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에서 나온 직후 곧장 비치 가디건을 걸쳤기 때문에 가디건이 죄다 젖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의 긴, 묶은 머리에서 떨어지는 물이 가디건을 피해 바닥으로만 떨어져 준다는 보장도 없으니까 말이다. 애써 입은게 무색할만치 젖은 가디건을 그저 무심하게 툭 털고, 그녀는 가던 길을 계속 가려 했다. 어디선가 들린 묘령의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
귀를 의심케 하는 호칭에 그녀는 그게 자신을 향한 것일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아직 그도 그녀를 그렇게 부른 적이 단 한번도 없는데, 뭐 그럴 사이가 맞는가부터 의구심이 들지만, 누가 그녀를 그렇게 부르겠느냔 말이다. 남매들 간에도 그런 장난은 안 치는데. 하지만 주변에 사람이라곤 그녀 밖에 없었기에 돌아볼 수 밖에 없었다. 그만큼 인적이 드물고 외진 곳이었다는 의미도 포함이었다만.
"???"
자, 뒤를 돌아 목소리의 주인을 향한 그녀의 표정은 어땠을까.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는 그 사람의 정체보다 그 사람이 입은 옷에 먼저 시선이 닿았다. 현란하고 화려한 하와이안 셔츠를 어떻게 안 볼래야 안 볼 수가 있을까. 그리고 그녀는 그런 시각적인 것에 잘 끌리는 편이었다. 오감 혹은 육감 중 톱이라도 해도 좋을만큼 보이는 것에 대한 신경도가 높았다. 이러한 이유가 있다보니, 그녀는 자연스럽게 표정을 바꾸었다. 마치 생전 처음 거울을 본 고양이 같은 표정을 했다.
그 엄청난 옷에 경외를 표하듯 두 눈을 크게 뜨고 놀라기를 몇초, 그게 자연이 아닌 사람의 옷이라는 걸 깨닫는데 다시 몇초, 그리고 그 사람이 그녀를 불렀을거란 걸 깨닫는데까지 든 몇초를 모두 더하자면 1분 남짓되는 시간 되시겠다. 실제로는 순식간이라 해도 좋을 만큼 짧은 놀람과 침묵과 판단을 거친 그녀가 놀란 눈을 평소의 눈으로 되돌리며 고개를 꾸벅였다.
"안녕하세요."
상대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일단 제쳐두고 먼저 예의바르게 인사를 했다. 잘은 모르지만 선배일거란 예감이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예의를 차리는 건 당연했겠지만. 아무렇지 않게, 그냥 지나가다 마주친 사람을 대하듯 인사를 하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몰래 사고 치러 가는 건 아니니까,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거에요."
어디까지나 그녀의 입장에서 그렇다는거니 상대가 어떻게 받아들일진 모른다. 그래도 정말로 뒤가 켕길 만한 짓을 하러 가는 건 아니라서, 사실대로 말하고 금방이라도 갈 것처럼 발을 끌었다. 지익. 하고.
본가에 있는 사람들이 본다면 기함을 토할 옷차림이였다. 아니 평소에는 평범한 옷으로 잘만 입고, 나주 본가에서는 순혈 가문의 사람답게 점잖게도 입고 있으면서 왜 해변 패션은 저런지 모르겠다. 어찌되었든 간에 단태는 딱 두번, 그것도 아주 우연히 같은 자리에 있었던 학생의 뒤를 쫒기 시작했다.
누가 보면 매우 수상쩍은 풍경이다. 아주 수상쩍은. 자신을 향해 돌아서는 여학생을 향해, 단태는 꽤나 자연스럽게 한손을 들고 살랑살랑 좌우로 흔들어보였다. 자연스러운 인사였다. 굉장ㅎㅣ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여학생의 표정에 단태는 흔들었던 손을 선글라스에 대고 슬쩍 아래로 끌어내렸다. 샐쭉- 가늘어진 눈매 속에서 암적색 눈동자가 반짝거리는 건 호기심에 기반된 것이다. "이거 좀 서운하네. 달링~ 우리가 대화는 안해봤지만 우연히 마주친 게 두번인데~" 나 기억 안나나봐? 하고 단태가 사뭇 섭섭하다는 기색으로 눈썹을 아래로 늘어트리며 물음을 던졌다가 별거 아니라는 양, 어깨를 크게 으쓱하고 히죽 미소를 지어보였다.
"오, 나도 우리 달링이 여기까지 와서 사고를 칠거라고 생각은 하지 않지만~ 요새 좀 일이 많았잖아? 혹시나 하는 게 있다는 거지~ 굉장히 실례가 될 수도 있지만 일단은 자기의 안전과 나의 심리적인 안정을 위해서 동행을 해도 된다면 내가 동행을 해야할 것 같은데."
