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혜는 가만히 그 선전 포고를 듣고 있는다. 이 말이야말로 가장 좋아하는 말이었다. 영혜가 살면서 살아 온 사람들은 누구나 '당연히 너한테는 질 거야'라고 말하며 떠나갔지만, 수아는 이번에도, 역시, 지지 않겠다고 말해 준다. 이렇게 말해 주는 것은 수아뿐이다. 역시······ 역시······.
'역시 친구란 건 좋네!'
조용히 미소지으며 주먹을 불끈 쥔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두근두근거리는 것은 아마 우정 때문일 것······ 이라고 생각하면서. 영혜는 잠깐 기쁨의 시간을 가지고 나서 대답했다.
"······ 응, 열심히 해 줘. 응원할게. 나도, 합격했으니까."
자신을 넘어서는 데 혈안인 사람에게 이런 말이라니, 일견 무정하게 비칠 수는 있지만, 정작 이것이 나름대로의 애정이라고 스스로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야, 친구가 노력한다는데 거기에 찬물 끼얹을 사람이 어디 있겠어.
"그, 저기······ 말이야."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모자라다······. 전화 너머로 와와 하고 호들갑을 떨거나, 축하해, 라는 말을 건네는 것만으로는 오롯이 나눌 수 없는 기쁨이다. 영혜는 수아가 무척 보고 싶어졌다.
열심히 해달라는 말에 수아는 남모를 한숨을 작게나마 내쉬어 보았다. 사실 이쯤되면 적당히 포기할법도 하거늘, 수아는 영 포기를 모르는 성미였다. 아예 등수에서부터 크나큰 차이가 났다면 모를까, 1등과 2등이라는 단 한 등수의 차이가 수아를 더욱 감질나게 만들었다. 불가능 할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으면서도, 그래도 한 등수 차이면 해볼만 할지도 모른다며 가슴이 두근거리는 통에 여지껏 포기를 못 하는 것이다.
"응 고마워. 대신 너도 열심히 해줘야 돼. 그리고 당연하지만 봐주지도 말고."
그래야 내가 다시 한 번 너에게 지더라도, 또 한 번 너를 넘어서기 위해 도전할 수 있을테니까. 봐주는 것도 물론 사절이었다. 그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못했다.
영혜의 물음에 수아는 "오늘?" 하고 되물으며 책상 위에 놓인 작은 캘린더를 확인했다. 요즈음은 휴대폰으로 일정을 기록해두는 것이 대부분이라지만, 수아는 혹시 싶어 늘 습관처럼 종이로 된 달력에도 제 일정을 표시해두었다. 오늘은 별다른 일정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 수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끄덕임은 영혜에게는 보이지 않겠으나, 무의식 중에 나온 행동이었다.
"그래 만나자. 안 그래도 오늘은 한가하던 참이기도 했고. 만나서 하고 싶은 거라도 있어?"
수아는 휴대폰을 쥐고 있지 않은 손으로 자신의 머리카락 끝을 만지작 거렸다. 뜬금없게도 느껴지는 그 제안에 내가 순간 기뻐했다는 걸 네가 모르면 좋겠어. 수아는 휴대폰을 얼굴에서 잠깐 떨어뜨린 뒤 작은 목소리로 큼큼,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지금 영혜가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것은 바로 수아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 이 세상에 실제로 존재하는 정수아를 느끼는 것. 시각으로든, 후각으로든······ 앞으로 적어도 3년 더 함께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영혜는 잘 실감나지 않았다. 그저 받아 버리기에는 너무 큰 행복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보다 사실적인 증거가 필요했다. 목소리 말고도······ 실물로 된 증거가.
"······ 아무튼, 바로 나갈게."
이윽고 곧바로 전화 너머로 영혜의 집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가 흘러갔다. 문답무용으로 나서는 모양이었다. 계획 같은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만나고 싶다는 마음이 다른 모든 감정에 앞서고 있었다. 왜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인지는 영혜 스스로도 잘 대답할 수 없었다. 그저 지금으로서는, 어찌됐든 '친구니까'라고밖에 둘러댈 수 없는 그런 마음이다.
"시내······ OO역 1번 출구. 갈게."
