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방에서 작업을 마치고 나오는 길이었다. 오전부터 하늘이 심상찮더니 결국 장대비가 쏟아진다. 보통은, 비 소식이 있어도 들고 다니기 번거롭다는 이유로 우산을 잘 챙기지 않는다. 옷은 이미 땀에 흠뻑 젖었고, 어차피 기숙사에 돌아가면 샤워와 세탁부터 하는 것이 일상이니, 이 정도 비쯤은 그냥 맞고 가도 괜찮겠지 싶었다. 아니, 오히려 물을 맞으니 이런저런 이유로 복잡했던 머리가 환기되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기숙사 건물 입구로 들어서려는데, 마침 반가운 이가 현관으로 나오는 중이더랬다.
바다는 자신의 지배력을 활성합니다. 물은 곧 자신의 수족과도 같은 것입니다. 부름에 따라 집결해, 뱀의 형상처럼 구불거려 상대를 잡아먹을 듯 거칠게 흐르고 또 흐릅니다. 바다는 그걸 보고 흡족한듯 미소를 한번 짓고는, 이내 우아한 손짓으로 진화를 가리킵니다. 거기엔 아주 간단하고 확고한 명령이 담겨 있습니다.
'쓰러트려.'
촤아아악!!
바다의 바램을 담은 물들이 망설임 없이 진화를 덮칩니다. 그러나 진화는 당황하지 않습니다. 그저, 방패를 들고 우직하게 나아갈 뿐입니다. 쿵. 쿵. 쿵. 땅이 울리는 듯한 무거운 발걸음과 함께, 거대한 성벽이 조금씩 나아갑니다. 강렬한 물줄기가 계속해서 쏘아지지만, 진화는 개의치 않습니다. 둘의 거리가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합니다.
"언니, 재밌네."
바다는 그걸 보며 흡족하게 웃습니다. 과연, 물줄기 정도로 성벽을 되밀어낼 순 없단걸까요. '무게' 의 격이 다릅니다. 그러나 별로 초조하지는 않습니다. 확실히 나름대로는 무거워보이지만, 과연 그게 심해의 압력도 버틸까요?
심해광영
그녀가 의념을 폭발적으로 전개시키자, 주변에 청명한 물이 아닌 칠흑과도 같은 심해가 전개되기 시작합니다. 빛조차 들어올 수 없는 바다의 심연. 그곳에서 무엇이 벌어지는지는, 그야말로 바다의 지배자가 아니라면 알 수 없습니다. 지독히도 밀도 높은 물로 가득찬 심해는 겁없이 발을 내민 모든 것을 짓눌러, 찌그러트려, 잡아먹을 것입니다. 바다의 바램대로 말이죠.
"큭!"
진화의 표정이 굳습니다. 저 기술이 완전히 전개 되기전에 무언가 해야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속도로는 지금의 거리에서 바다에게 달려들 수 없습니다. 같은 이유로, 영역이 펼쳐지기전에 범위에서 벗어나는 전략도 취할 수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할까요? 스스로에게 뻔한 질문을 해보아도, 대답은 언제나 같습니다. 자신은 그저 견딜 뿐입니다.
부동일태세
자신의 방패를 말뚝처럼 바닥에 내려찍은 진화는, 그것을 기둥삼아 견고한 자세를 취합니다. 충격을 견디기 위한 방어의 기술. 단단한 성벽에 강철이 둘러지고, 이윽고 마치 강철로 이루어진 작은 산과 같이 됩니다. 산은 어떠한 위험에도 움직이지 않고, 무너지지 않고, 변하지 않습니다. 심해에 산이 잠기는 모순적인 상황이 발생합니다.
쩌적, 쩍....
압도적인 내구를 가지고 있는 성벽이, 쉴 새 없이 밀고 들어오는 압력에 조금씩 찌그라들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진화는 자세를 풀지 않습니다. 그러긴 커녕, 표정조차 바꾸지 않습니다. 부동이란 그런 것입니다. 전신이 으스라질 것 같은 무게를 견딥니다. 진화는 언제나, 영웅으로써의 무게를 견디며 싸움에 임하고 있습니다. 그 각오를 되살리며,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은 심해의 세계속에서 순간 순간이 짓눌려갑니다.
"......"
이윽고 심해의 공간이 사라졌을 때, 바다는 조금 놀란 기색으로 진화를 바라봅니다. 갑옷 여기가 망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서있습니다. 그녀의 경험속에서 이 기술을 오로지 미련하게 견디는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눈동자가 해룡의 혈통을 증명하듯 날카롭게 찢어지고, 입꼬리가 더욱 올라갑니다. 재밌습니다. 무척 재밌습니다.
서로 큰 기술을 쓴 직후 마주보며 숨을 고릅니다. 여기까지로 마무리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화는 바다의 표정과 눈빛에서 끓어오르는 흥미를 눈치챕니다. 귀여운 여동생이 놀아달라면, 아직 더 어울려줄 손패는 남아 있습니다.
"언니, 나 좀 더 갈게."
【수신용왕】
"그래. 그래."
【그래도 나는 영웅을 꿈꾼다】
해룡과 강철의 영웅은, 그대로 서로에게 충돌합니다. 그 직전 진화는 스쳐지나가듯 생각합니다.