금방이라도 자리를 뜰 것 같은 여학생의 옆으로 단태가 가까이 다가서며 뻔뻔스러운 말을 능글맞고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선글라스를 콧잔등 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두고 반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뒤, 단태는 헤죽- 웃음을 지었다. 그러고보니 우리 서로에 대해 잘 모르던가? 재잘거리며 말을 덧붙히는 게 뻔뻔하다.
정말로 뭐가 미안한건지 모르겠다는 듯이 그는 방긋 웃어보였다. 어차피 진짜로 이야기 주제를 바꾸려고 하던 찰나기도 했고, 그저 타이밍을 조금 애매하게 맞췄을 뿐이라서 그런거라고 마음속으로 생각하며 그는 천천히 물건을 들어준채 소녀의 궁금증을 풀어줄 겸 유쾌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아아! 그거요? 음 이 이야기는 제가 일곱살 시절부터 거슬러 올라.... 갸악, 혀 깨물었다."
마치 모 투머치토커 야구선수를 떠올리는 듯한 말버릇을 흉내내며 분위기를 전환시킨다. 동시에 일부러 혀를 깨물며 그 장난스러움에 감칠맛을 더하였고 이내 가볍게 웃음을 떠넘긴 뒤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 시절에 아버지한테 '왜 난 엄마 성씨도 가지고 싶은데 아빠 성씨만 있어?'라고 물었거든요. 근데 아버지가 원래 그런거라고 답변했는데 싫다고 울고불고 피던 아이가 저라는 사실. 그렇게 밥도 안먹고 4일 밤낮으로 투정부려서 지금의 성씨가 된거에요."
지금의 모습을 생각하면 상당히 이해가 안갈 수도 있는 내용이지만 본인이 그랬다고 하니 그럴 것이리라,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면서 걸음을 계속 옮겼다. 무언의 긍정이라는 것은 단순히 몸짓만으로도 표현하는게 아니라는 단적인 의미였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같이 옮기면서 생각난듯이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생각해보니 이 길이 제가 감점당한 이유중 하나겠네요. 왜 그 주궁 남학생 고백사건, 제가 등떠밀어서.... 킥킥킥...."
그렇게 실없는 이야기를 마칠즘, 소녀의 질문이 던져진다. 음? 뭘 좋아하냐고?
"전 뭐든지 좋아해요. 왜냐면 제 방송을 좋아해주시는 분들이 주는 선물인데 좋고 싫고가 다 어디있어요? 막말로, 지금 그거 골라서 이야기 하기 힘들어가지고 랜덤가챠깡으로 하는건데."
한순간 머릿속을 새하얗게 날려버릴만큼 화려한 옷의 무늬 탓이었을까. 평소의 그녀라면 상대가 어디서 본적있는 사람이라는 걸 금방 깨달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겨우 놀란 걸 수습하고 적당한 말을 하는 것에 집중했던 탓인지, 구면 아닌 구면이라는 걸 들은 뒤에야 눈치채었다.
알았다는 표정을 지은 그녀는 푸른 머리칼과 선글라스 뒤로 드러난 붉은 눈을 보고 가장 최근의 사건을 떠올려냈다. 시체 마법사에게 일격을 가하는 순간, 그녀처럼 그 마법사의 가까이에 있던 사람이다. 처음과 마지막이었을 거다. 분명. 그 때와 전혀 다른 모습이라 쉽게 매칭이 되지 않지만 저만한 외적 특징을 가진 사람을 그녀는 달리 알지 못 했다. 상대도 마주쳤다고 말하고 있고. 그러니 같은 사람이라 간주하기로 하며, 익숙치 않은 호칭으로 저를 불러대는 상대를 빤히 보았다.
"우연히, 같은 자리에 있었을 뿐인걸요. 두번 다."
두번이라는 건 그 전, 버니의 사건 때에도 있었던 걸까. 다시 생각해보려 해도 그 때는 잘 떠오르지 않는다. 최근에 일이 너무 많아서 그런가보다. 아니면 좀더 비중이 커진게 있거나. 두말 할 것도 없이 있었지만.
"그러세요. 남에게 보인다고 해서, 찔릴 것도 없거든요."
굳이 동행을 해야겠다는 상대의 말에 그녀는 흔쾌히 그러라고 했다. 전혀 켕길게 없으니까 제법 당당해보였겠지. 아니면 동행한들 상대로서는 아무것도 못 할거라고 생각한 걸까? 어느 쪽이든 그녀는 가던 길을 그만둘 생각이 없었다. 금방이라도 발을 뗄 듯 하면서 상대가 가까이오는 걸 지켜보다가, 상대의 능청에 동의나 그런 말 대신 자기소개를 돌려주었다.
"펠리체 스피델리, 백궁, 4학년이에요."
원래라면 먼저 소개를 하지 않았겠지만 최근에 이래저래 할 일이 많았다보니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잘 모르면 알아가면 되는거고. 어련히 알아서 소개를 되돌려주겠거니 생각하며, 그녀는 멈췄던 발을 떼어 걷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