머릿속에서 가능한 한 수아의 집에서 가장 가까운 지하철 역 출구를 꺼내 말하고는, 그곳을 향해 무작정 잰걸음으로 가기 시작했다. 그러던 와중에 길가에 있는 단 한 지점에 시선이 이끌려 잠깐 시간을 지체하기는 했지만, 그것만을 제외하고는 도착한 시간이 영혜가 계산한 최단 시간과 1분도 어긋나지 않았다.
지하철 출구의 표시가 된 기둥 옆에 와서 선 영혜는, 역 표지 기둥과 마찬가지로 길쭉한 자작나무 같은 몸을, 더욱 길어 보이게 만드는 잿빛 코트를 어깨에 걸치고, 목도리까지 둘둘 둘러 눈만 빼꼼 내민 채로, 코트의 옷섶에 팔을 감춘 모습이었다.
수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영혜야 보지 못하겠지만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영혜는 이제껏 단 한 번도 수아를 봐 준 적이 없었고, 그건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럼에도 굳이 당부를 해두는 것은 그저 자신의 각오를 다시 한 번 다지기 위함이었다.
"응 그래. 그러면 뭐할지는 만나서 정하자. 나도 바로 나갈게."
만나면 일단 어디 따듯한데 들어가서... 천천히 수다 떨면서 다음 일정을 정해도 되겠지. 수아는 만날 장소를 정해들은 뒤 전화를 끊고, 부지런히 나갈 채비를 시작했다.
옅은 피부 화장 정도만을 한 뒤 입술에 연분홍색의 틴트를 발랐다. 머리는-어쩔까. 그냥 평범하게 푸르고 가기로 했다. 오늘은 조금 추우려나. 어지간해서는 실내에만 머무를 것 같긴 하지만 따듯하게 입는 편이 좋을 것이다. 흰색 스웨터와 다리에 딱 달라붙는 검정색 바지, 위에는 기다란 갈색 코트. 연푸른색의 목도리를 두르고 소지품이 담긴 작은 에코백을 맨 뒤 집을 나섰다.
영혜가 수아의 집에서 가까운 지하철 역 출구를 약속 장소로 잡아준 덕에 수아는 오래 지나지 않아 지하철 역 출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오랜만인 것처럼 느껴지는 영혜를 발견하곤 반가운 듯이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들며 가까이 다가갔다. 평소에도 늘 생글거리며 미소를 짓고 있는 수아지만, 오늘은 유달리 더 기분이 좋아 보인다. 반가운 내 친구. 내 라이벌. 그리고...
"안녕. 엄청 빨리 나왔네." "일단 어디 따듯한데 들어갈까?"
지하철 역은 보통 그 따듯한 곳 중 하나로는 치지 않을 것이다. 카페나 식당이나, 일단 어디든 들어가서 자리를 잡는 편이 좋겠지.
얼굴에 드러나는 기쁨을 감출 길 없이, 영혜는 수아를 향해 걸어왔다. 그러고는, 옷섶에 숨겼던 팔을 꺼내 수아에게 대뜸 내밀었다. 종이 상자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조각 케이크였다.
"······ 그, 이거······ 기념······ 선물······."
단어 4개를 말하는 데도 한참을 쩔쩔맨 끝에, 전혀 문장의 형태를 갖추지 않고 말을 끝맺었다. 전화를 걸기 전부터 이미 만날 각오를 했던 것인지 영혜의 속눈썹은 살짝 길어져 있었다. 차고 살짝 축축한 바람이 영혜의 꽁지머리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아무데나 들어가자는 말에 고개를 마구 끄덕이며, 수아에게 걸음을 따라붙인다.
"그렇- 그렇지. 어디든 들어가야겠네······. 응."
멀쩡한 상황이었다면 이런저런 계산을 통해 도출한 최적의 대화 장소를 골라 그곳으로 향하는 최단 루트로 수아를 이끌었겠지만, 지금의 영혜는 옅은 화장을 갖춘 수아의 얼굴을 영접한 나머지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맞장구를 치는 것이 고작이었다.
