들어갔는지 이해가 되는 대목이었다.
"그런 사건이 있었어요? 음, 짓궂게도. 흥미 있어요. 그래서 그 학생은 차였나요?"
라며 꼰대 민이 물었다. 제 아무리 보수적인 편이라 한들 남의 연애사만큼 재미있는 게 없는 법. 민의 목소리가 약간 높아졌다가 돌아온다.
"원래 아무거나가 제일 어려운 거 아시죠?"
너무 빼지 말고 대답,까지 말하는 순간 리안의 눈빛을 읽었다. 결국 다 묻지 못하고 혀를 찼다. 고민은 온전히 제 후배의 몫이 되어버렸으니 안타깝지 않을 수 있겠나.
"그럼 가장 기억에 남는 선물도 없고요? 정 없으면 거짓말이라도 지어내봐요. 저도 제 후배에게 해줄 말 하나쯤은 있어야죠. 빈손으로 가면 안까워 죽을라 그럴 걸요."
민은 그리 물으며 창밖을 보았다. 어둑한 밤하늘이 스산하게 느껴졌다. 현궁을 향하고 있으니 착각은 아닐테였다. 현궁은 추운 곳이었고 귀신 역시 많았으니. 여러모로 생기 넘치는 청궁과는 다른 분위기일 게 분명했다. 스윽, 민이 조용히 리안의 안색을 살폈다.
우연도 세번이면 인연. 인연인 동시에 운명이라. 그녀는 상대가 말을 참 잘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능구렁이처럼 느물한 말투로 낯간지러운 멘트와 호칭을 입 열 때마다 쏟아내는 사람은 일생 처음이었다. 파이도 가끔 장난을 치지만 어디까지나 장난이지 이토록 자연스럽게 하진 못 했다. 더 강적이라고 여겨야 할지, 그냥 그런 사람인가보다 해야 할지. 판단을 보류하고 뻔뻔함에 담담함으로 응수했다.
"인연이라는 건 그렇다 치겠지만, 운명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네요. 그닥 와닿지도 않고."
정말 말 그대로 쉴 새 없이 작업 거는 듯한 말들을 하는 것도 놀라운데, 시시각각 바뀌는 표정도 놀라운 사람이다. 하지만 단태의 표정이 능글맞을수록, 같은 말투가 이어질수록 그녀의 안에선 희미한 위화감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 날 그 달빛 아래에서 보았던 사람의 모습이 전혀 겹쳐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네, 잘 부탁해요. 단태 선배."
위화감은 속으로만 품은 채 내색하지 않고 다시금 고개를 꾸벅인다. 아직은 단태에 대한 판단을 다 내리지 않았으니 무엇 하나도 섣불리 생각할 수 없는 단계다. 조심히 혹은 무심하게 생각을 밀어내며 천천히 앞을 향해 걸었다.
"어디냐고 해도, 가보면 아실거란 대답 밖에 못 하겠네요."
정말로 가면 알 수 있을지는 솔직히 그녀도 장담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이제와 돌아가란들 돌아가지 않을 듯 하니 따라오게 냅둔 채 걸음을 옮긴다.
모두가 노는 곳과는 이미 제법 멀어져 있었기에, 조금 걸었을 뿐인데도 해변이 끝나 길이 없는 수풀지대 같은게 나왔다. 그래서 그녀는 조용히 가디건 안쪽에서 지팡이를 꺼내 수풀을 향해 디핀도를 읊었다. 그걸 반복해 길 아닌 길을 만들어 놓고 그 안으로 성큼 들어가며 말한다.
"물놀이는 딱히 안 하실거였나봐요. 노는 걸 못 본거 같은데."
모래가 사박이는 소리 대신 잘린 수풀이 으직으직 밟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목소리가 단태에게 향했다.
해변에서의 휴양은 제법 즐거웠다. 학생들의 불안을 너무 단순한 수로 달래려 하는 게 아닌지, 몇 번이고 뚫려버린 보안체계에 대해 새록새록 피어오르는 불신이라든지, 솔직히 말하자면 근 몇 주간 반복되었던 사고에 대한 학교의 수습 방식에 불만이 있기는 했지만 이곳이 좋은 휴양지라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니 말이다. 못마땅한 기분과는 별개로 학기중에 주어진 좋은 경험을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그는 낮동안 썩 충만한 시간을 보내고는……. 지금, 숙소에 돌아가지 못하고 해변에 묶여 있었다.
곁에 라쉬는 없었다. 어떻게 된 사연인가 하면― 밤 시간대엔 입수를 하지 못하니 실내로 들어갈 생각이었는데, 라쉬가 온종일 모래밭에서 굴러 인절미 떡뭉치가 된 것이다. 그래서 몸 씻고 모래를 털자고 하니 죽어도 싫다며 그를 두고 휑하니 도망가버린 게 지금 상황이었다. "야, 네가 튀면 어떡해!"라고 외쳐보아도 쏜살같이 달아난 개는 돌아올 기미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별 수 없이 제자리 붙박인 채 라쉬가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나쁜 개야. 며칠동안 간식 삭감이다. 모래밭에 펼쳐진 빈 의자에 앉아 꿍얼거리는 덩치는 제법 인상적인 광경이었다.
백호님께 피냐타(야매)를 선물해준지 얼마라고 리 교감님은 다시 죽상을 하며 교내를 돌아다니셨다. 잠깐, 피가나는 건 기분탓인가? 이쯤되면 걱정을 안 할 수가 없었다. 민은 직감적으로 그 피냐타가 한시간도 버티지 못한 채로 터져나갔음을 깨달았다.
오래 버틸만한게 필요했다. 오래 버틸만한... 오래 버틸만한.... 민은 그 고민을 하느라 주말 하루를 침대속을 벗어나지 못했다. 정정한다, 그냥 벗어나기 싫어서 벗어나지 않은 것이다. 아무튼, 민 나름대로 열심히 고민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고민하는 시간의 반은 낮잠이었고 또 반은 구름처럼 흘러가는 무의식이었지만 아무튼 주체가 고민이라 지칭하면 고민이다.
"그러고보니..."
개 한 마리를 패밀리어로 둔 친구가 샀던 장난감이 떠올랐다. 공모양처럼 생겨서 이리저리 굴려야 안에 들어있는 간식이 겨우 한 조각 나오는 장치였다. 그거라면 충분히 시간을 끌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민이 벌떡 일어났다.
주섬주섬 책상에 자리 잡고 한참을 낑낑거려 만든 결과물은 썩 나쁘지 않았다. 손재주가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세심하게 신경쓰는 일에는 재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백호님이 물건의 의도를 거스르고 반 찢어 놓는다면 말짱 도루묵이 되겠지만 민은 백호님이 그렇게 무자비한 사람이 아닐 거라 믿었다. 적어도 그렇게 바랐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리에게 고통을 주는 근본적인 원인은 결코 고쳐지지 않았고, 이변이 없는 한 앞으로도 달라지지 않으리라. 아마도 꽤 오랫동안, 어쩌면 영원토록…? 사감들의 기묘한 특성에 관해선 자세하게 아는 바 없으니 추론할 수는 없었다. 그저 리가 조금이나마 덜 물어뜯기기를 바라는 수밖에.
지난번에는 장난감(그것을 장난감이라 부를 있다면 말이다.)을 전달해드렸으니 이번에는 다른 것을 준비해야겠다. 좋은 게 뭐가 있을까, 이번에도 쉽게 답을 얻지 못해 고양이를 키우는 아는 학생에게 물어 힌트를 얻었다. 분명 전에도 백호를 고양이 취급 하지 말자 생각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