"오늘, 기념비적인······ 날이니까, 호화롭게 먹자. 나, 밖에 나가질 않아서 용돈도 꽤 모였고······. 어지간한 건 사줄······ 테니까."
그나마 애써서 제안한다는 의견이 고작 이런 것이었다. 오랜만에 만나서인지 오늘의 영혜는 심하게 숙맥이었다. 영혜의 기준으로도 제법 되는 거리를 뛰느라 약간 숨이 찬 탓도 있었겠지만. 그리고, 영혜는 자기가 말을 더듬는 가장 큰 이유가 그것이라고 열심히 위장하고 있었지만.
선물? 수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영혜가 건네준 작은 종이 상자를 받아들었다. 깜빡이는 눈에 영혜의 얼굴을 살폈다. 평소에는 잘 하지 않는 화장을 옅게나마 하고 온 것일까. 수아는 금새 상자의 내용물을 살피려 시선을 떨궜다. 크기나 형태로 미루어 보아 하건데, 아마도 조각케이크 같은 디저트류가 들어있는 듯 했다. 조심하지 않으면 안에 든 게 망가질지도 모르니 조심히 다뤄야겠다 다짐했다.
"누가 보면 나 혼자 붙은 줄 알겠어."
수아는 작게 웃으면서도 고맙다는 말과 함께 기쁜 마음으로 선물을 받아들였다. 그보다, 설마 선물을 받을 줄은 상상도 못 하고 있었는데. 고독한 늑대 같아 보이는 제 친구는 의외로 귀여운 일면이 있었다. 물론, 이런 모습은 나 말고는 모를테고, 또 몰랐으면 좋겠다.
"이미 선물도 받아버렸는데 밥까지 얻어먹을 수는 없어." "식사는 각자 알아서 내기로 하고... 대신 다음에 가는 곳에서는 내가 살게. 영화든 카페든. 나도 돈 많아."
아니면 그 외의 장소라도. 수아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빚을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었다. 무언가를 받으면 받은만큼, 혹은 받은 것 이상으로 돌려줘야 직성이 풀렸다. 그러지 않으면 내내 신경이 거슬릴 정도였다. 그녀는 선물조차도 일종의 '빚'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영혜에게서 이 이상 무언가를 받는다는 건 수아 본인에게 거북한 일이기도 했다. 뭔가를 더 받거나, 그대로 돌려주지 않는다면 그땐 정말로 자신이 영혜와 동등한 위치에 올라 있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 되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리고 합격한 건 나 혼자가 아니잖아? 나도 너한테 사줄래. 기념 선물."
영혜가 합격하는 건 이미 정해진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당연함'을 축하하지 않을 필요는 없었다. 일단 가자, 라는 말과 함께 수아는 반듯하고도 차분하게 장소를 이동하려 할 것이다. 지금 당장 머릿 속에 정해둔 곳은 없지만, 걷다 보면 적당히 생각나거나 걸으면서 정해도 괜찮지 않으려나 싶었으니.
"그런데 뛰어왔어? 숨이 차 보이네."
말을 쩔쩔매는 영혜가 평소답지 않아 보였다. 평소에도 말 수가 많은 아이는 아니지만 그건 말을 못해서 그런 게 아니었는데.
아무래도 장맛비에 기력도 너무 빨려 버렸고, 영혜 캐릭터가 손에 안 맞는 것 같아서 답레 쓰기가 고역이 된 것 같아.... 멀티도 괜찮을 줄 알았는데 올해 장마가 정말로 헬이라서 생각보다 탈력이 훨씬 심하게 오는 바람에... 😭 정말로 미안하지만 1:1 돌리는 건 보류로 해도 괜찮을까.....
물론이야. 괜찮아 영혜주. 지금 시기에 기력이 쭉쭉 빨리는 느낌은 나도 완전히 이해해. 무엇보다 답레 쓰기가 힘들어졌다면 그 상태로는 상판이 취미가 아니라 일이 될테니까 말이야. 짧은 시간이었지만 영혜라는 매력 넘치는 캐릭터랑 돌릴 수 있어서 즐거웠어! =D 언제든지 돌아와도 괜찮구 그게 힘들다 하더라도 이해할게. 현생 건강히 잘 보내길 바라고 즐상판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